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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8화 (10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8화

108화

"나라에서 매사냥을 제한하는 것은 맞으나 매사냥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아니오. 오히려 사냥하는 이가 많으니 관리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런데 매가 소나 말처럼 매어 두고 키울 수 있는 짐승이 아닌지라, 필요로 하는 양을 다 충당할 수 없어서 여진족들을 통해서도 구하고자 하는 것이오."

양녕은 사신 대접에 필요한 것이라고 그대로 말해 버린다면 먼터무가 값을 높게 부르거나 할 수 있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정작 그는 다른 것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왕자께서 구하러 오신단 말이오?"

"나라에서 직접 들여와서 민간에 파는 것보다 더 관리가 잘되는 방법이 어디 있겠소."

태연한 양녕의 말에 먼터무는 그제서야 미심쩍음을 거두고 말했다.

"뭐 숑코로 구하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오. 적어도 농사만 짓는 조선 백성들이 잡겠다고 다니는 것보다야 우리가 잡으러 다니는 게 훨씬 나을 것이고. 그런데 값은 잘 쳐줄 거요?"

"물론이오. 소금으로 두둑이 쳐 주겠소. 아니면 면포로 값을 치러 줄 수도 있소."

양녕의 말에 먼터무의 눈이 빛났다. 슬슬 추워지는 지금 계절에 면포는 여진족에게나 몽골인들에게나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특히나 몽골인들은 겨울마다 조드라 불리는 자연재해에 가까운 한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사는데, 이번에는 명나라의 견제까지 겹쳐 제대로 면포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더욱 필요로 할 것이었다.

"좋소. 그럼 기왕이면 다 면포로 주시오. 말이나 소는 소금이 필수품이지만 우리가 말이나 소는 아니니, 슬슬 추워지면 옷도 좀 지어 입고 그래야지 않겠소."

뻔히 보이는데도 굳이 몽골에 팔 것임을 숨기고 말하는 먼터무를 보고 슬쩍 미소지은 양녕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송골매 값은 면포로 치르기로 하고, 사고자 하는 게 더 있소."

"무엇이오?"

"모피를 구하고자 하오. 담비, 족제비, 여우 등 종류는 상관없소."

먼터무는 정말로 의아한 듯 양녕에게 물었다.

"모피는 또 왜 필요로 하시오? 조선은 따뜻한 나라 아니었소? 교역으로 우리한테서 사가야 할 만큼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보다 농사짓기 좀 낫다 뿐이지, 도성이 있는 근처만 되어도 겨울이 되면 큰 강이 얼어붙어 걸어서 넘어 다닐 수 있을 정도요."

"그 정도요? 그럼 뭐 두만강하고 다를 것도 없군."

"그리고 모피가 많이 필요해서 구한다기보다는, 매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백성들이 짐승 사냥에 능하지 못하니, 차라리 잘하는 농사를 열심히 지어 만든 면포나 곡식으로 여진족에게서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러오."

먼터무는 벌써 모피를 구해와 팔 마음을 먹은 듯 말했다.

"모피면 매처럼 고기 먹여 가며 살리고 병 안 들게 잘 관리해서 팔러 올 필요 없이 그냥 적당히 말안장에 쌓아서 가져오면 되니 편하기는 더 편하겠군. 알겠소. 대신 그럼 모피값도 면포로 받을 수 있겠소?"

"물론이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소. 이건 혹시라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해 주시오."

"또? 뭐길래 그리 말하시오?"

"좋은 사냥개를 구해 주시오."

"사냥개는 좀 애매한데. 우리가 개를 키우면 가축이나 집 잘 지키는 놈을 키우지 사냥개를 많이 키우지는 않소. 게다가 개라는 짐승이 원래 그렇듯 사람 손에 길들면 주인을 벗어나려 하지 않지 않소. 새끼 때 데려가 키우면 괜찮겠지만 그때는 이게 좋은 사냥개로 클지 확신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어려움은 알고 있소. 그래서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달라는 것이오. 매하고 모피는 물론이고 사냥개도 구해 오는 대로 값은 잘 쳐주겠소."

"알겠소. 그럼 매하고 모피를 우선으로 하고, 사냥개는 구해지면 구해오겠소. 그럼 이만 난 교역 담당자 만나러 가봐야겠소. 오늘도 원래는 교역 때문에 온 것이었으니 말이오."

"알겠소. 그럼 잘 가보시오."

먼터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최만리가 양녕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대군께서 제시하신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군요. 전 좀 더 까다롭게 굴 줄 알았습니다."

"지금 조선에서 소금을 받아 다른 여진족들에게 팔고 말을 구해 오면서, 꼭 조선의 말 심부름을 하는 것처럼 되어 위신이 떨어지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그런데 값을 면포로 받는다면 몽골인들에게 비싸게 팔 수 있네."

"소금은 몽골인들이 잘 안 사갑니까?"

"몽골 산간에는 바위처럼 굳어진 돌소금이 나는 곳이 많아 자족할 수 있네. 오히려 습기와 고운 흙이 섞인 조선 소금보다도 좋지. 하지만 면포는 아니야. 겨울은 오는데 당장 명나라를 통해서 구할 수가 없지 않은가. 몽골도 상황이 급하니 이전의 원한이 있다고 한들 면포 거래처인 오돌리 부족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럼 직접 가서 거래하면 다른 여진족을 끼고 거래하는 것보다 이문도 많이 남겠지."

"원래라면 시큰둥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마음에 들지 않는 거래를 원치 않게 계속해 왔던 탓에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거래는 흔쾌히 받게 된 것이군요."

"그렇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조선에 길들여지겠지."

"그리고 칠주도 왜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삼한인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딱히 갈 곳은 없네. 칠주도 쪽에서 구해야 하는 것들은 거기로 보낸 다른 관원들이 알아서 잘들 하고 있을 게야. 나는 여기 온 김에 좀 살펴보고 돌아가고자 하는 것들이 있으니, 그게 끝나면 바로 한성부로 돌아갑세나."

"알겠습니다. 여기서 다른 일 하시다가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지 시켜주십시오. 북방 일은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 타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러 갔다는 소식에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최만리를 보고 양녕이 피식 웃었다.

* * *

1424년 10월 초순 모일.

스오노쿠니. 오우치 저택.

장지문 밖으로 잘 꾸며놓은 정원의 연못에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차를 마시던 사내가 찻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토노를 뵙기가 점점 어려워지는군요. 이전에는 미야코에서 골목 한두 개만 지나가면 뵐 수 있었는데, 이제는 교역관 일로 스오 지역에 올 때만 뵐 수 있으니 말입니다."

쇼군이 보낸 교역관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오우치 가문 전대 가독, 오우치 모리하루도 다 마신 찻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아쉽지만 어쩔 도리 있겠소. 조선이 날이 갈수록 큐슈를 확고하게 지배해 가고 있으니, 오우치 가문 영지일 뿐만 아니라 일본이 조선과 마주한 최일선 국경인 여기를 방어하는 것도 날로 중요해지고 있소. 내가 와서 살펴보아야 마음이 놓이오."

"그래도 이제 가독 자리도 조카분께 넘겨드렸으니 조금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쿠보께서 승계를 흔쾌히 허락하신 데에는 토노께서 가독 자리에서 내려오시면 좀 더 여유롭게 미야코에 계실 수 있지 않을까 하시는 마음도 있으셨을 겁니다."

5년여 전 미야코에서 약속했던 대로, 모리하루는 형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문 가독 자리를 넘겨주었다.

"아직 가독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요. 내가 옆에서 가르치고 확인해야 할 것도 많고, 상황이 상황이니 조선을 잘 알고 협상도 해보았던 나까지 여기 와 있는 것이 혼자 두는 것보다 낫소. 지금만 해도 그 아이가 워낙 바쁘게 여기저기 다니느라 내가 공을 영접하고 있지 않소."

교역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리하루의 얘기는 그저 적당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이전에는 내가, 지금은 모치요가 조선의 봉신인 계응후이고 이 영지는 조선의 제후국인 계응국이다. 조선과의 국경 방어가 문제될 리가 없지. 그저 대군께서 말씀하신 것도 있고, 내가 보기에도 미야코가 갈수록 어수선해져서 언제 난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미리부터 미야코에 있는 시간을 줄여 갈 핑계일 뿐인데, 잘 속아 주니 다행이군.'

"하긴 조선이 엄청 위협적이긴 한가 봅니다. 토노께서 여기 요시키 지역에 어마어마하게 큰 성벽을 두르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교역관의 말대로 오우치 가문의 영지 통치의 중심지인 이곳 요시키 지역 일대에는 원래 성벽이 없었다. 모리하루의 형이자 모치요의 부친인 히로요가 미야코(교토)를 본따 만든 탓에 당연히 미야코처럼 성벽도 없었는데, 최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견고한 석조 성벽으로 요시키 지역을 통째로 둘러친 것이다.

"산중에 있다고는 하지만 최전방인 오우치 가문 영지의 중심부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만반의 방어준비를 한 것이지. 공께서도 조선군이 얼마나 공성전에 능한지 잘 아시지 않소."

"익히 들어서 알지요. 큐슈의 각 슈고들의 거점은 하나같이 요충지이자 천혜의 요새에 지어져 있었는데, 조선군이 함락시키지 못한 게 없었으니까요."

교역관은 이번에도 납득했으나, 역시나 모리하루가 미야코를 떠나 있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핑계에 불과했다. 차라리 영지를 맞댄 숙적인 야마나 가문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오우치 가문이 조선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을 이유는 없었다.

오우치 가문이 이 성벽을 쌓게 된 계기는 한성부로 유학 보냈던 호족 자제들이 돌아온 것 때문이었다.

원래도 높게 쌓아 그 위엄이 대단했던 한성부의 토축 성벽을 모두 헐어내고 돌로 새로 쌓아 올렸는데, 그 장엄함이 어마어마해서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지경이니 우리도 그런 것을 하나 지어두면 어떻겠냐며 돌아온 호족 자제들이 하나같이 열변을 토한 것이다.

스스로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유학에서 돌아온 호족 자제들이 그리 먼저 건의해 준 것이니, 모리하루와 모치요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전까지 오우치 가문원들과 호족들이 미카도가 있는 미야코를 권위의 상징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대조선국의 주상전하께서 계신 한성부야말로 진짜 권위의 상징이라 여기게 된 것이겠지.'

그 뒤로 교역관과 미야코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리하루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지난번에 쿠보께서 요청하신 물건들은 준비해 두었소. 이번에는 다행히도 요청하셨던 수량만큼 모두 확보했소이다."

"저번에는 좀 부족하게 들어와서 이제는 구하기 어려우신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정말로 토노께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조선에 요청하면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매번 수량을 다 맞춰서 들여오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일부러 조금 부족하게 구해올 때도 있었다. 교역관의 반응을 보니 그 책략은 잘 먹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고는 무슨. 쿠보께서 요청하신 것이니 다 구해 오는 것이 당연하지. 말이 나온 김에 한번 같이 가서 보는 게 어떻겠소?"

"알겠습니다."

교역관이 모리하루의 안내를 받아서 간 곳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베와 무명, 비단, 도기에 자기까지. 정말 볼 때마다 느끼지만 이런 진귀한 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광경이 엄청납니다. 구하느라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뭐 구하러 오가는 이들이 고생이지 내가 뭐 고생이겠소. 그나저나 정말 저것들까지 이리 많이 구하셔도 되는지 모르겠소."

교역관은 모리하루가 무엇을 말하는지 물어보려다가, 모리하루가 가리킨 긴 꾸러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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