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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5화 (10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5화

105화

"섬인 제주도를 초원에 살던 몽골인들마저 중요히 여기고 목장으로 삼은 것은 기후가 따뜻하고 초지가 많고, 산은 있어도 범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이제 그 조건에 맞고 더 큰 땅을 얻었습니다. 다 형님 덕분입니다."

이도의 말에 이방원도 거들었다.

"그래. 칠주도는 남부에서는 설탕까지 자랄 만큼 따뜻하고, 포전부 아소산 일대에 너른 초지가 있고, 본토에서 먼 섬이 다 그러하듯 범도 없지. 게다가 이미 몽골이 지배한 적이 있어 명나라도 잘 아는 제주도와 달리, 칠주도는 명나라가 존재만 겨우 아는 정도지 크기는 잘 몰라 작은 섬이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목장이지."

"이제 거기에 목장을 만들면 말을 대규모로 키워 낼 수 있겠지요. 기존 목장 가운데 제주도는 이미 많이 키우고 있는 토마 생산에 특화시키려 합니다. 동북면 목장들은 호마를 들여와 명나라 모르게 키우기 좋은 입지니 호마 생산에 특화시키면 되겠지요. 한성부와 인근 목장들은 조정에 가까워 관리하기 좋으니 준마들을 모아 사육하려 합니다. 그런데 칠주도는 크기가 크기라 어떤 말을 키우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도의 말에 양녕은 잠시 생각해 보고는 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토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타고 다니고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민간에서 알아서 번식시키고 키울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가 섞이면 점점 작고 느린 말이 나오니, 칠주도에는 토마를 아예 들이지 말고 목장을 여럿 지어 저마다 다른 본색마를 키우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녕의 제안에 이방원이 끄덕이며 말했다.

"다 본색마만 키운다면 설령 목장 간에 말이 멋대로 오가서 종자가 조금 섞이더라도 별색마가 나오면 나왔지 잡색마가 나올 일은 없으니 괜찮은 방법이군."

"그래도 만일 본색마 가운데서 하등마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본색마만 키운다고 해서 전부 상등마가 나오지는 않을 것인데, 본 종자가 좋으니 노마는 안 나온다 쳐도 하등마로 분류되는 말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도가 약간 걱정된다는 어조로 말하자 양녕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명나라에 팔면 되지요. 하등마라고 해도 본색마에서 나온 것이니 생긴 것만 보면 본색마 아니면 별색마 아니겠습니까. 티 안 나는 하등마를 본색마 값에 팔거나, 원래 값으로 팔더라도 생색을 낼 수 있음이 첫째 이득이고, 하등마의 종자가 조선 땅에서 점점 줄게 되니 한 목장에 같은 숫자의 말을 키워도 상등마의 비율이 늘어남이 둘째 이득입니다. 마지막으로 상등마일수록 전쟁에서 쓰여 죽거나 상할 테고 새로 들어오는 조선 말에는 하등마가 섞여 있을 테니, 명나라 말의 하등마 종자는 점점 비율이 늘겠지요."

"나하고 같은 생각을 했구나."

이방원이 그렇게 대답하고 흐뭇하게 웃자, 양녕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이도도 걱정이 풀린 듯 따라서 웃었다.

* * *

1424년 7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그로부터 10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 중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회의를 연 이도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경들 중 올해 초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보내온 보고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 있소?"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닌, 좌중에게 확인시키려는 그 질문에 황희가 대답했다.

"신 예조판서 황희 아뢰옵니다. 무타우타가 황제의 성지도 받지 않고 먼터무를 따라 거처를 두만강 쪽으로 옮겨 온 것이 옳지 않다 말하자, 황제가 허황된 말이라 대답하였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소. 참 우스운 일이지. 성지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가지고 오지 않았다 말한 것인데 허황되었다니, 대체 무어가?"

비웃음 섞인 투로 이도가 말을 이어갔다.

"차마 왜 보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자기 뜻으로 보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뜻 아니겠소? 그럼 다른 내용을 기억하는 이 있소?"

이번에는 허조가 나섰다.

"신 이조판서 허조 아뢰옵니다. 조선은 여진족이 보이면 한 명이건 백 명이건 천 명이건 모조리 죽이는 것이 사실이냐 물었다고도 했습니다."

"기껏 벼슬이고 재산이고 잔뜩 줘서 키워 놓은 군사력인 여진족 부족들인데, 조선 근처에 피난 보냈다가 토벌당해 몰살당해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겠지. 또 없소?"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명나라 중신들이 사신들에게 혹시 먼터무와 오돌리 부족에게 식량을 대어 주냐고 물어봐서, 조선도 흉년이라 제대로 주지 못했다 하니 잘한 일이라 했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식량을 지원받고 마음이 다시 조선 쪽으로 돌아설까 걱정이 된 것임이 너무 뻔하오."

"또 먼터무나 무타우타를 포획할 수 있겠냐 묻기에 저들이 깊은 산에 숨어들어 어렵다 하니, 황제가 몽골을 쳤을 때 그들이 달아난 것과 똑같다고도 했습니다."

"중신들이 포획 여부를 물어본 건 황제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토벌당할까 걱정되어 물어본 것이겠지만, 굳이 황제의 원정을 들먹인 걸 보면 역시 그것과 관련이 있어서 은연중에 말로 나온 것이겠지. 어떻게 해서건 막북 원정이 실패한 원정이 아니라고 조선이 믿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말이오."

모든 중신들이 이도만큼이나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황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합니다. 여진족 관리를 잘하고 있는 조선하고 은근슬쩍 같은 상황으로 취급해서, 명나라도 북원 관리를 잘해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묻어가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 추측이 확실한 이유가 최근에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얼마 전 아하추의 손자 이만주가 훌리가이 부족을 이끌고 요동을 떠나 요동 동쪽, 압록강 상류와 가까운 파저강 일대로 이주했지요."

이도가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무타우타는 애초에 요동에 별 기반도 없던 놈이고, 먼터무도 건주좌위를 받기는 했으나 본래 조선과 더 연이 깊은 놈이니 조선 가까운 곳으로 온다 해서 이상할 것 없지. 하지만 훌리가이 부족은 아니오."

"예. 명나라 황제가 요동은 물론이고 두만강 일대 여진족들까지 포섭하려고 부족마다 입조를 요구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입조한 게 요동 훌리가이 부족의 아하추 놈이었지요."

전 예조판서였던 허조도 거들었다.

"건주위 자체가 귀순한 아하추에게 황제가 새로 만들어서 내려 준 것이지요. 아하추에게는 이사성, 아들인 시기야누에게는 이현충이라는 중국식 이름까지 주었습니다. 오죽 아하추의 가문과 훌리가이 부족이 명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으면 아하추의 손자인 이만주는 아예 여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겠습니까?"

말문이 제대로 열린 허조는 꼬장꼬장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명나라가 아주 작정하고 여진족을 포섭하려 들었던 것이니, 아마 조선에서 명나라가 여진족 족장들마다 보낸 입조 칙유문을 세작을 통해서라도 입수하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때 먼터무까지 입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가는 지금쯤 명나라가 두만강 일대까지 장악했을지도 모르지요."

잔뜩 열을 올리는 허조를 조금 진정시키고자 조말생이 끼어들었다.

"결국 두만강에 위소가 설치되지는 않았더라도 먼터무가 오돌리 부족을 이끌고 요동으로 가긴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위소를 받은 것이 아니라 건주위를 쪼개 건주좌위를 받은 것이니 훌리가이 부족 아래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훌리가이 부족을 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깝게 여기는지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대사마의 말이 맞습니다. 게다가 명나라 황제의 세 번째 황후가 아하추의 딸입니다. 지금 건주위 지휘사이자 훌리가이 부족장인 이만주는 고모가 황후이고, 고모부가 황제인 셈이지요. 그런데 그런 놈이 명나라에 가까운 근거지인 요동을 벗어나 산골인 파저강 일대로 옮긴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조말생이 끼어들어도 여전히 허조가 열을 올리자 이번에는 황희도 끼어들었다.

"먼터무의 오돌리와 무타우타는 물론이고,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던 훌리가이 부족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대피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겠지요."

황희가 말을 마치자 이도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전부 다 종합해 보면 이렇소. 오이라트는 물론이고 여진족까지 동원하고 황제가 친정을 나서기까지 한 명나라의 막북 원정은 그야말로 대실패였소. 북원의 세력을 깎아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분노만 샀지. 휘하 여진족들이 보복으로 몰살당하지 않게 조선 쪽으로 대피시켜야 할 정도로 전력도 떨어졌소. 그리고 줄어든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말값 선금도 아니고 말을 팔아달라는 선물까지 보내며 일만 필을 요청한 것일 게요. 여기까지는 경들도 동의하시오?"

"물론입니다, 전하."

"그리고 차마 조선에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휘하 여진족들을 대피시킨 이유도 숨기고, 막북 원정도 성공했던 것처럼 우기는 중이지. 먼터무가 우리 쪽으로 넘어가는 걸 두려워하는 걸 보면 사실상 여진족 영향력도 거의 놓쳐 가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북원에게 보복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 예방하려던 명나라 황제의 마지막 친정도 실패로 돌아갔소. 아니, 대행황제(大行皇帝)의 마지막 친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며 이도가 비웃듯 씨익 웃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도는 물론이고 중신들도 흰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얼마 전 명 황제였던 영락제의 부고가 전해진 것이었다.

"황제가 실패한 원정을 수습하려고 또 원정에 나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다니, 실로 명나라 만백성이 부끄러워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황제의 부고에 이어서 온 소식을 보니 명나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허조의 말에 이도가 경멸의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물론이오. 공자께서는 용(부장용 인형)을 처음 만든 놈은 대가 끊어지리라고 하셨는데 황제가 죽었다고 산 사람을 죽여서 묻다니. 이게 어디 공맹의 도를 따르는 나라라 하겠소?"

영락제가 사망한 이후, 영락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던 조선 여인들도 순장 당해 묻혔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조선 여인들이 죽었다는 것 이전에 사람을 죽여 순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는 지극히 역겨운 것이었고, 그것이 이번 회의 때 다들 날이 서 있던 이유기도 했다.

"명 태조부터가 역성혁명을 논했다 해서 맹자를 금서로 지정했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저것을 어찌 중화라 하겠습니까? 그저 몽골인을 몰아내고 중국인이 칸이 되었을 뿐입니다."

폭언에 가까운 허조의 발언에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이가 없었고, 오히려 다들 맞는 말이라는 듯 끄덕일 뿐이었다. 잠시 찾아온 침묵에 바쁘게 붓을 놀리는 사관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이 조계청을 채우고, 드디어 다들 명나라를 향한 격한 감정이 가라앉았다 생각한 이도가 조용히 말했다.

"수시로 원정에 나서고, 대함대를 만들어 서역에까지 보냈던 대행황제가 고인이 되었소. 그 기세가 아직 남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오래가지는 못할 테니, 드디어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이오. 조선이 마땅히 되찾아야 할 땅, 동북방을 되찾을 기회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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