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100화
100화
1423년 5월 모일.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명 황제의 지시를 받아 다시 오돌리 부족을 이끌고 오무호로 돌아오겠다. 200명이 먼저 가축을 이끌고 선발대로 갈 것이고 이어서 먼터무 본인이 6천여 명을 이끌고 돌아오겠다. 또 요동의 개양 일대에서 살던 양 무타우타라는 자 역시 부족 간 싸움에 시달려 고생이 많으니 3백 명을 데리고 경원에 옮겨와 살게 될 것이다."
중신들을 모아 두고 먼터무가 길주부윤을 통해 보낸 서신을 대강 다시 읽은 이도는 서신을 앞에 던지듯 툭 내려놓고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아주 통보하는 듯한 말투요. 누가 보면 이놈이 우리 상전인 줄 알겠소."
오랜만에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배석한 이방원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겁대가리를 잃었거나 기억을 잃었거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잃은 것 같소."
한때 이성계의 수하였던 먼터무는 조선에 충성을 다할 것처럼 굴었으나 결국 명에 붙어 관직을 받았고, 그 권세로 조선에 볼모로 가 있던 가족들까지 돌려받았다.
당시 오돌리가 명에 붙어 조선과의 외교에 우위를 점하는 것을 본 다른 부족들까지도 명나라에 붙어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되자, 분노한 이방원은 군사를 보내 부족을 막론하고 수백을 죽이고 마을을 초토화해 경고했다.
결국 먼터무가 부족을 이끌고 원래 살던 두만강 하류의 오무호를 떠나 요동으로 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머리를 숙이고 싹싹 빌면서 돌아와도 받아 줄까 말까 한데 대체 뭘 믿고 이리 목이 뻣뻣한지 모르겠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뭐, 목을 뻣뻣하게 뻗고 오면 자르기는 좋겠군요."
이성계를 쏙 빼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이방원과 이도가 먼터무의 서신을 읽고 화난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는 가운데,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앉아있던 이조판서 허조가 말했다.
"신 이조판서 허조 아뢰옵니다. 어쩌면 자기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당연하다 생각해 당당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겁을 상실한 것도 아니고, 처참하게 당하고 줄행랑친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오랑캐들이 흔히 그렇듯 한 번 자기 것이었던 것은 남에게 주었건 빼앗겼건 계속 자기 것이라 생각한다는 말이오? 그럴 수도 있겠군. 대종백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오랑캐가 명 황제의 지시라며 조선에 빼앗겼던 땅으로 돌아오겠다고 통보한다는 전대미문의 상황이니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에게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서였다.
"신 예조판서 황희 아뢰옵니다. 어쩌면 명 황제가 지시한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은 조선이 관리하라는 전 황제가 남긴 약조를 저버리고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까지 자신들의 통제에 넣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겸직하던 5개 직위를 겨우겨우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한성판윤에서 예조판서로 승진하자마자 닥쳐온 막중한 일에 황희는 겸직하던 때만큼이나 퀭한 표정이었지만, 이도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소. 훌리가이 부족 족장 아하추가 투항하자 명에서 요동에 건주위를 설치하고 지휘사에 임명했지. 그리고 지금의 명 황제는 먼터무 놈이 조선 접경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도망가자마자 붙잡아 조선에 압송하거나 처벌하기는커녕 냉큼 건주위를 쪼개 건주좌위를 만들어 그 지휘사로 임명했고 말이오."
"예. 아하추가 죽은 다음에도 아들을 건주위 지휘사로 임명해 주었으니 사실상 훌리가이 부족장이 건주위를 세습하게 해 준 셈입니다. 아예 아하추와 그 아들에게 명나라식 이름까지 내려주었으니, 훌리가이 부족은 반쯤 명나라의 여진족 봉신이나 다름없지요."
황희의 설명을 듣던 이방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터무를 건주위에서 쪼개 만든 건주좌위 지휘사에 임명해 놓고서 건주위의 아하추와 다르게 대할 리 없으니, 결국 먼터무의 오돌리 부족도 여진족 봉신으로 삼을 생각이겠군. 그리고 그런 먼터무를 두만강 쪽으로 보낸다면……."
"압록강 너머는 건주위의 훌리가이 부족을, 두만강 너머는 건주좌위의 오돌리 부족을 써서 집어삼키려 들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황희의 말을 들은 이도는 작게 흠 하는 소리를 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경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한다 생각하시오? 그냥 먼터무가 명나라에서 달아나며 황명을 사칭한 것이라면 군사를 보내 이번에야말로 들개 밥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정말로 뒤에 명 황제가 있다면 그럴 수 없지 않소."
이도의 말에 허조가 꼬장꼬장한 얼굴로 말했다.
"강경하게 나가야지요. 두만강 너머는 조선이 관리한다는 것은 선황제의 약조입니다. 이 건에 관해서는 명나라에는 명분이 없으니 항의함이 마땅합니다."
"내 생각도 그렇지만 성급히 명나라에 항의할 수도 없으니 여러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겠소. 양녕대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이방원의 지시로만 특별히 앉을 수 있던 이전과는 달리, 축자후로서 당당히 참여해 앉아있던 양녕이 이도의 질문을 받고 잠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 계획을 실현하려면 앞으로 여진족과 관련된 일에서 내가 맡는 비중이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입지를 키워야 한다.'
"신 양녕대군 이제 아뢰옵니다. 우선 먼터무가 명나라에서 달아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시를 받은 것이 맞으니 저리 당당하게 구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정말로 명 황제가 두만강까지 장악하려고 한다 생각하시오?"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이도와 이방원 뿐만 아니라 온 좌중의 이목이 쏠리자 양녕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가 크게 관여한 것은 일본 쪽이니 북방의 역사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 원래 역사의 이유와 상황이 그대로라면 내막과 상황,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맞추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면 나는 제자리에 앉아 소식만 듣고서도 명과 여진족의 상황과 의도를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본 것이 된다.'
"두만강 일대를 장악하는 이익을 얻으러 먼터무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병력을 잃는 손해를 피하러 먼터무를 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병력을 잃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명에서는 먼터무와 그가 이끄는 오돌리 부족을 강한 군사력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포섭하려고 했었고, 조선이 항의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도망쳐 오자마자 바로 받아들이고 건주좌위를 주었겠지요."
"여진족들은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전사라고 할 만한 이들이니 그럴만하오. 조선에서도 투항한 여진족들로 두만강 일대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오."
지금까지 이뤄온 일들의 전례와 오 태백으로 여겨지는 권위, 그리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양녕은 천천히 이도뿐만 아니라 회의에 참여한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 명 황제는 막북. 즉 사막 이북 몽골 지역을 공격하는 데에 진력 중입니다. 정확히는 막북 동부의 북원을 치려는 것이지요."
"북원은 위험한 놈들이니 그럴 만하지. 보르지긴 가문의 황금 씨족, 즉 칭기즈 칸의 후손이 여전히 칸으로 군림하는 나라지 않소. 설령 명나라가 원을 막북으로 몰아내고 세운 나라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황금 씨족의 권위가 다시 한번 초원을 장악하면 천하가 다시 말발굽에 짓밟힐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북원을 견제했을 것이오."
"예. 그리고 명나라는 그 수단 중 하나로 막북 서부의 오이라트 부족들을 지원하는 중입니다. 오이라트가 아무리 쪼개져 있어 제힘을 내지 못하고, 보르지긴 혈통이 아니라 칸을 칭하지 못하고 재상격인 타이시(태사)라 자칭한다는 하지만 오이라트도 엄연히 몽골의 일파이고 명나라와 싸웠던 상대입니다. 아무리 이이제이라고 하나 몽골을 도와서 몽골을 견제하려 들 정도라면 명나라에게 북원은 버거운 상대라는 얘기겠지요."
이도가 잘 몰랐던 내용을 천천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다 문득 물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황제가 막북에 원정을 갔으나 결국 지금까지도 확실히 이기지 못했으니 버거운 상대임은 틀림없을게요. 그런데 그게 먼터무와 관련이 있소?"
"물론입니다. 작년에 명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막북에 친정을 나섰다가 돌아와서 포고한 조서가 있지 않았습니까?"
"기억나오. 북원 칸의 타이시인 아룩타이를 잡으러 간 원정이었는데 아룩타이는 줄행랑을 쳤고, 계속 추격하다 정찰병을 붙잡아 문초해 보니 이미 다 흩어져 달아났다는 내용이었소. 그래서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다른 북원 무리들을 토벌……."
갑자기 말을 멈춘 이도가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군."
이도가 혼자서만 이해해 버리자 신하들이 어리둥절해 하던 가운데, 허조가 나서서 양녕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명 황제가 직접 군사를 몰고 가자 아룩타이와 그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졌소. 이게 만약 정말로 와해시켜 쫓아 보낸 것이라면 명확히 승리를 거둔 것인데 굳이 동쪽으로 가 다른 북원 세력들을 공격할 필요가 있겠소?"
"과연. 성과를 만들 필요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로군요. 다른 성과가 필요하다는 말은 본 목적인 아룩타이 공격은 실패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조서에 꼭 승전한 것처럼 적은 것은 친정 실패를 조선에 숨기기 위해 그리한 것이군요. 실제로는 아룩타이는 병력을 온존해서 도망친 것이고, 황제는 허탕을 쳤을 뿐만 아니라 북원을 도발만 한 꼴이로군요."
황희도 이해했는지 입을 열었다.
"먼터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알겠습니다. 적이었던 오이라트까지 지원할 정도로 총력을 기울인 원정이었습니다. 황제가 그토록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군사력인 먼터무와 오돌리 부족도 참전했겠지요."
"맞소. 그리고 원정은 대차게 실패했고 북원은 세력을 온존했소. 초원 유목민들의 방식대로 여진족에게 피의 보복을 할 차례고, 더군다나 여진족은 몽골인들에게는 아랫것으로 여겨지던 이들이니 그 보복도 더욱 가혹하겠지. 게다가 하필이면 오돌리 부족 거주지는 요동에서도 북원에 가까운, 그야말로 코앞이라 할 만한 곳이오."
이어진 양녕의 설명을 들은 허조가 양녕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오돌리 부족을 살리기 위해 황제가 직접 지시까지 내려서 원래 살던 곳으로 피신시킨 거로군요. 그럼 양 무타우타라는 놈은 왜 오는 겁니까? 우디거인가 하는 그놈들도 오돌리 부족 일파입니까?"
"그렇지는 않소. 우디거는 산림인이라는 뜻이오. 숲에 사는 여러 부족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니 한 부족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오돌리 부족 일파는 더더욱 아니오."
"그럼 왜 같이 오는 거라 생각하십니까?"
"양 무타우타가 거주했다는 개양 일대 역시 북원과 가깝소. 아마 양 무타우타도 명에게서 관직을 받았고, 이번 원정에도 동행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역시 오돌리 부족처럼 북원의 원한을 사 보복이 두려운 상황일 것이오."
드디어 중신들이 다 양녕의 말을 이해한 것 같자 이도가 내용을 정리했다.
"황제가 친정에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북원의 심기만 긁어서 먼터무를 피신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차마 조선에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오돌리 부족은 이전에 살았던 지역으로 돌려보낸다는 명분으로 돌려보내지만, 두만강 일대에 살았던 적 없는 양 무타우타의 부족은 그럴 명분이 없지. 그래서 오갈 데 없으니 받아달라며 은근슬쩍 오돌리 부족과 붙여서 보내는 것이고."
"그리 보면 지금 상황이 모두 아귀가 맞는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황희의 날카로운 눈이 관모 아래에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