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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101화 (10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1화

101화

"그렇소. 완전히 복속시키지도 못했고 멸족시키지도 못한 상태로 먼터무가 도망을 가 버려서 동북면의 정세는 고요하면서도 불안감이 있었지. 그런데 그놈이 제 발로 돌아왔소. 이미 명의 관직을 받았으니 멸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복속시킬 수는 있을 것이오."

이방원의 말에 병조판서 조말생도 거들었다.

"신 병조판서 조말생 아뢰옵니다. 여진 부족 하나 지켜주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사실을 숨겨 가며 원래 살던 조선 근처로 피신시켜야 할 정도라면, 명나라 역시 오랜 막북 원정으로 힘이 빠졌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이 두만강 일대 여진족을 포섭하러 나서도 방해할 영향력을 투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양녕대군의 말이 이치에 모두 맞는 것이라고는 하나, 여진족뿐만 아니라 명나라와도 얽힌 중대사입니다. 확인하기 전에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꼬장꼬장한 허조의 말에 오히려 믿음직스럽다는 듯 피식 웃은 이도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럼 지금부터 우리가 쓸 수 있는 수단을 최대한 써서 요동과 막북, 여진의 소식을 모으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시오. 우선은 먼터무가 오무호에 도착하는 대로 본인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게 먼저겠지. 그리고 만일 양녕대군의 말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바로 움직일 것이오."

"예, 전하."

* * *

1423년 6월 하순 모일.

길주부 경성군 모처.

조선에서 흔히 동북면이라 불리는 동북방 지역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수 있었던 기반이 되는 중요한 땅이었다. 하지만 조선 초의 혼란과 여진족의 침입은 수도에서 멀고 길도 험한 이 일대의 땅을 관리하게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이방원은 점점이 흩어져 있어 국경 구실을 하지 못하는 동북면 북부의 군현들을 폐지하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온 곳에 역량을 집중시켜 확실하게 국경선을 굳혔다. 그 국경선이자 대여진족 최전방이 바로 이곳 경성군이었다.

"형님, 우리가 살기로 한 곳에서 너무 멀리 온 거 아닙니까? 조선인 마을이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그냥 살아도 되지 않습니까?"

옆에서 말을 타고 오며 귀찮다는 듯 말하는 양 무타우타에게 먼터무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살기로 한 경원이라는 지역 이름이 왜 경원인지 아냐?"

"저는 글줄이 없어서 그런 건 모릅니다. 왠데요?"

"경사의 근원이라서 경원이다. 조선 첫 왕의 고조부모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지."

"첫 왕이면 형님이 모셨던 그분이요? 근데 무덤이 있으면 있는 거지, 있던 건 또 뭡니까?"

이성계 밑에 있었다는 사실을 딱히 말하기 싫어 빼고 말했건만 눈치 없이 굳이 집어서 말한 무타우타에게 눈을 살짝 흘긴 먼터무가 말했다.

"내가 명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것 때문에 조선하고 무지막지하게 치고받은 걸 얘기한 적 있지?"

"그 군사를 끌고 와서 오돌리 부족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여진족이라고 생긴 건 보이는 대로 다 죽이고 불 지르고 갔다는 그거 말입니까? 형님이 조선이 얼마나 독한지 말할 때마다 들어서 알고 있지요."

"내가 그때 쳐들어가서 약탈했던 곳이 바로 경원이야. 내가 물러난 다음에 조선이 위기를 느꼈는지 경원에 마을을 없애고 주민들을 남쪽으로 물리면서 무덤도 같이 이장해갔다. 그래서 무덤이 있었다고 한 거야."

이번에는 무타우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먼터무를 슬쩍 봤다.

"형님이 독하게 약탈해서 조선에서 마을도 없애고 무덤까지 옮겨간 빈터라고요? 그러면야 거기 그냥 자리를 잡으면 당장에 조선이 군대를 보내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우리 발로 찾아가서 거기 살겠다고 말해도 죽이려고 하는 건 똑같을 거 같은데요."

"우리가 뭐하러 명나라 황제가 보내는 서신을 먼저 조선에 보냈겠냐? 다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막으려고 한 거다."

"먼 황제 서신이 가까운 조선 왕 주먹보다 세기를 바라야죠. 그런데 형님은 살던 동네라는 명분이라도 있다 칩시다. 저는 뭐 없습니까?"

"아마 길주 부윤이 어지간한 질문은 나한테만 할 건데, 혹시라도 너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대답을 잘해야 해."

"뭐라고 대답합니까?"

"개양성을 약탈하고 도망쳐 왔다고 해라."

무타우타는 상상도 못 한 그 답변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개양성 일대는 제 근거지 아닙니까. 자기 근거지를 약탈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조선이 거기가 누구 근거지인지 어떻게 알아? 어차피 거기 있던 세간 중에 들고 올 수 있는 건 다 들고 온 거니까 턴 거나 다름없지."

"그렇다 칩시다. 그렇게 말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에 잘 보일 기회라 생각하고 날 냅다 잡아다 압송하면 어쩌게요?"

걱정스러운 무타우타의 말에 먼터무는 가슴을 탕탕 쳤다.

"건주좌위 지휘사인 내가 같이 왔으니까 괜찮아. 명나라 신하이자 봉신이나 마찬가지인 나하고 같이 있는데 황제한테 보고하지도 않고 나설 수는 없다. 정 걱정되고 낌새가 이상하면 너도 명나라에서 천호 자리를 받았다는 걸 넌지시 흘리면 되지."

"뭐 그야 나도 말직이지만 명나라 신하긴 하죠. 그럼 좀 안심은 됩니다만 애초에 왜 약탈하고 도망쳐 왔다고 해야 됩니까? 찝찝하게시리."

"나하고 오돌리 부족은 여기서 살던 적이 있으니 다시 돌아왔다고 하면 이유는 충분해. 그런데 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오는 거잖냐. 그냥 덜렁 와서 살겠다고 하면 당연히 수상하지. 근데 개양성을 털고 도망쳐 왔다고 하면 조선이 명나라 황제한테 보고를 하건, 알아서 조사를 하건 한동안 이 근처에서 살게 냅두고 지켜보지 않겠냐."

"다른 좀 괜찮은 이유 없어요?"

"넌 말주변이 없어서 이게 나아. 괜히 구구절절 말해야 하는 그럴싸한 이유 만들었다가 헷갈려서 조선이 눈치채면 안 되지만, 성 하나 털고 도망왔다고 하면 입 좀 다물고 있거나 말 앞뒤가 안 맞거나 거짓말하는 티가 좀 나더라도 저놈이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겠거니 하고 넘어갈 거 아냐."

"뭐 내가 말주변이 없긴 하죠."

무타우타가 살짝 뚱해하는 것 같자 먼터무가 바로 다음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전 요동도사가 산동성으로 옮겨가고 노련한 사람으로 새로 교체된 것도 그래. 그냥 요동도사를 바꾸면 우리 이동하고 겹쳐서 조선이 수상하게 여길 수 있지. 하지만 개양성 털리는 걸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으로 좌천된 거라고 하면 그럴싸하지 않겠냐?"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건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누구 털어먹고 산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골이 날 정도로 나쁜 짓 하고 살았으니까요. 문제는 계속 나쁜 놈으로 남으면 나중에 명나라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조선에 붙지도 못하고 쫓겨 다닐까 봐 그게 걱정인 거죠."

"어차피 명 황제가 용서하고 다시 부른다고 하면 조선이고 다른 부족 놈들이고 간에 토 달 수 있냐? 개양이 조선 땅도 아니니 조선에 명분도 없어. 그리고 설령 명나라가 계속 안 불러도 살길은 있어. 명나라도 언제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네 관직을 취소하지는 않을 거다. 계속 명나라 천호인 상태인데 누가 널 쉽게 건드려?"

무타우타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먼터무의 말이 이어졌다.

"설령 명나라가 널 완전히 버리고 천호직까지 취소한다고 해도 걱정할 거 없다. 조선인 중에 자기네 가까이 사는 우리 오돌리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멀리 떨어져 사는 우디거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얼마 없어. 그런데 너희는 우디거면서도 우리 오돌리나 훌리가이 부족하고 자주 접해서 말이 통하잖아."

"같은 우디거 안에서도 부족끼리 말 안 통하는 경우도 꽤 있지만 어지간하면 다 통하긴 하죠."

"그래. 조선은 대들지만 않는다면 여진족을 최대한 통제하고 포섭하려고 한다. 너희가 있으면 간접적으로나마 우디거를 통제하기 쉬워지니 포섭하려 들면 들었지 죽이러 들 일은 없어. 애초에 넌 명나라 성을 턴 거지 조선에는 척진 거 없잖아."

"그럼 다행이네요."

드디어 무타우타가 입을 다물고 먼터무가 한숨 돌리는데 저 앞에 주위에 나무 울타리를 두른 큰 천막이 하나 있었다.

"다 왔나 보군. 말에서 내려라."

"우리 둘만 조선 땅 근처에 온 것도 뭔 일 날까 걱정되는데 말에서까지 내려야 됩니까?"

"말 타고 천막에 들어가게?"

먼저 말에서 내린 먼터무의 그 말에 자신의 멍청한 소리를 깨달은 무타우타도 얌전히 말에서 내렸다.

맞이하러 나온 조선 병사들에게 고삐를 넘겨주고, 다른 병사의 안내를 받아 천막으로 가면서 먼터무가 작게 말했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순간이니까 절대로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있어라."

"내가 누구 앞에서 겁먹는 거 봤수? 걱정 마시오."

"그럼 다행이지. 하긴 넌 요동도사하고도 티격거렸었지. 나도 조선 왕하고도 같이 말을 달린 사이인데 길주부윤 정도 만났다고 움츠러들 일이 뭐 있겠냐."

"하기야 황제 서신도 보내놓고 왔는데요."

천막 앞에 멈춰선 둘이 그 말에 서로 마주 보고 피식거리고 웃는 동안 조선 병사가 천막 입구를 걷었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두 사람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것과 거의 동시에, 당당한 자세로 천막 안 의자에 앉아 있는 양녕을 보고 먼터무가 움찔했다. 천막 입구를 닫던 병사까지 놀랄 정도로 큰 움찔거림이었다.

* * *

같은 시각.

한성부. 군기시.

"괜찮을까 걱정됩니다."

철판을 말아 만든 조총 총열 시제품들을 들여다보던 군기시정 최해산의 말에, 개발 상황을 살펴보러 왔던 병조판서 조말생이 물었다.

"괜찮다니?"

"양녕대군께서 길주로 먼터무를 맞이하러 가셨다 들었습니다."

"가셨지. 그런데 걱정된다니, 대군의 안전이 걱정된단 말인가?"

"예. 칠주도는 왜구를 뿌리 뽑고 조선의 힘도 반대 방향으로 쓰게 만들기 위해 명나라가 흔쾌히 수락했잖습니까. 그래서 대병력을 이끌고 갔으니 당연히 안전했고, 화약이나 신무기도 부담 없이 쓸 수 있었지요."

최해산 쪽을 보지도 않고 실험 결과를 정리한 도표를 읽으며 조말생이 말했다.

"동북면은 반대긴 하지. 조선의 힘이 북방으로 향하는 데다가 여진족 영향력도 강해지니 명나라가 방해하려 들 거고, 그래서 병력도 호위병력만 일부 따라갔으니까. 명나라에 소문이 들어가면 기술을 빼내려 하거나 견제할 테니 화약이나 신무기도 마음껏 쓰기가 어렵지. 하지만 걱정할 거 없네."

"아마 괜찮다도 아니고 걱정할 게 없는 정도입니까?"

"그래. 첫째로 남쪽 왜구들이야 전조 말에 잠깐 설쳤지만, 북쪽 말갈이니 여진이니 하는 것들은 수백 년 넘게 삼한의 적이었네. 둘째로 동북면은 흥왕의 땅이야. 지금이야 물러나 있지만 언젠가는 찾아야 하는 땅이지. 셋째로 그게 아니더라도 지극히 중요한 국경이네. 이런 이유들로 북방에는 이미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고, 그 대다수는 정예 기병들이지 않은가."

"하긴 정동군에서 대활약한 기병여단부터가 당시 북방이 잠잠한 덕분에 그쪽에서 차출해 올 수 있었던 병력들이었지요. 대병력을 딸려 보내지는 않아도 대군께서 도착만 무사히 하시면 거기 이미 대병력이 있는 셈이로군요."

"그래. 먼터무도 괜히 트집 잡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 병력은 다 두고 올 것이고, 큰 부족인 오돌리 부족과 조선이 만나는 상황이니 주변 부족들도 다 잠잠히 있겠지."

"그럼 다행입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먼터무를 떠보겠다고 직접 그 멀리까지 가실 정도였으니, 일만 잘 풀리면 좋겠군요. 먼터무 놈이 대군을 구중궁궐에서 자라신 분이라고 얕보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조말생이 도표에서 눈을 떼고 최해산을 보며 말했다.

"그것도 걱정할 거 없네."

"하긴. 대군께서 지략이나 통찰이 범상하신 분이 아니니 쓸데없는 걱정이겠군요."

"사람 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그런 것만이 아냐. 보이는 겉으로도 대단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게."

그 말에 최해산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얼굴을 본 조말생이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협상은 시작이 중요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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