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10화
110화
1424년 12월 초순 모일.
한성부. 예조 영사도감.
12월의 냉기를 막기 위해 마룻바닥에는 융단을 여러 장 깔고, 벽마다 병풍을 두른 가운데, 양녕은 영사도감 관원들과 모여 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갑옷하고 도검은 있는 것을 쓰신다 하셔서 수량과 종류만 파악해 두었습니다. 칠기는 오우치 가문에서 보낸 게 얼마 전 도착했습니다. 수량을 점검하던 호조 관원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호사스러운 것은 쓰기조차 꺼려진다고 하더군요."
최만리의 보고를 듣던 양녕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궁에서는 통째로 금이나 은으로 만든 접시도 쓰는데, 옻칠하고 금가루 뿌린 접시를 보고 호사스럽다 한단 말인가. 하긴 금가루로 교묘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으니 그리 느낄 만도 하군. 다른 반응은 없던가?"
"대군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궁에서 쓰는 물건인데 이 정도 꾸밈은 있어도 괜찮은 것이고, 오히려 이것은 금이 많이 쓰인 것이 아니면서도 풍격이 있으니 이런 칠기로 기물들을 대체해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호사스럽다는 쪽이나, 대체하자는 쪽이나 공통적으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장인을 조선에 데려올 수 없을까 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조선은 투박하거나 소박한 것만 미의식으로 여겼던 나라가 아니었고, 특히나 조선 초기인 지금은 고려의 귀족적 문화와 예술 풍조가 짙게 남아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 쪽물 들인 종이에 금가루로 대나무 그린 병풍도 궁에서 쓰이는데 옻칠하고 금가루 뿌린 걸 못 쓸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어려울 걸세. 아마 이번 칠기 판매로 오우치 가문도 제법 이득을 보았을 것인데, 우리가 장인을 들여와 직접 만들어 버리면 또 팔 기회가 줄어들지 않겠나. 아마 방해하지는 않더라도 미적지근하게 굴걸세."
"장인도 오우치 가문을 통하지 않으면 구할 방법도 없긴 하지요. 그나마 칠주도에 왜인 출신 칠장들이 있긴 하지만, 왜경(교토)의 장인들만큼 정밀하지는 않으니 지금처럼 사오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차피 수요도 그리 많지 않으니 괜찮아. 얘기가 잠시 샜군. 다른 것들은 어떤가?"
"모피도 들어오는 대로 쌓아 놓고 있습니다. 여진족들도 농사가 끝난 데다가 추워지는 시기다 보니 사냥을 많이 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모피를 팔고 받아 간 면포를 몽골에 파는 게 쏠쏠했는지는 몰라도 교역소에 가져오는 모피가 상당히 많다 합니다."
"갑옷, 도검, 칠기, 모피 다 순조롭군. 해동청은 어떤가?"
"해동청도 들여오는 대로 응방(매 관리 관청)으로 보내 관리하고 있습니다. 응사들 말하길, 이전에 전국에서 공납으로 들여오던 해동청들보다 월등히 빼어난 놈들이라 합니다."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매사냥과 거리가 있는 백성들이, 그것도 공납으로 내야 한다 하니 생업에 지친 몸으로 잡으러 나섰을 백성들한테도 잡혀올 정도면 그 해동청들이 제대로 된 놈들이었을 리가 없지. 어디 상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을걸세."
"다음은 사냥개들입니다. 여진족들이 해동청은 많이 보냈지만, 사냥개들은 아직까지 세 마리 보낸 게 고작입니다."
"해동청만큼이나 사냥개들도 빼어난 놈들이면 문제 없지 않겠나?"
"그게…… 명견이라고 하기에는 발 빠른 것이나 눈 밝은 것에서 조금 모자란 면이 있습니다. 그저 참을성이 있고, 사람을 잘 따르는 것은 우수합니다."
"그거면 되었네. 아니 오히려 그런 게 낫네. 차라리 사냥은 좀 못하더라도 말을 잘 듣고 재롱도 부릴 줄 아는 녀석이 좋아."
양녕의 말에 몇몇 관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최만리가 대신하듯 물었다.
"선물로 줄 것인데 사냥에 모자란 놈을 주면 뭐라 하지 않겠습니까?"
"환관이 뭘 그리 사냥을 많이 나가겠나. 그저 귀한 것이니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경사(북경)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환관이니 어쩌면 사냥에 한 번도 데리고 나가지 않을 수도 있어. 혹 데리고 사냥을 나간다 쳐도 해동청도 같이 쓸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갈 것인데 개한테만 의지하겠는가? 오히려 재롱을 잘 부리는 녀석이라 마음에 애착이 생긴다면 사냥하는 게 조금 모자라더라도 그저 예쁘다 여기겠지."
잠시 말을 끊은 양녕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언제 우리가 모은 것들을 선물로 준다 말한 적 있는가?"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설탕이야 대군께서 다른 쓰임이 있다 하셨고, 모피야 교역에 쓴다 하셨지만 다른 것들은 사신에게 주려고 모은 것 아닙니까?"
최만리의 반응에 장난기가 동한 양녕이 한 번 더 말을 꼬아서 던졌다.
"줄 것은 맞네. 하지만 전부 다 선물로 줄 것은 아니야."
"주는 데 선물이 아니라니요? 대체……."
"빼앗겨 줄 것들이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빼앗아 가게끔 조장해서 줄 것이네."
최만리는 물론이고 영사도감에 있던 관원들이 다들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인지 통 감을 잡지 못하는 관원들을 보고, 양녕은 장난을 멈추고 설명을 시작했다.
"사신으로 오는 환관들이 왜 하나같이 횡포를 부린다 생각하나?"
"그야 탐내는 물건들이 있어서 탐욕을 부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양녕은 고개를 살짝 젓고 말했다.
"사신으로 온 것이니 결국 명나라 황제의 대리로 온 것이야.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탐욕을 부렸다는 것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역으로 위신을 실추시켰다 하여 벌을 받을 수도 있지. 차라리 자기 기반이 확실하게 있고, 편을 들어줄 다른 환관들도 있는 명나라 경사에서 탐욕을 부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네. 오히려 정밀하고 교묘한 기물들은 명나라에서 많이 나지 않는가."
"그래도 해동청이나 모피는 조선의 특산물이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조선의 특산품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쌓은 부가 없는 놈들도 아니니 제 값 치르고 사도 되는 것이고, 제 값 치르고 사 가려 한다면 조정에서도 어련히 괜찮다며 선물로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억지로 달라고 하면 반감만 살 뿐이네."
"그럼 왜 패악질을 부리고 탐욕을 내는 것입니까?"
"패악질을 위한 패악질이기 때문이지. 남 위에 서서 남에게 강요하고, 남이 싫어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괴롭히고 싶다는 저열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네."
말을 하며 점차 싸늘해진 양녕의 표정에 긴장한 최만리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정말입니까?"
"나라고 놈들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니 단언은 못하네. 하지만 지금까지 사신으로 온 환관들이 한 짓들을 생각해 보면 전부 들어맞지 않는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환관들이 왜 그리도 패악질을 부리는 겁니까? 조선의 환관들은 얌전하지 않습니까."
"조선의 환관들은 그 권한 자체도 적긴 하지만, 결혼도 하게 하고, 피는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양자를 들여 가족을 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는가. 자연스레 책임감도 생기고 애착하는 대상도 있고 보살펴야 할 것도 있으니 그런 것이지."
"그걸 좋게 여기지 않는 선비들도 제법 있는 모양이긴 합니다. 명나라는 환관의 결혼을 금했으니 우리도 그러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차이라고 보시는 모양입니다."
"그렇네. 그런 소리를 하는 자들은 명나라 환관들이 어떤지를 모르는 게야.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설령 큰일이 있더라도 자기 하나 죽을 뿐 남겨지거나 잃을 가족도 없네. 애착을 쏟을 곳이 없으니 그 기력을 권력과 재산을 탐하는 데에 쏟게 되고,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으니 제 한 몸에 들이는 사치만이 낙일 뿐이지."
일리가 있다 생각한 최만리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사람이 비뚤어질 만도 하군요."
"그렇게 권력과 재산에 취한 이들에게 명나라 황제라는 거대한 뒷배까지 두고 출신지인 조선에 온 것이네. 한때는 자신을 환관으로 명나라에 보냈던 조선에 돌아왔더니, 황제를 대신해서 온 것이라 맞절이나마 임금의 절을 받을 수도 있고, 그 누구도 고자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지. 패악질을 마음껏 부리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심지어 황제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서 황제에게 말 몇 마디 하는 것만으로 조선에 피해를 줄 수도 있네."
드디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한 최만리가 말했다.
"어차피 패악질을 부릴 놈들이니, 패악질을 부리고자 하는 그 추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어서 얻어낼 걷은 얻어내되 빼앗길, 정확히는 빼앗기는 것처럼 할 물건들은 모두 조정에서 미리 준비해서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려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그게 이번 영사도감의 진짜 목적이네. 잘못해서 사신 귀에 들어가는 순간 역효과가 날 일이라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것이니 자네들도 입단속 잘해 주게."
"물론입니다. 그런데 방법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알아서 사신에게 빼앗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계획에 심혈을 기울여야지. 사신이 우리 마음대로 움직일 리가 없으니 항상 상황을 지켜보면서 계획을 계속 손보아 가면서 진행해야 하네."
"쉽지 않겠군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어차피 사신의 동선은 뻔해. 국경을 넘어와 의주에서 평양을 지나 한성까지 오면, 그 뒤로는 한성 근처에서 돌아다닐 테니 그리 멀리 가지도 않을 것이야."
"간다고 해도 전날 미리 내일은 어디 갈 테니 알아서 준비를 다 해놓으라는 투로 나오겠지요?"
"그렇네. 오히려 그 거만함이 도움이 되는 셈이지. 그러니 촉박하긴 하지만 대비하지 못할 것도 없네."
"그럼 이동 경로나 동선은 얼추 나왔다고 치고, 세부적으로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어떻게 할지도 중요하지만 누가 할 지도 중요하네. 일반 백성들을 시키기에는 제대로 사신을 속이지 못해 들킬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게 어떻게 중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아예 사전에 계획이 다 새어 나가 버릴 위험도 있네."
"듣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럼 누구를 쓰시려 하십니까?"
"사당패와 남사당패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이들을 가려서 뽑게. 쓰는 말씨가 다르면 들킬 테니, 오는 길에 사신이 머무를 고을들 근처와, 한성부와 경기 일대에서 각각 구해야 할 것이야."
"사당패들을 쓰신단 말씀이십니까? 사당패들이라고 해서 비밀을 잘 지킨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눈이 휘둥그레져 물어보는 최만리에게 양녕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라고 입이 특별히 무겁지는 않겠지. 하지만 사신을 속이는 재주는 관원들이나 일반 백성들보다 뛰어나지 않겠는가. 입단속은 엄포를 놓건 당부를 해서건 잘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속이는 일은 더 중요한 데다가 엄포나 당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야."
최만리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만들어 놓고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주변 관원들도 최만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네. 명나라 황제를 등에 업고 패악질 부리러 오는 환관 놈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한 광대놀음을 한번 해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