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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3화 (10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3화

103화

먼터무는 이성계의 부하기도 했고, 조선 땅 지척이었던 오무호에 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악연이나마 비교적 최근까지도 조선과 접점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과 엮이지도, 근처에 살지도 않았던 무타우타는 그야말로 완전한 이방인이다.

'먼저 보낸 서신에 무타우타에 대해 자세히 적었던 것도 아니야. 설령 자세히 적었더라도 직접 만나면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건 순리 아닌가. 하물며 그런 걸 빼먹을 얼치기 수령도 아니고, 내 눈앞에 앉아있는 이 왕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노련미가 넘쳐서 내가 눈 뜨고 당하지 않았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먼터무를 보고 양녕이 입을 열었다.

"개양성에서 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소."

개양성 약탈을 돌려 말한 그 말에 무타우타는 물론이고 먼터무의 얼굴까지 굳어지자, 양녕이 슬쩍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명나라에서 서신까지 써서 이곳에 옮겨오게 한 먼터무 공과 같이 온 사람이니 믿을만하고, 무엇보다 조선의 선비 된 자라면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법이오."

"그렇군. 고맙소. 그럼 이만 가 보겠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먼터무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아 거 형님, 혼자만 먼저 훌렁 나가면 어쩝니까."

뒤따라 나온 무타우타의 푸념에 그제야 자신이 너무 티 나게 서둘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먼터무가 대충 둘러댔다.

"네가 늦게 나온 거야. 원래 거래가 끝나면 오래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거요? 조선에는 그런 예절이 있나 보구만. 그러면 나도 진작 알려주지 그랬소."

"낸들 갑자기 거래를 할 줄 알았냐?"

"하긴 그건 그렇지. 난 또 형님이 거래를 잘해 놓고는 저 왕자님 말 바뀌기 전에 도망가는 줄 알았소."

"알았으면 됐다. 그럼 빨리 가자."

대강 상황을 수습한 먼터무가 발걸음을 뗐다. 조선군 병사가 두 사람이 타고 왔던 말을 맡아 두고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옆에서 무타우타가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내가 개양성을 털었다는 소문을 벌써 왕자가 알고 있을 정도라니 역시 소문이라는 놈이 무섭기는 한 모양이오. 으허허허허!"

먼터무는 실없이 웃는 무타우타를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말했다.

"어디 가서는 조선 왕자가 그 소문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얘기 절대로 하지 마라."

"물론이오. 그 얘기가 퍼지면 내가 개양성 털었다는 소문도 같이 퍼져 버릴 텐데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소? 근데 조선 왕자가 그 소문 듣고도 안 믿어 준 건 고맙더이다. 거래 건도 그렇고 좋은 사람인 거 같소."

무타우타는 자기 마음대로 납득한 것 같았지만 먼터무가 당부한 의도는 다른 것이었다.

'무타우타가 개양성을 털고 도망쳤다고 하라는 건 여기로 출발하면서 요동도사에게 받은 지시다. 내가 조선에 먼저 알리고, 그동안 요동도사가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고 그다음 명나라에서 조선에 알리게 해서 앞뒤가 맞게 만들려는 계획이었지. 그런데 아직 내가 조선에 알리지도 않았는데 그 소문을 조선의 왕자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먼터무는 생각하면 할수록 의심과 불안이 커져 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내가 북원 상대로 별 전력이 못 된다고 생각한 명나라 황제가 말들만 가져가고 날 버리려고 뭔가 꾸미기라도 했나? 제발 그것만은 아니어야 할 텐데…….'

* * *

며칠 뒤.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길주부에서 온 장계를 읽어보던 이도가 예조판서 황희에게 물었다.

"대종백께서는 어떤 것 같으시오?"

"먼터무가 조선에서 말을 사겠다는 말에 당황했다는 것, 명나라가 말 만 필을 요구했다는 말에 동요했다는 것, 양 무타우타가 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다가 슬쩍 떠보니 후다닥 나갔다는 것. 전부 양녕대군의 예측과 합치됩니다. 정말로 명나라가 피신시킨 게 맞는 모양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하지만 아직 먼터무에게만 확인했을 뿐, 명나라에게도 확인을 마쳐야 비로소 우리가 움직일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오."

"물론입니다."

"좋소. 그럼 명나라에 이번 먼터무와 양 무타우타의 이주를 보고해야 할 것이오. 다만 그냥 정직한 보고에 그쳐서는 안 되오."

이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이어서 말했다.

"드러낼 것은 드러내고, 숨길 것은 숨겨서 보고해야 하오. 우리가 어디까지 아는지를 제대로 몰라야 명나라에서 우리를 속이려고 이 말, 저 말을 할 것이고, 우리는 그걸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대조해서 더 많은 사실과 명나라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낼 수 있겠지. 그러니 사신으로 가는 이들도 잘 가려 뽑고 준비시켜야 하오. 이건 대총재만 믿겠소."

이도의 말에 이조판서 허조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명나라 황제와 중신들의 말을 정확히 기억해서 올 수 있을 기억력, 연회 자리에서 들은 것도 잊지 않기 위한 주량, 그리고 다른 자잘한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낼 눈썰미 있는 이들을 사신으로 선발하겠습니다."

"좋소. 사신단을 꾸리고 그들을 보내고 다시 소식이 돌아오려면 적어도 반년은 잡아야 하오. 중요하고 오래 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대업의 초석을 놓는 일이니 대소신료들은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 * *

1423년 9월 초순 모일.

삼척부 삼척목 인근.

양녕이 먼터무를 만나고 두 달여 뒤.

이곳 삼척목은 이전과는 딴판이 되어 있었다. 점석회를 써서 만든 크고 튼튼한 새 항구가 생기자 몰려든 배와 사람, 물자로 바글거리게 된 것이다.

"여기는 어쩌다가 이렇게 붐비게 된 겁니까?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지 않았습니까?"

칠주도에서 싣고 온 짐을 다 내려놓고 헉헉거리던 한 청년의 질문에, 화물선단을 이끌고 온 대마군 호방이 대답했다.

"자네는 그때 이후로 이번이 삼척에 처음 오는 거라 잘 모르겠군. 동북방 야인들에게서 말을 사기로 하면서 이렇게 되었네. 소금으로 말값을 치르기로 했으니, 소금 산지인 여기가 붐빌 만도 하지."

"동북면 해안 염분에다 염전을 새로 만들면 더 빠르고 가깝지 않습니까?"

"염전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때도 우리가 와서 일손을 거들었고, 재료도 대마도에서 삼나무와 편백을 가져와서 만든 거였잖은가. 지금 온갖 물자가 오가느라 인력도 재료도 부족한데 그럴 여유가 어딨겠나. 이미 있는 곳에서 생산을 늘리는 게 낫지."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여기서 더 북으로 올라가면 입조한 여진족들이 한성부를 오가는 길목이야. 혹시라도 놈들이 보고 소금 만드는 기술을 배워 가면 곤란하네. 그럼 이제 숨차게 더 말하지 말고 숨 좀 돌리면서 쉬게. 좀 있다가 짐 오면 다시 배에 올려야 하니까."

그 말에 청년이 바닥에 털썩 앉아서 쉬는데, 옆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자네들이 고생이 많군."

삼척부윤 하연을 본 호방이 반갑게 인사하며 말했다.

"부윤 나으리 오셨습니까. 저희야 뭐 하던 일이라 괜찮습니다. 갑자기 일이 늘어난 염부들이 고생이지요."

양녕이 기술을 개발한 뒤로 소금 생산도 이전만큼 힘든 일은 아니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주안과 연안의 염분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있게 되자 굳이 전처럼 소금 생산을 강제할 필요도 없어져서, 염간을 세습하게 규정했던 것도 폐지했다.

여타 직업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지자 이름도 달라져서, 농사짓는 이를 농부, 고기 잡는 이를 어부라고 하듯 염간 대신 염부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염간들의 삶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만나기도 많이 만나는 대마군 주민들에게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자네들도 하던 일이지만 일감이 늘었지 않은가. 피차 고생이지. 자, 저 뒤 수레에 이번 석탄 대금을 싣고 왔네."

부윤이 가리킨 수레를 본 호방이 말했다.

"이번에도 포목하고 비단이로군요. 한 가지 궁금했던 건데 저 포목하고 비단은 다 어디에서 나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딱히 설명한 적이 없었군. 야인들에게서 소금으로 말을 산다고 하지만 말이란 중요한 물자고, 또 말을 파는 먼터무라는 자가 요주의 인물인 데다가 국경 너머에 사니 사사롭게 거래를 하게 둘 수가 없네. 그래서 나라에서 염부들에게 소금을 사고, 그걸 가져가 말과 바꾸는 방식을 취하고 있네. 저 포목과 비단이 바로 나라에서 소금값으로 염부들에게 주는 것이지."

"그런 게 있었군요. 한성부에는 저런 포목과 비단이 많이 나나 봅니다."

부윤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아.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명나라에서 말을 사기로 하면서 선금으로 준 거라더군. 말이 나온 김에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나?"

"물론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금 생산은 갑자기 늘었는데 소금 만들 연료가 먹돌배기에서 캐는 무연탄으로는 부족해서, 자네들을 통해서 칠주도 석탄을 들여오고 그 값은 포목하고 비단으로 치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자네들은 포목하고 비단을 싣고 가고 석탄을 싣고 오는 모습만 보이는데, 그걸로 대체 어떻게 이문을 남기나 궁금해서 말이야. 아, 혹시 장사 비밀이라면 말 안 해도 괜찮네."

조심스러운 부윤의 말에 호방이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석탄을 내려놓고 포목과 비단을 싣고 평호도 교역항으로 갑니다. 거기에 고씨 가문, 일본에서는 오우치라고 하는 집안 상인들이 오는데 그 상인들한테 포목과 비단을 팔고 구리를 삽니다. 포목과 비단은 일본 귀족들이 탐을 내는 물건들이라 그런지 값을 아주 잘 쳐주지요. 그러면 그 구리를 삼남에 팔고, 그걸로 다시 석주부의 석탄을 사서 삼척으로 오는 것이지요."

"생각보다 엄청 많은 과정을 거치는군. 이문도 많겠어. 삼척부와 동북면을 오가며 물건 나르고 삯 받는 이들도 제법 벌이가 좋다 들었으니 대마군이 아주 부자 고을이 되겠군."

동북면에 소금과 점석회의 수요가 늘어났지만 옮길 수단과 일손은 그대로였던 탓에 대마군의 남는 배와 인력을 고용해서 쓰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삼척도 이리 붐비는 것을 보니 곧 부자 고을이 될 겁니다."

부윤의 덕담에 덕담으로 답하던 말한 호방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동북면으로 물건 나를 일이 그리 많습니까? 소금은 말 사는 데 쓰인다는 걸 이미 알고 있고, 동북방에 요새를 지어야 하니 점석회 쓰일 일이 많을 거라는 것도 저번에 대군 마님께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항구가 붐빌 만큼 수요가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동북면에 소금이나 점석회가 생각보다 많이 옮겨지는 이유라……. 뭐 자네도 관련자니 알아두는 게 낫겠지. 대신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지만 말게."

"물론입니다."

변경의 국방에 관련된 사항이라 잠시 머뭇거렸던 부윤이 주위를 슬쩍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고, 호방도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했다.

"야인들에게서 산 말은 석탄이나 소금처럼 배에 쌓아서 옮길 수가 없으니 한성까지 육로로 옮겨야 하네. 그런데 말도 살아 있는 짐승이니 한 번에 갈 수가 없지. 중간에 쉬어 갈 곳이 필요해."

"배로도 삼척에서 바로 길주까지 갈 수 없어서 중간에 잠시 정박한다고 들었습니다. 비슷한 경우겠군요."

"맞아. 함흥은 길주와 한성을 잇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고, 평야가 있으니 풀을 뜯게 하건 콩을 먹이건 말을 쉬어가기에 적합한 곳이지. 해로로도 삼척과 길주를 잇는 데다가 항구를 낀 큰 마을도 있으니 소금과 점석회를 옮기는 배가 머물러 가기에도 좋아."

부윤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호방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면 경유지인 함흥에도 튼튼한 항구를 만들어야 하니 점석회가 그만큼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저리 많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왜 더 많이 필요한 겁니까? 말들이 함흥에 쉬어 가는 동안 먹는다고 쳐도 저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항구가 함흥에만 지어질 것이 아니고, 말들이 쉬어 가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 그렇네."

"그게 무슨……."

"어차피 자네도 그때가 오면 거들어야 할 테니 미리 알아는 두되 절대 발설하지 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 잠시 말을 멈췄던 부윤이 한층 더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나라가 알면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일을 동북면에서 진행하려 하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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