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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2화 (10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2화

102화

1423년 6월 하순 모일.

길주부 경성군 모처.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움찔해 버린 먼터무는 애써 위축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 큰소리치더니만……."

옆에서 무타우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터무 스스로도 한심할 지경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할 변명은 있었다.

'이성계 어르신과 너무나 닮았다. 사실 스무 살도 안 된 내가 처음으로 그분을 모시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분은 쉰이 넘으셨으니 그분의 젊은 시절 얼굴은 모르지만, 적어도 저 젊은이의 풍채와 분위기는 완전히 어르신을 빼닮았다. 꼭 살아 돌아오신 것만 같은데 내가 어떻게 안 놀라겠나.'

먼터무가 지금은 건주좌위 지휘사라는 그럴싸한 직함이 있지만, 한때는 이성계의 휘하 여진 부족들 가운데 가장 강성한 부족의 부족장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성계의 위엄은 여진족들에게 엄청난 것이었다.

'내 계책이 먹힌 모양이군. 시작부터 압도당하면 협상의 기세는 꺾이는 법이지.'

한편 먼터무가 움찔하는 것을 똑똑히 본 양녕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양녕은 아예 이성계가 전성기 쓰던 것과 최대한 비슷한 투구와 갑옷을 챙겨와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풍채와 분위기, 투구와 갑옷에 당당한 자세까지 합쳐서 먼터무가 이성계에게 느꼈을 위압감을 잠시만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작전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놀랍니까?"

무타우타가 작은 소리로 한 질문에 정신을 다잡은 먼터무가 마찬가지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충 누구일진 알 것 같다. 너도 아마 알면 놀랄 거야."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먼터무가 천막 안쪽으로 걸어가자 무타우타도 따라가며 주위를 살폈다. 위압감을 주기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설치된 천막 안에는 사방에 비단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런 깃발들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깃발은 깃발인데 꼭…… 사냥꾼이 사냥감 가죽들을 걸어놓은 거 같은데요."

무타우타의 직감적 판단은 정확했다. 사방에 걸린 비단은 칠주도 정벌에서 전리품으로 얻어왔던 적들의 깃발이었다. 양녕이 특별히 이도에게 요청해서 은근히 핏자국이 남은 것들로 가져와 위압감을 주려고 걸어 둔 것이었다.

"어서들 오시오."

먼터무와 무타우타가 다가오자 양녕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진족도 대체로 키가 큰 편이지만, 그보다도 큰 양녕의 키와 체구에 무타우타도 살짝 압도당했다.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양녕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오돌리 부족 족장 먼터무요?"

"그렇소."

"그렇다면 그대가 무타우타로군."

"그렇소. 명나라 황제께서 양씨 성을 내려주셔서, 흔히들 양 무타우타라 부르오."

오돌리 부족장으로서의 권위가 이미 큰 먼터무는 명나라에서 받은 동씨 성을 안 쓰다시피 하지만, 별다른 권위가 없는 무타우타는 항상 명나라에서 받은 양씨 성을 붙여서 어떻게든 권위를 세워 보려 하고 있었다.

"둘 다 반갑소. 나는 조선의 왕자인 양녕대군이오. 상왕전하의 아들이자 주상전하의 형제지. 둘 다 앉으시오."

양녕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미리 준비해 둔 의자 둘을 가리켰다. 의자에 앉으며 먼터무가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그분의 핏줄이라 닮은 거였군. 이제 기억이 난다. 조선의 세자가 바뀌었고, 바뀐 세자가 양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했지. 이렇게 장성한 왕자 가운데 양녕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으니 이자가 그 이전 세자겠지.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통내기가 아니다.'

왕자라는 말을 듣고 살짝 긴장한 무타우타가 의자에 앉자마자 양녕에게 말했다.

"왕자님이셨군요. 어쩐지 형님이 놀라시더라. 제가 글줄이 없고 말주변도 없고 좀 무식한 편이라, 저하고 말해 봤자 속만 터지실 거고 제가 왕자님한테 실례를 할지도 모르니 여기 먼터무 형님하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좀 전에 이름 앞에 성을 붙여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던 자세는 어디론가 가고, 갑자기 자신에게 다 떠넘기는 무타우타를 먼터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보았다. 잽싸게 양녕에게 존대하는 무타우타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차라리 알아서 입을 다물어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기에 꾹 참고 양녕에게 본론을 말했다.

"염치없는 소리인 건 알지만, 저번에 먼저 사람을 보내 요청드린 식량은 어찌 되었소?"

'앉자마자 저번에 서신으로 요청한 식량 얘기라니. 정말로 급하거나 아니면 바로 나하고 수 싸움에 들어가려 하거나 둘 중 하나겠군.'

어느 쪽이건 이미 기선은 양녕이 잡고 있었다. 당당하고 태연하게 가야 했다.

"물론 가져왔소. 그런데 우리도 마음 같아서는 많이 주고 싶지만 조선에도 곳곳에 흉년이 들어 많이 주기가 어렵소. 그래서 쌀은 좀 적은 대신 조나 기장, 콩 같은 것의 종자를 많이 가져왔소. 이걸로 농사를 지어 불려야 할 거요. 당장 먹을 식량은 괜찮소?"

식량이 부족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대로 약점을 잡히고 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는 약간 다급했지만 먼터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괜찮소. 당장 먹을 만큼은 있소."

"그럼 다행이군. 오무호 일대가 버려진 지 오래라 땅이 많이 굳어졌을 것이오. 소를 좀 데려왔다 들었으니 그 소들을 써서 갈면 될게요."

"알겠소. 지금은 농사철이 좀 늦었으니 빨리 갈고 수확이 빠른 조나 기장을 심으면 되겠군."

탐탁잖은 기색을 감추며 대답한 먼터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식량으로 준 것이 북방에서는 못 키우는 쌀이었거나, 혹은 잡곡으로라도 많이 주었다면 여차하면 싸 들고 옮겨가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자로 쓸 정도만 잡곡을 주어 버리면 농사를 지어야 식량을 만들 수 있었다.

'제법이군. 농사짓는 도중에는 땅에 묶이니 어딘가로 쉽게 이주할 수도 없고, 조선에 대들었다가는 군대가 와서 불을 질러 버릴 수도 있다. 하필 계절도 계절이니 당장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지. 어차피 한동안 버티고 살 생각으로 왔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목줄을 잡힌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말들은 다 어디에 두고 소만 몰고 오셨소?"

이어서 갑자기 치고 들어온 양녕의 질문에 먼터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길가에 좀 뒤처져서 다른 이들이 몰고 오고 있소. 천 필 정도 되오."

'큰일이다. 명나라가 말을 거의 다 가져간 걸 알게 되면 우리 전력이 없다는 걸 들키고, 명나라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도 자백하는 꼴이 된다. 조선을 버리고 가서 붙은 뒷배가 약해졌다는 걸 조선이 알면 남은 건 보복뿐이야. 급하게 일단 장정 숫자만큼 천 필은 있다고 둘러댔지만 제발 눈치 못 챘으면 좋겠는데…….'

급하게 대답하고 나서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느꼈는지 이를 악무는 먼터무를 보면 양녕이 속으로 웃었다.

'걸렸군. 넌 모르겠지만 지난달 명에서 세자(이향, 원래 역사의 문종)를 책봉한다는 칙서가 왔다. 그 책봉 칙서에는 뜬금없게도 말 1만 필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었지. 아마도 북원의 반격을 빨리 대비해야 하니 최대한 큰 숫자로, 최대한 급하게 요청한 거겠지. 그런 상황에서 한동안 피신시키는 너희들에게 천 필이나 되는 말을 딸려 보낼 리가 없다. 기껏해야 몇백이겠지.'

양녕은 먼터무의 바람대로 눈치 못 챈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오. 그럼 그중에서 오백 필 정도 사고자 하오."

갑작스러운 양녕의 말에 먼터무의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을 본 양녕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우리야말로 묻고 싶소. 방금 도착한 우리에게 말을 오백 필이나 사겠다 한다니, 대체 무슨 일이오?"

"자세히는 나도 모르오. 명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난달에 온 사신이 말 만 필을 요구했소."

순간 먼터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했다. 완전히 읽혔어. 대체 어떻게 이렇게 바로 뚫어 보는 거지? 자칫하면 우리가 말이 부족한 건 물론이고, 명나라 정세까지도 들킬지 모른다.'

양녕이 원래 역사의 지식을 갖고 있음을 꿈에도 모를 먼터무는 조심스럽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넓은 지역을 다니려면 말이 필요해서 그렇게 많이 팔 수는 없소."

"큰일이군. 그럼 250필은 되겠소?"

흥정 한 번에 숫자가 갑자기 반으로 줄었지만, 더 협상하려 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조선에게 중요한 건 말을 몇 마리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돌리 부족의 전력 파악이다. 깎으면 깎을수록 밑천이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먼터무가 잠시 고민하는데 양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도 그냥 팔라는 건 아니오. 여진족에게 말이 얼마나 중요한 재산인지 우리도 아는데 어찌 그러겠소. 조선에 기근은 많이 들었지만 다행히 날이 더워서 그런지 소금이 많이 났소. 평소보다 값을 더 쳐서 소금으로 지불할 테니 250필을 사고 싶소."

북방은 소금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지만, 목축하는 이들에게는 가축에게 먹일 소금이 꼭 필요했다. 그런 소금을 제시하는데 거래를 망설인다면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

"알겠소. 그리하겠소."

"고맙소. 덕분에 한시름 덜었소."

먼터무가 거래를 수락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무타우타가 눈을 크게 뜨고 끼어들었다.

"왕자님, 혹시 저희도 몇 마리 팔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우리는 말이 필요하니 언제라도 환영이오. 값은 물론 소금으로 두둑히 쳐주겠소."

"감사합니다! 먼터무 형님, 역시 형님 거래 수완이 대단하시오."

무타우타의 칭찬에도 먼터무는 굳은 표정으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무타우타 놈은 좋은 거래를 했다 생각하고 이리 좋아하지만 이건 망한 거래다. 전력과 정세를 들키지 않으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니 거래도 아니지. 사실상 억지로 소금을 받고 말과 위신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다.'

한편 양녕은 겉으로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고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말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전력을 들킨다. 그렇다고 얼마 되지 않는 말을 모두 긁어모아 팔 수도 없지. 그렇다면 결국 소금을 받고 그걸로 주변 다른 부족들에게서 말을 사 와서 조선에 팔아야 한다. 조선에서 소금을 두둑이 쳐줄 테니 그 과정에서 이익도 볼 것이고, 다른 여진족들에게 소금 공급책으로 자리를 확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부족들이라고 소금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까? 어디 신나게 두들겨 맞고 명으로 도망갔던 놈이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말 심부름이나 하러 다닌다는 걸 네놈들 손으로 사방에 알리고 다녀봐라.'

"이제 식량도 해결되었고, 인사도 드렸소. 대군께서도 혹시 다른 필요하신 게 있으시오?"

더 앉아있어 봤자 손해만 보겠다 생각한 먼터무는 대화를 끝내는 쪽으로 말을 돌렸다. 양녕이 뭐가 필요하다고 하건, 그게 넘치는 거건 없는 거건 상관없이 어렵겠다고 하고 대화를 끝내 버릴 생각이었다.

"괜찮소. 원래 본 목적은 그대를 만나 보는 것이었소. 그간 어떤 일이 있었건 간에 한때 태조대왕과 가까웠던 사이인데 종친이 와서 보는 게 맞고, 기왕이면 종친 중에서도 대군이 오는 게 맞지 않겠소? 말은 오는 김에 겸사겸사 부탁해 본 거요."

양녕의 태연한 소리에 먼터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그러셨구려. 하지만 말과 소금을 흥정하고 바꾸고 하는 것은 대군처럼 높으신 분께서 하실 일이 아닌 것 같으니, 후에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는 게 맞는 것 같소."

"그건 맞소. 말값을 정확히 얼마나 쳐야 하는가 하는 것도 내가 여기서 마음대로 정할 일이 아니니 말이오. 내 조정에 돌아가서 바로 주상전하께 말씀드리겠소."

"알겠소. 그럼 빨리 밭을 갈고 자리도 잡아야 할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소이다."

"가져온 쌀과 종자는 밖에 두었소. 비나 이슬을 맞지 않게 천막을 쳐 두었으니 마을을 만든 다음 천천히 옮겨가시오. 다 옮겨간 다음 조선 쪽에 알리면 천막을 거둬 갈 것이오."

"고맙소.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먼터무는 갑자기 엄습하는 불길함을 느끼고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타우타에 대한 건 안 물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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