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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9화 (10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9화

109화

"조선제 도검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모리하루는 조선제 도검 다발을 가리켰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렇소. 도자기나 무명은 일본에서 나지 않으니 사 올 수밖에 없고, 비단이나 베는 일본에서도 나긴 하지만 명나라 것이 질이 좋고 화려해 선호되는 것이니 이해할 수 있소. 그런데 칼은 오히려 일본의 칼이 조선이나 명나라에도 이름날 정도인데, 아무리 조선 칼이 좋다고는 하지만 쿠보께서 너무 많이 구하시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오."

"걱정까지 하실 거야 있겠습니까?"

"무기를 구하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만, 지금 조선에게 군사력으로 큐슈를 빼앗긴 상황이지 않소. 이런 상황에 조선 무기를 팔아주다 보면 말이 나올 수도 있고, 칼을 살 돈으로 다른 사치품을 사면 더 많은 개수를 살 수도 있지 않겠소?"

이미 진작에 양녕과 계획하고 조선제 도검을 일본에 팔 계획이던 모리하루였으니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자리를 비운 동안 미야코의 정세가 어떤지, 쇼군이 슈고들 통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치품이나 조선제 도검이 잘 팔릴 것 같은지 등등을 수상하게 캐묻지 않고도 한꺼번에 알아내기 위한 질문일 뿐이었다.

그 질문을 들은 교역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쿠보께서 주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귀한 것들을 슈고나 귀족들에게 선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조선제 도검들도 무기로 산다기보다는 사치품으로 사들이시는 겁니다."

조선제 도검이 무기보다도 사치품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모리하루가 물었다.

"사치품이라니. 이전의 칼들에 비해서 실전적일지는 몰라도 호사스러운 장식은 하나도 없는 이 칼들이 말이오?"

"일본 전국을 찾아봐도 이만한 명검이 없는데, 무사들에게는 좋은 무기가 곧 사치품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화려한 장식이 없고 소박하니, 밀교의 장엄한 의식을 선호하는 귀족들이라면 몰라도, 선종의 좌선과 명상을 선호하는 무사들 사이에서는 지극히 취향에 맞는 물건입니다."

"일리가 있소. 하긴 요즘 정세도 어지러운 듯하니 평소에 차고 다니다가 비상시에 뽑아 쓰기 좋고 실전적인 도검을 선호하는 것도 있겠소."

"예. 도보시에 쓰기에는 기존 일본의 도검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오죽 평이 좋은지 요즘에는 미야코에서 조선제 도검을 가리켜 흔히들 계림도라 부릅니다."

일본어로 가락국을 칭하던 카라라는 단어가 삼한은 물론이고 당나라까지 가리키는 외국에 대한 일반명사처럼 그 뜻이 확대될 정도고,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킬 때 왜국에서는 원군까지 보내어 막으려고 애썼을 정도로 일본과 가야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무리 계림이라는 말이 신라만을 가리키던 말에서 후에는 삼한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로 그 가락국의 땅이었던 김해에서 생산된 칼을 계림도라고 한다는 말에 모리하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계림도라. 절묘한 이름이군."

모리하루의 쓴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교역관은 모리하루가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어갔다.

"스사노오노미코토께서는 미야코의 수호신이실 뿐만 아니라 무예의 신이자 신라에서 오신 신령이시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토츠카노츠루기나 아마노하바키리, 쿠사나기노츠루기 같은 명검도 여럿 쓰셨지요. 그런 인식들이 섞여서 그리 불리는 것 같습니다."

계림도, 즉 조선제 도검의 침투가 예상 이상으로 잘 되고 있음을 확인한 모리하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재밌는 일이구려. 그나저나 그래서 무사들이 계림도를 선호하는 얘기를 마저 듣고 싶소."

"이런, 이야기가 옆으로 샜었군요. 차설하고, 사실 위신에 크게 타격을 받으신 쿠보나, 키쿠치와 오토모 가문처럼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잃은 이들이야 조선이 여전히 꺼려지겠지만, 다른 슈고와 호족들에게는 남의 일 아닙니까."

"씁쓸하지만 그럴 것이오."

"그러면 이 칼을 만든 조선이 적이었음을 별 신경 안 쓰는 이들은 당연히 망설임도 없이 이 명검을 가지고자 할 것이고, 신경 쓰는 이들이라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적이었던 조선 무기를 팔아 준다며 군소리를 했다가는 정작 자기가 얻더라도 차고 다닐 명분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래서 딱히 뭐라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심지어 조선군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키쿠치나 오토모 가문에 속한 이들조차 적의 좋은 무기가 있다면 취해서 쓰는 것이 마땅하다며 구해서 차고 다니는 판국입니다. 이렇게 무사라면 다들 탐을 내는 물건이니, 쿠보께서도 설령 조선 것을 팔아 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사서 선물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참으로 묘한 일이오. 그나저나 내가 부탁했던 것들은 어찌 되었소?"

"물론 가져왔습니다. 장인들이 만들어 뒀던 것을 사온 것이라 토노께서 요청하셨던 조건과 딱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보러 가시지요."

모리하루가 교역관을 따라간 곳에는 각종 칠기가 쌓여 있었다. 검은색 혹은 붉은색 칠을 먼지 하나 섞이지 않게 목기에 칠하고, 그 위에 금가루를 뿌려 옻칠로 고정해 만드는, 마키에라 불리는 기법으로 만든 칠기들이었다.

이 마키에 칠기가 바로 양녕이 영사도감에서 최만리에게 써서 보여 준 항목들 중 칠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종류와 개수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소. 아주 고맙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마키에 칠기가 종류별로 이렇게나 많이 필요하시다니, 조만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접시와 그릇, 쟁반은 물론이고 서류함에 옷 담는 상자까지 종류별로 있는 마키에 칠기들과 교역관을 번갈아 보던 모리하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리 놓고 보니 꼭 혼례 치르는 자식한테 딸려 보낼 물건들 같긴 하오. 하지만 혼례 예정도 한동안은 없을뿐더러, 어떻게 마키에 칠기만으로 살림살이를 다 채우겠소. 이것들은 히라도(평호도)의 교역소에 가서 팔 것이오."

조선이 일본의 칠기를 많이 사 갔다는 소식이 명나라 상인들을 통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간다고 딱히 이로운 게 없을뿐더러, 애초에 양녕이 요청한 것이니 평호도를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조선의 갈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오우치 가문이 조선과 직거래한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되니 평호도를 거치는 것처럼 말했을 뿐이었다.

"아, 제가 괜한 지레짐작을 했군요. 명나라나 조선에서 이런 걸 좋아하나 봅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만지던 교역관에게 모리하루가 말했다.

"중국은 옻칠을 두껍게 올리고 옻 층을 세밀하게 조각하는 퇴주가 유명하고 삼한의 옻칠은 전복 껍데기를 얇고 작게 만들어 치밀하게 붙이는 나전이 유명하다면 일본 제일의 옻칠은 금가루로 꾸미는 마키에가 아니겠소. 좋아할 만하지. 뭐, 사실 나도 교역소에 가 본 적은 없어서 상인들에게 전해들은 것뿐이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여전히 삼엄하게 지키는 모양입니다. 그럼 그것도 아직 걸려 있습니까?"

모리하루가 교역소에 가지 않는 것은 밀무역자로 오인받아 공격받을까봐가 아니라 조정의 반대파들에게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이렇게 '평호도 교역소에는 오우치 가문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소문을 미야코에 퍼뜨릴 기회가 제 발로 와준다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밀무역하러 들어가려다 붙잡혀 참수당한 자들 머리 말이오? 물론이오. 일본에서 히라도로 가는 해로인 간몬 해협의 조선 쪽 해안인 모지 해안에다 아주 잘 보이게 장대에 높이 걸어 놓고 있소. 경고로 걸어 둔 그걸 보고서도 가려는 놈들이 끊이질 않는지 항상 몇 개씩은 걸려 있더이다."

"어지간한 놈들입니다. 숫자 제한이 있다지만 오우치 가문 상인들은 조선에서 히라도 교역소에 들여보내 주고, 거기서 교역해 온 물건을 토노께서 다시 스오 지역의 교역소에서 팔아 전국으로 넘기시는 덕분에 지금 온갖 비단이며 도자기며 하는 것을 값이 치솟지 않고 있는 것 아닙니까."

"뭐 그런 셈이오."

"게다가 그렇게 어렵게 구해 오시면서도 딱 운송비나 항구 유지비 정도로만 더 받으신다 알고 있는데, 그런 놈들 때문에 토노께서 곤란을 겪으시거나 조선이 교역량을 줄여버려 물건값이 치솟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조선이 명과 일본 사이를 아예 가로막기 위해 칠주도 일대를 철저히 봉쇄한 덕에 다른 상인들은 외국과의 교역이 아예 막혀 버렸다. 사실상 무역을 독점한 상황이었지만, 오우치 가문은 자비를 들여 지은 항구에서 히라도나 조선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일본 상인들에게 팔면서도 포목이나 비단처럼 이전에도 일본에 들어와 팔리던 물건이라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사실은 조선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불식시키고 쇼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신뢰도 얻으려는 목적이 먼저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 이윤이 적지는 않지. 조선에서 생산이 늘어서 포목이나 비단을 싸게 들여올 수 있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이전 값을 유지해 벌이가 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거다.'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마땅한 일이라지만 실천하고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도와 쿠보는 물론이고, 다른 슈고와 호족들도 토노께서 그리하시는 것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면전에서 하는 칭찬이니만큼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적어도 미야코의 여론이 충분히 자신 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생각한 모리하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들 그리 여겨 주신다니 고마운 일이오. 사실 고민스러운 건 교역 말고 다른 데에 있긴 하오."

"무엇입니까?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돌아가는 대로 쿠보께 건의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오우치 가문에서 큐슈에 가지고 있던 부젠 전 지역과 치쿠젠 일부를 조선에 빼앗기고 벌써 몇 년이 지났소. 그런데 거기가 농사짓기 좋은 평야 지대 아니었소이까."

"그렇지요. 그래서 이전 오우치 가문 가독께서도 계속 확보하려 애쓰셨던 땅이었지요."

"뭐 잃었던 당시에는 쿠보께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역시 평야를 잃으니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졌소. 지금이야 어찌어찌 교역해서 번 돈으로 큐슈의 미곡을 조선에게서 사들이기도 하면서 버티고 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지 않소."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교역관이 말했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이들에게 군량을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 쿠보께 말씀드려서 식량을 공급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모리하루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미야코에 여기까지는 뱃길도 멀고, 해류도 격하고, 중간에 섬도 많이 위험하지 않소. 식량을 많이 나르기에는 부적합하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모리하루가 최대한 야심을 숨긴, 그렇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우치 영지의 동쪽. 한때는 우리 것이었던 야마나 가문 영지를 되찾으면 나아질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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