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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6화 (10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6화

106화

"새 황제는 대행황제가 생전에 수시로 원정을 나가 도성이 비면 태자 신분으로 국사를 돌보았습니다. 오히려 정복에 집착했던 대행황제보다도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진 원정으로 명나라 군세가 약해져서 조선에 말을 급히 부탁하고, 기껏 포섭했던 여진족들까지 조선 쪽으로 피난시킬 정도로 폐해가 많았는데 설마 새 황제도 중원 밖으로 나서려 하겠습니까? 북원을 막고 내실을 다지는 데에 집중하려 할 것이니, 이미 이주시킨 여진족은 중요도가 떨어지겠지요."

낙관적인 조말생의 말에 황희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렇다고 명나라가 여진족 영향력을 순순히 내려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진족으로 구성된 건주위와 건주좌위가 그 힘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요동도사를 지키는 방패와 마찬가지입니다. 여진족 영향을 잃었다가 요동이 북원이나 조선 손에 들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명나라가 가장 두려워할 일 아닙니까."

"요동의 여진족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파저강 이남 압록강 이북으로 이미 이주해 온 이만주가 압록강마저 넘어 내려오지 않게 잘 제어하고, 두만강 이남으로 온 먼터무와 무타우타를 포섭하는 정도면 명나라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만주의 훌리가이 부족이 건주위 그 자체인 것처럼 먼터무의 오돌리 부족도 건주좌위 그 자체 아닙니까. 차라리 이만주가 요동에서 멀쩡히 건주위를 통제하고 있었다면 먼터무 정도야 조선에 다시 넘어가는 걸 묵인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만주까지 조선 쪽으로 이주한 지금 상황이면 조선의 여진족 포섭에 오히려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조말생과 황희의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자 이도가 나섰다.

"두 경의 말이 모두 옳지만 이대로는 내일 해가 떠도 결론이 나지 않겠소. 양녕대군은 어찌 생각하시오?"

"신 양녕대군 이제 아뢰옵니다. 지금 명나라는 어지러운 대외 정세 가운데 황제까지 승하해 주변에 신경이 많이 쓰일 테니, 조만간 사신을 보내어 조선 상황을 살피고자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사신을 통해 명나라의 의중을 확인해보고 결정하면 될 것입니다."

조말생과 황희도 명나라의 의중을 확인하고 결정하면 된다는 양녕의 말이 맞다 생각했는지 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정작 양녕은 여전히 고민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원래 역사와 수명이 달라진 이들은 많았다. 대부분은 내가 이끈 정동군이 대마도를 넘어 칠주도까지 정벌하면서 죽은 이들이니 내가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아바마마도 지금 시점에서 원래 역사보다 오래 살고 계시긴 하지만, 내가 크게 관여하지 않고 궁을 떠나있었다 뿐 종기 치료법과 기름 비누 등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지금까지는 내가 무언가 영향을 주어야 원래 역사와 달라지곤 했다. 그런데 영락제가 이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는데…….'

계속 생각에 빠지던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영락제의 사망과 그 뒤 이어진 순장, 여진족 대처 등으로 회의가 열리고 있는 1424년 7월 18일 오늘은 원래 역사에서는 영락제가 사망한 당일이었던 것이다.

'명나라에는 크게 영향을 끼친 것도 없고, 특히나 사람 목숨과 관련될만한 의학이나 건강에 관한 내용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그런데 영락제가 막북에 원정을 갔다가 진중에서 병을 얻어 죽은 것까지는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지만 그 날짜가 더 빨라졌다는 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병사나 사고사로 죽는다면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원래 역사대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고 사는 문제가 그 정도라면 다른 일도 내 간섭 없이도 바뀔 수 있다는 말이지. 특히나 사신으로 누가 올 것인가처럼 황제 한 사람의 마음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양녕과는 다른 고민을 하던 이도도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사신이 올 것은 확실한 것 같소. 그런데 사신은 사람마다 그 성향이 다 다르니, 누가 올지가 문제요. 탐욕에 눈먼 자가 온다면 하등 도움될 것이 없고, 반대로 너무 명나라와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가 온다면 우리가 뭘 알아내거나 얻어낼 게 없지 않소."

"제가 알 것 같습니다."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그 짧고 강한 한 마디에 좌중의 시선이 양녕에게 집중되었다.

"누가 올지 안단 말이오?"

눈이 휘둥그레진 이도의 말에 양녕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예측을 믿으신다면 장차 올 명나라 사신에 대처하는 것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긴장한 얼굴과는 반대로 당당히 말하며 양녕이 속으로 결의를 굳혔다.

'아예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역사를 참고하는 일이라 괜히 걱정될 뿐이지, 애초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던 것은 지금까지도 똑같았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을 한다면 확률을 따져 과감히 행동할 뿐이다.'

"그리 당당히 말한다면 어디 예측을 들어봐야겠군. 누가 올 것이라 예측하시오?"

기회를 잡은 양녕은 천천히 이도에게, 그리고 주변에서 숨죽이고 듣는 중신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행황제는 환관을 황제의 측근으로 중히 삼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지난 중국의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라 하겠는데, 후에는 더 나가서 동창이라 해서 환관들에게 권한을 몰아준 기관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이토록 황제가 신임하는 것이 환관들인데, 다른 이들을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긴 지금까지도 어지간하면 사신으로 온 것은 환관들이었지. 그렇다면 일단 왔던 이들 가운데서 올 거라 생각하시오?"

"예. 그런데 지금은 조선에서도 누가 사신으로 올지 걱정할 정도이니, 당사자인 명나라도 누굴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는 북원을 제대로 이기지 못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기지 못할 상황입니다. 이렇게 힘이 빠져 있다는 것을 조선이 알면 요동을 얻으려 들지도 모른다 생각할 것이고, 요동을 얻으면 명나라를 위협할 것이라 생각할 테니 조선이 지금 상황을 제대로 모르기를 바라겠지요. 그리고 조선이 제대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조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양녕의 설명을 듣던 이도는 드디어 감을 잡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환관 중에서도 황제의 신임을 받아 높은 자리에 있고, 사신으로 와본 적도 있고, 조선 출신이라 조선을 잘 알기까지 하는 적임자가 한 명뿐이구려."

"예. 조선 황주부 서흥 출신의 명나라 환관, 윤봉입니다."

"역시. 명나라가 사신을 보낸다면 그자를 보낼 거라 예측하는 게 이치에 합당할 것이오."

이도가 동의하기는 했으나, 양녕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보험도 들어두기로 했다.

"물론 무조건 윤봉이 사신으로 올 것이라 무조건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윤봉이 올 가능성이 크니 그에 맞춰서 대비해 둔다면, 실제로 윤봉이 왔을 때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만에 하나 다른 자가 오더라도 그 대비한 것을 써서 대접한다면 도움이 되었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겠소. 내가 듣기에는 양녕대군의 예측이 지극히 타당한 것 같아, 아마 내년 초쯤에 올 명나라 사신에 대비하는 일을 맡기고자 하오. 경들은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시오?"

이도가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다들 가만히 있는 가운데 허조가 나섰다.

"사신을 영접하는 것은 나라의 중대사인 탓에 한성부에 도착한 사신을 대접하는 일은 물론이고, 황해도나 평안도까지 나가서 맞이하는 일도 중신과 종친을 가리지 않고 맡으니 양녕대군에게 맡기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물며 양녕대군은 지금 명나라와 여진족에 관한 정세를 일찍이 다 내다보셨던 분이니, 이 일에 다른 적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원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깐깐하고 원칙을 따지는 허조가 괜찮다 할 정도면, 반대할 사람이 정말 없는 것이 맞겠다 생각한 이도가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오늘부로 양녕대군에게 다음번 명나라 사신 영접 대비를 전적으로 맡기겠소. 대군께서는 잘해 주시기 바라오."

"물론입니다, 전하. 그런데 기왕에 명나라 사신을 대비한다면 다른 것을 더 노려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것이라니, 무엇이오?"

"사신을 통해 명나라의 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이 동북방을 되찾을 수 있는 상황인지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기회를 얻은 김에 쭉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양녕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더 나가서 황제의 최측근인 환관이 사신으로 왔다는 점을 잘만 쓴다면, 설령 동북방을 되찾을 상황이 아니더라도 되찾을 상황으로 바꾸거나, 아예 되찾는 것을 명나라에게 승인받거나, 혹은 조공에서 문제 되던 점을 줄이고 더 큰 이익을 얻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다 노린단 말이오?"

열거된 것들에 이도가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부정적이지는 않음을 알아챈 양녕이 다시 여유를 되찾고 당당히 말했다.

"환관들이 사신으로 올 때면 언제나 패악질을 부리고 탐욕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개 환관이라고 해도 황제가 중히 여겨 가까이 두고 말을 듣는 이들인지라, 명에 돌아가서 말 한마디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어서 최대한 받아 주었지요. 그만큼 패악질도 받아 줬고 재물도 주었는데 이제 조선에서 그만큼 얻어 낸다고 문제 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도가 호탕하게 껄껄 웃더니 말했다.

"역시 대마도에서 멈추지 않고 칠주도까지 손에 넣고, 소금 문제에서 멈추지 않고 삼척부 전체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대군답소. 좋소. 내 최대한 지원해줄 테니, 부디 지금까지 사신으로 온 환관들이 받아먹은 만큼 명나라에서 받아내 주시오."

"물론입니다."

다시 한번 활약할 기회를 잡은 양녕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 * *

며칠 뒤.

한성부. 예조.

예조의 남는 건물 한 곳에 의자를 놓고 앉은 양녕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자네와 또 이렇게 일을 같이하게 되니 기쁘군."

"예. 저도 다시 대군께서 하시는 일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양녕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최만리는 그렇게 말하고 이내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혹시 대군께서 하실 일 중에 배에 탈 일도 있습니까?"

"아마 있을 걸세."

그 말에 최만리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양녕이 입을 열었다.

"내 탓은 아니네. 난 그저 일을 도울 영특한 관리들을 좀 보내 달라고 주상께 주청했을 뿐이야. 설마 정6품 관원인 집현전 수찬을 보내실 줄은 몰랐지. 주상께서 영특한 관리라고 하면 자네를 바로 떠올리신다는 소리니 기쁘게 생각하게나. 배 탈 때가 되면 생강도 충분히 준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양녕의 영향으로 이학방법론 등이 조선에 퍼지며 원래 역사와 그 성격이 달라진 집현전은 경전 연구 및 자문 기관이 아니라 전반적인 학술 연구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니, 사신 영접하는 일에 집현전 관원이 보내진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대군하고 저 둘만 이 영사도감에서 일하는 겁니까?"

지금 양녕과 최만리만 앉아있는 이 빈 건물이 사신을 영접한다 해서 영사도감이라 이름 붙은 임시기관의 관청이었다.

"다른 관리들도 선발되는 대로 보내 주신다 했네. 아무리 1년짜리 임시라고는 하나 명색이 관청인데, 자네하고 나 둘이서만 있겠나?"

다른 관리들이 있으면 자신이 배를 탈 확률도 줄어들겠다 생각한 최만리가 조금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아예 관청까지 만들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주상께서도 이 일을 중히 여기고, 또 나를 믿으신다는 것이겠지. 나도 그 어심에 보답하고자 하니 자네가 날 좀 잘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요?"

최만리의 질문에 양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조에서 안 쓰는 건물 한 채를 빌린 것이라 아직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꼴이 이렇고 일할 사람도 나하고 자네뿐이 없으니, 오늘은 우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잡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양녕은 바닥에서 종이 하나를 집어 탁자 위에 펼치고, 휴대하고 다니던 먹물 통과 깃털 붓을 꺼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양녕이 종이 위에 써 내려 가는 글자들을 보던 최만리가 당황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건 사신 접대에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차라리 사냥에 필요한 물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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