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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4화 (10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4화

104화

부윤의 말에 당황한 호방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명나라가 용인하지 않는다 하실 정도입니까?"

"자네는 말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은 아니지?"

"화전민으로 산에서 살았었고 지금은 섬에서 살다 보니 말하고는 인연이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그나마 섬 안에서 물자 옮기거나 돌아다닐 때 조금 타는 정도지요."

"그럼 먼저 설명할 게 좀 있겠군. 우선 말을 구분하는 법은 사람마다 좀 다르지만 크게 두 가지야. 준마에 가까운 것을 상등마, 노마에 가까운 것을 하등마, 그 가운데를 중등마로 분류하는 것이 등급에 따른 구분법이지."

"상중하니 딱 이름대로군요."

"그래. 그리고 다음은 품종에 따른 구분이야. 명마는 저마다 털이나 갈기 색에 특징이 있네. 그래서 그 색을 모두 갖춘, 즉 순수한 명마를 본색마라고 하고, 조금 다른 색이 섞인 것을 별색마라고 하네. 명마로 구분되지 못할 털이나 갈기 색을 한 것들은 뭉뚱그려 잡색마라고 하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본색마면 상등마고 잡색마면 중하등마야."

얼추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호방을 보며 부윤이 말을 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명나라가 조선에서 말을 사 가는 이유는 간단하네. 유목민인 몽골을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는 명나라에게 그들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한 군마는 필수야. 하지만 중국인들은 말 키우는 것이 그리 능하지 못해서 조선에서 구하는 것이지. 태조대왕 때에는 한 번 말을 달라고 하면 만 필씩 요구했다고 하네."

그 말에 호방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그냥 달라고 하면서 만 필씩이나 요구했단 말입니까? 태조대왕께서는 어떻게 하셨답니까?"

"내가 관리가 되기 전 일이라 직접 겪은 건 아니고, 명나라에 말 보내는 일을 맡았을 때 전임자에게 들은 것이긴 하지만 보내긴 보냈다는군. 한 번에 일만 필은 아니고 나눠서 말이야."

"정말로 보냈단 말입니까?"

"그래. 대신 보낸 말 대다수가 병들거나, 길들지 않았거나, 탈진했거나, 노마들이었다고 하네. 아, 이빨이 빠진 말도 많았다고 해."

그 말을 들은 호방이 기겁했다. 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지만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풀을 뜯고 씹어야 먹고 살 수 있는 말은 이빨이 길고 뿌리도 깊을 뿐만 아니라, 닳는 만큼 끊임없이 자라 올라오는 튼튼한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빨이 빠져버릴 정도라면 보통 문제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런 말을 명나라에 보냈단 말입니까? 설마 명나라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요?"

"물론이지. 그때 있던 다른 불만과 합쳐서 항의문을 보냈네."

"다른 불만까지 있었으면 화가 많이 난 것 아닙니까?"

"그것까지는 나도 못 들었네. 여하튼 그래서 조선은 나라가 작아서 말도 왜소하고 둔한 것이고, 강남까지 먼 길을 가느라 지쳐서 병이 난 거 같다고 답했다고 하네."

부윤의 말에 호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삼한의 기병이 강한 것을 모르지 않을 명나라에게 우리는 원래 이런 말만 나고, 말이 병난 건 우리 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희 줄 좋은 말은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몇 번 더 그렇게 보냈더니 그 뒤로는 말값을 치르더군."

잔뜩 긴장하며 물어본 질문에 부윤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호방은 약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명나라가 말값을 치렀단 말입니까?"

"그렇네. 아무리 그때 조선과 으르렁거리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말이 급한데 별수 없지. 그래도 값을 치렀다고 하기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다른 물건하고 맞바꾸자는 식으로 말했다는군. 그 뒤로도 계속해서 말을 사 갈 때면 값을 치르고 있네. 뭐 이번처럼 급하다고 선금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야."

"그럼 이제 말은 좀 괜찮은 걸 팔겠군요."

부윤이 즐겁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잡색마만 보내고 있네."

삼척부윤 하연은 정몽주의 제자다. 명나라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외교적으로 얻어 낼 것은 다 얻어 냈었던 정몽주의 제자이니 이런 사안을 재밌다는 듯 말한 것이지만, 호방이 보기에는 기겁할 일이었다.

그런 호방의 표정을 보고 부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잡색마를 보내면 그 안에 좋은 말들도 더러 섞여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잡색마 가운데 하등마가 있다고 몇 마리 돌려보내면 그때는 더 귀찮아지지 않게 본색마나 별색마로 수효를 채워 주었네. 하등마만 받았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감지덕지해야지."

"역시 나랏일 하는 분들 담력은 못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결국 명나라가 용인하지 않을 일은 무엇입니까?"

부윤은 다시 웃음기를 거두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여기부터가 진짜 본론일세. 명은 몽골을 막기 위해 말이 필요하고, 말 공급처로 조선을 택했네. 몽골에 준마가 많다지만 그들과 말을 거래하면 몽골도 거래로 필요한 걸 얻어 강해질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지."

"그렇지요."

"그리고 명은 저번에 요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또 말 만 필의 거래를 청해왔네. 선금까지 보내면서 말이야."

"그래서 말이 부족해서 여진족들에게 사게 된 거군요. 곡식도 아니고 말이 1, 2년 만에 쑥쑥 자라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야. 함흥 일대에 목장이 많은 것을 아는가?"

"잘 모릅니다."

"한성부에도 큰 목장이 있지만, 함흥 도련포에는 태조대왕께서 즉위하시기 한참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큰 목장이 있네. 그런 기반이 있어서 함흥에서 말들을 쉬어 가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제야 무언가 눈치챈 듯 호방이 진지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여진족에게서 산 말들이 다 명나라에 팔리는 게 아니겠군요."

"바로 맞췄네. 사들인 말 중에서 특별히 좋은 말들은 함흥 목장에서 키워서 종자를 남기고, 나머지는 그 안에서 또 추려서 명나라에 팔 것이야."

얼추 이해는 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은 표정으로 호방이 물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그런 것도 용인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조선이 준마를 많이 키워 내면 나중에 사 갈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이번에 명나라가 요구한 것을 채우기 위해 사들이는 것이 여진족과 교역하는 말의 전부는 아냐. 교역을 점점 비밀리에 확대해서 북방산 말인 호마 중에서도 달단마나 대완마 같은 품종들을 들여올 걸세."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말 품종은 잘 모릅니다."

"달단마는 타타르, 즉 몽골 말 품종이네. 대완마는 서역마 품종 중 하나야. 흔히들 한혈마라고 하지."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호방이 겨우겨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명나라가 몽골을 상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말을 수입하려 하는 것 아닙니까? 몽골이 교역으로 필요한 걸 얻어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조선에서 수입하려는 것인데, 정작 조선이 몽골과 교역해서 준마는 가지고 쭉정이만 명나라에 판단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거라고 한 걸세. 하지만 비밀이라는 것이 영원히 비밀일 수는 없고, 또 우리가 직접 가서 사 오기도 위험하니 여진족을 통해서 들여오려 하는 것이지. 명나라에 말을 팔아야 하는데 우리도 부족하니 여진족에게서 산 것이고, 여진족이 몽골이나 서역에서 들여온 말을 가지고 있다가 판 것뿐이라면 조선 책임은 아니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몽골이 강해지면 조선도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대규모로 사 올 것도 아니고, 여진족을 한 번 거쳐서 교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우리가 들여오는 말값도 오르겠지만, 몽골에 흘러 들어가는 물자도 많지는 않을 거야. 설령 몽골이 좀 더 강해지더라도 어차피 맞상대하는 건 명나라 아닌가."

"상대는 명이 하더라도 결국 상대하면서 말이 필요하면 조선에서 구하는 말도 더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말의 수효를 늘리려는 걸세. 잡색마가 나라에 흔하다면 명나라에 팔았다고 해서 말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명나라는 거래를 모두 조공으로 취급해서 원래 값보다 더 쳐주니, 우리는 뭐가 됐건 많이 팔수록 이득이야."

드디어 명나라가 알면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마자 말문이 막혀 버린 호방에게 부윤이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지금 말할 게 자네가 잘 기억해 둬야 하는 것이고, 내가 이런 중대사를 자네에게 이만큼이나 말한 이유기도 하네. 동북면에는 함흥에만 목장이 있는 게 아니야. 흥원, 화주, 단천 등에는 동해에 면한 고을 가운데는 드물게도 가까운 섬이 제법 있고 평지가 있네. 이런 곳에 목장을 새로 만들거나 개축해서 호마를 대규모로 사육할 걸세."

"이제 알겠습니다. 목장마다 소금 수요가 있고, 소금을 운반하고 섬을 오가려면 항구를 지을 점석회가 필요하겠지요. 가장 가까운 선단일 뿐만 아니라 여기 뱃길에 익숙하고, 이미 삼척부 주민들과도 일해 본 적 있는 대마군 청년들을 쓰실 계획이시군요."

"그래. 중요하고 퍼지면 안 될 내용이라 해서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일을 시키면, 오히려 그 중요성을 몰라서 비밀이 샐 수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 어느 정도 알려 준 게야."

"부윤 말씀대로 아무것도 모르면 섣불리 어디 가서 우리가 무슨 일 한다 떠들 수 있겠지만, 나라의 큰일일 뿐만 아니라 여진족에 명나라, 몽골까지 얽힌 일임을 알았으니 겁이 나서라도 입단속을 잘해야겠지요. 맡겨 두십시오. 일하는 청년들에게는 제가 적당한 이유를 대서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그럼 안심하고 있겠네. 나도 나중에 후임자에게 부윤 자리를 넘겨줄 때 잘 인계할 것이니, 자네도 혹 호방 자리를 넘겨줄 일이 있으면 인계하는 거 잊지 말고."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들어도 되는 게 이 정도라면, 그 뒤에는 더 대단하고 들었다가는 잠 못 이룰 이야기들이 많겠군요."

엄두가 안 난다는 표정으로 호방이 그렇게 말하자, 부윤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다는 모르네. 지금도 이 일에 관련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자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얼마 없어. 하지만 적어도 이런 대대적인 일을 동북면에서만 진행할 리는 없네. 아마 더 큰 뭔가가 있을 걸세. 그저 두 분 전하와 대군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는 예측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뿐이지."

* * *

1423년 9월 중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제주도에는 몽골이 들여온 달단마와 대완마가 많았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 조사하러 보냈더니 말의 태반이 삼한 토착 품종인 토마라 해서 의외였습니다. 튼튼하고 지구력이 강해 짐말로는 좋지만 체구가 작아 기병이 쓰기에는 영 아닌 것이 토마지 않습니까."

이도의 말에 옆에서 차를 마시던 양녕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달단마와 대완마를 토마와 같이 키워도 별문제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호마의 성질이 있는 좋은 말이 태어나면 본토에서 가져다 쓰다 보니 점점 토마 종자의 비율이 높아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옆에 앉아있던 이방원도 한마디 했다.

"그래서 내가 왕이었을 때 제주도의 토마 가운데 호마의 성질을 가진 말들만 선별해 진도나 강화도로 옮겨서 따로 번식시키라 한 것이오. 그래도 좀 부족했었는데 이제 동북면에 직접 호마를 들여와 번식시키면 충분할 것이니 주상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정말로 원대한 계획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역시 형님께서는 배포가 크십니다."

바닥에 펼쳐놓은 계획도를 보며 이도가 그리 말하자 이방원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아마 이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조선은 명나라는 물론이고 여진족이나 몽골마저도 맞붙기를 꺼리는, 강력한 기병을 갖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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