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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11화 (11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1화

111화

1425년 2월 중순 모일.

한성부. 예조 영사도감.

"정말로 윤봉이라는 환관이 사신으로 오다니, 대군께서 예측하신 대로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칭찬하던 최만리가 심각한 표정의 양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별것 아닐세. 온 것이야 맞췄지만 중요한 건 이 이후부터니 잠시 생각을 좀 했을 뿐이야. 그나저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나도 윤봉이 사신으로 왔다는 것까지만 들어서 말이야."

"참, 대군께서는 한동안 일이 있어서 댁에만 계셨지요. 우선 주 사신인 정사로는 대군 말씀대로 윤봉이라는 자가 왔고, 그를 보좌하는 부사로는 박실이라는 자가 왔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환관들이 같이 왔습니다."

"혹시 윤봉 외의 다른 이들은 어떤 자들인지 알아냈는가?"

"이미 예조에서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합니다. 본인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박씨 성인 것을 보아하니 부사 박실 역시 조선 출신일 것이고, 딸려 온 다른 환관들도 성이나 이름을 보니 대다수가 조선 출신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알아낸 전부입니다."

"역시 작정하고 정탐하려 조선 출신 환관들로 보냈군. 지금까지 달라고 한 물건들은 무엇무엇이 있었는가?"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그나마 자기 고향인 황주부 서흥의 부모 묘에 성묘를 간다며 거기 쓸 향이나 공물을 요청했던 정도지요. 오히려 가져온 게 있었습니다. 명나라 황제가 주상전하께 보낸 선물들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박실과 함께 이것저것 챙겨 와서 주상전하께 바쳤습니다. 설탕, 용안과육, 여지처럼 남방에서 나는 귀한 것들이라 합니다."

최만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양녕이 문득 염려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혹시라도 좋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지 말게. 조선 정세를 정탐하러 보낸 것이니 황제도 선물을 후하게 들려 보내 경계를 풀게 하려 한 것일 테고, 윤봉도 내가 이런 것을 주었는데 이것 좀 해달라는 식으로 나오려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야."

"물론입니다. 듣자 하니 아직 요청한 물건은 없지만, 제 고향인 서흥이 인구가 많으니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시켜 달라는 소리를 했다는군요."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조선 군현의 제도가 달라져 제일 위에 부가 있고, 부의 중심 고을이 목이고, 그 아래는 다 군과 현일 뿐이라고 하자 표정이 복잡해졌다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흥을 목으로 삼고 황주부를 서흥부로 바꿔달라는 소리는 못 하나 보군. 그 당황했을 꼴을 생각하니 우습기는 하지만, 괜히 심사가 비틀려서 패악질이 심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건 좀 걱정됩니다. 그나저나 이제 사신단도 한성부에 도착했는데, 대군께서는 어찌 움직이실 계획이십니까?"

"내가 자택에서 준비하던 것들도 다 끝나가기는 하지만 한동안은 밖에 나가지 않을 생각이네. 괜히 미리 눈에 띄어서는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직접 안 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 있어도 지금처럼 자네가 소식을 전해 주면 되고, 내가 계획하는 것들도 자네가 조정에 전달하면 되지 않겠나. 어차피 내가 사신 접대를 전부 관리하는 것도 아니니, 자잘한 것까지 내가 할 필요는 없어. 나머지는 조정에서 진행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정에 어떻게 전달할까요?"

양녕은 턱에 손을 대고 천천히 생각하며 말했다.

"첫 작전이 되겠군. 우선 정사와 부사인 윤봉과 박실은 필히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챙겨온 비단이며 명주며 포목 같은 것들을 모피로 교역하려 할 걸세. 이것은 어차피 조정에 요청하겠지."

"그렇겠지요. 아무래도 사신으로 온 만큼 조정과 거래하는 것이 값을 더 쳐줄 테니까요."

"그리고 그 둘 말고 딸려온 환관들도 저마다 거래하려고 들고 온 물품들이 있을 게야. 그런데 사신으로서가 아니라 사신을 수행하러 온 것이니 이들은 조정과 거래하자 할 수가 없지. 아마 조선 상인들과 거래를 할 생각으로 왔을 것이야."

"맞습니다. 저마다 짐을 많이도 가져왔더군요. 그럼 사신들이 머무르는 곳에 상인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래할 장소를 따로 마련하자고 조정에 건의할까요?"

최만리의 말에 양녕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반대야. 상인들과 만나지 못하게 틀어막아야 하네."

* * *

며칠 뒤.

사신 숙소.

이번 사신단의 정사로 온 환관 윤봉은 숙소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마당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2층에 앉아 창문을 활짝 열고는 창틀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아직 쌀쌀한 2월의 바깥바람이 들이치는데도 꿈쩍도 않고 있는 그 모습에, 옆에 서 있던 부사 박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추우십니까?"

"괜찮네."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딱히 박실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윤봉과 박실은 며칠간 좋아할 일들이 많았다. 사슴가죽으로 갖신도 한 켤레 만들어 달라고 하고, 은상감한 마구 일습도 아예 자기가 원하는 모양과 구성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당하게 예조판서를 통해 요청했다. 자신이 명나라로 떠나기 전까지 만들어서 주려고 애 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과 윤봉이 가져온 비단이나 명주도 모피로 교역하기로 했다. 조정에서 자신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값을 더 쳐서 주면, 그걸 다시 경사(북경)에 돌아가 팔아 큰 이익을 볼 생각도 할 때마다 흐뭇해졌다. 하지만 계속 언짢은 표정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또 막아서는군요."

윤봉의 옆에 서서 마당 너머 정문을 같이 바라보던 박실이 말했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단이 이 으리으리한 숙소에 짐을 풀고 건물들의 호화로움에 좋아하기가 무섭게, 잡인 출입을 금한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에서 군사들을 시켜 숙소 일대를 철통같이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또 막는구먼. 이번에도 들어오려고 하는 건 상인이겠지."

윤봉의 표정이 한층 더 언짢아졌다. 어차피 같이 따라온 환관들이 거래를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가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윤봉이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연줄을 댄 환관들 주머니를 제대로 불려 주지 못한다면 다른 고위 환관으로 줄을 바꿔 설 위험이 있었다. 가뜩이나 조선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지금 자리까지도 겨우 올라오고 파벌도 힘들게 만든 윤봉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꾸러미를 짊어진 거 보니 상인이 맞나 보군요. 상인까지 잡인으로 취급해서 못 들어오게 막는다니 대체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항의를 한 번 해야겠…… 응?"

윤봉이 말하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뜨고 정문을 보았다. 정문 앞에서 상인이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며 뭐라 하고 있던 문지기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이내 옷을 잘 빼입은 청년 하나가 문지기에게 다가와 뭐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지기를 포섭하려는 걸까요? 그래 봤자 다른 놈들처럼 으름장이나 듣고 발을 돌리겠지요."

"아니. 아닐 걸세. 반대겠지."

언짢던 표정은 어디론가 가고 진지한 얼굴로 정문을 보던 윤봉의 그 말대로, 오히려 문지기가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청년이 턱짓을 하자, 문지기에게 붙잡혀있던 상인이 청년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고는 숙소로 후다닥 들어왔다.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라는 박실에게 윤봉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없으면 상선감의 좌소감 자리까지 어떻게 올랐겠는가? 비록 저 청년이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으나 위아래로 차려입은 옷과 갖신이 질이 좋고 잘 관리된 것이고, 허리춤에 찬 환도 역시 장식은 별로 없지만 칼집의 옻칠에서 광이 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풍겨 나오는 기운이 남달라."

"역시 좌소감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둘이 그런 말을 하는 동안 청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마당으로 들어오고, 뒤를 따라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든 시종으로 보이는 사내도 따라 들어왔다. 좋은 예감이 든 윤봉은 조금 전의 언짢음은 온데간데없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박실에게 말했다.

"뭐 하는가? 빨리 아래층에 자리를 마련하게. 저리 당당히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나를 만나러 온 것 아니겠는가."

* * *

건물 1층의 가장 큰 방에서 윤봉이 잠시 기다리자, 안내를 받은 양녕이 시종을 대동하고 들어와 인사했다.

"양녕대군이라 합니다. 공께 문안인사 드리러 이렇게 뒤늦게나마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소개를 듣자마자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윤봉이 마주 인사하며 말했다.

"이번에 사신으로 온 상선감 좌소감 윤봉이라 합니다. 양녕대군이시면 주상 전하의 형제분이 아니십니까. 귀하신 분께서 직접 찾아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자신이 폐세자된 다음 이도가 세자가 되어 즉위하고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오는 것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윤봉의 모습에 양녕이 속으로 비웃었다.

'역시 자기한테 도움이 될 만한 건 잘 파악하는 인간인가보군.'

"그런데 대군께서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발걸음을 옮겨주셨습니까?"

"멀리 상국에서 오신 손님을 번국의 왕자가 뵈러 오는데 어찌 이유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아, 일단 앉으시지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윤봉과 양녕이 마주앉고, 각자 뒤에 박실과 시종이 서서 자리를 잡자 양녕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들은 것이 있어서 와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지기가 너무 과하게 숙소를 지키고 있어서 제가 잘 말해 두었습니다. 조정에도 말씀드려서 앞으로는 이렇게 머무시는 동안 답답하게 출입을 틀어막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멀리서 귀한 물건들을 가져오셨는데 방에서 묵히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사로이 가져온 물건을 못 팔고 있다기에 자기가 도와주러 왔다는 말을 절묘하게 돌려 말하는 양녕의 말에 윤봉이 오히려 약간 당황한 듯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이런 걸 좀 가져와봤습니다."

양녕의 말에 시종이 탁자에 비단 보자기로 싸인 작은 꾸러미를 내려놓고 물러서더니,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아예 건물을 나가버렸다.

잠시 무슨 상황인가 생각하던 윤봉이 슬쩍 눈짓하자 박실도 옆방에서 기다리겠다며 방을 나가고, 양녕과 윤봉만 남게 되었다.

"바로 열어 보시지요."

양녕의 말에 윤봉은 꾸러미를 자기 앞으로 가져와 조심스럽게 풀었다. 비단 보자기 안에서 작은 상자가 나오자 금은이라도 들어있나 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열어본 윤봉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칠고 누런 구슬처럼 생긴 덩어리들이었다.

"이게…… 뭡니까?"

금은이 아니라 실망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뭔지 모르겠어서 당황한 윤봉의 그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설탕으로 만든 과자입니다. 온갖 약재를 넣어서 만들었지요."

금은도 옥도 아니고 과자 선물이니 실망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대군이 직접 가져와서 주변 사람까지 물리고 준 과자라는 점에 흥미가 동한 윤봉이 물었다.

"하나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법 단단하니 조심하십시오."

윤봉이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크기는 껍질을 벗긴 여지만하고, 단단하기는 정말로 돌 같은 그 과자를 잠시 살펴보던 윤봉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적막 속에서 윤봉 입안의 과자가 달그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만 나기를 잠시, 윤봉이 눈을 크게 뜨더니 머뭇거렸다.

"괜찮습니다. 급하게 드시지 않아도 되고, 말씀하는 걸 꺼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양녕의 말에 윤봉이 살짝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향도 좋고 맛도 특이합니다. 이런 진미는 명나라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윤봉의 반응에 양녕이 흐뭇하게 웃었다.

'당연히 진미겠지. 지금 당장 지구 반대편으로 가더라도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이니까 말이야. 그래, 조선의 별사탕 맛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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