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9화
99화
"형님께서 구주도의 아홉 고을을 일곱 고을로 재편하고 이름도 칠주도로 바꾸신 것을 두고, 구주라는 말이 천자가 다스리는 땅을 가리키는 것이라 저를 두고 참람하게 쓸 수 없어 바꾸신 것이라는 소문은 아시지요?"
"예, 통치에 적합하게 나누다 보니 그리된 것일 뿐인데 그런 소문이 돌았지요."
"또 군현의 제도를 개편하면서 부의 중심이 되는 고을은 목의 읍호를 쓰는데, 목 앞에 오는 이름에 주라는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 전례도 만들어주셨지요."
"주상께서 은연중에 요청하신 것이라 그리했었지요."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궁금한 표정인 양녕을 보고 이도가 재밌다는 듯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형님께서는 부의 중심을 목으로 삼는 제도를 제안하시고, 칠주도 일곱 고을 중에 축자국이 아닌 녹아부를 제외하고서라도 여섯 개나 되는 부마다 목을 설치하셨는데, 그중에서 주라는 글자를 쓴 목이 없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주라는 글자를 쓰지 않는 목의 전례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세 가지가 서로 관련이 있습니까?"
"예, 세상 사람들이 이 셋을 합쳐서 좀 다르게 생각한 듯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다니요?"
"주라는 것은 군주가 다스리는 땅에 붙는 이름이니, 형님께서 봉토를 얻어 축자국을 만드실 때 군주이면서도 고을 이름에 단 하나도 주를 쓰지 않은 것은, 애초에 스스로를 군주감으로 여기지 않으셔서 언젠가 저에게 전부 바치고 명예직으로만 남으시려고 하셨던 것이라는 해석이 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주상께 전부 드리고 명예직으로 남으려던 것은 맞지만, 그걸 고을 이름하고 연결 지은 것은 정말 꿈보다 해몽입니다. 하긴 전례를 만들려고 주상께서 제게 은연중에 요청하셨다는 것은 다른 이들이 알 수가 없으니,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그런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군요."
이도도 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하간에 그런 흐름이 있어서, 석성목을 석주목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이름에 주가 들어가게 되는군요."
"예. 세상 사람들 해석대로면 형님께서 제게 주시고 나서야 비로소 왕이 다스리는 땅으로서 주라는 이름이 쓰이게 된 것이 될 겁니다. 또 이전에는 도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고 대도호부니 도호부니 추가로 더 나눠서 고을의 등급을 정하였는데, 부 아래에 목군현만 있는 것이 되면서 등급의 개수가 줄었습니다. 이것을 보완하려는 목적도 있지요."
"이름에 주가 들어가는 목과 들어가지 않는 목이 있으면 주가 들어가는 목이 더 높은 등급이겠군요."
"맞습니다. 목 앞에는 주가 들어가야 한다는 전통도 어느 정도 살아난 셈이지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현령이 다스리는 현이 현감이 다스리는 현보다 등급이 높은데도 두 종류 현에 이름의 구별이 없었지만 아무 문제 없이 쓰이지 않습니까. 이제 두 종류로 쓰이게 되는 목은 이름의 구별도 있으니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괜찮다 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양녕과 이도 둘 다 사관이 들을까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백성들 사이에 해석이 퍼진 김에 주가 들어가는 목의 제도를 만드는 것에는 다른 의도도 있었다.
해동의 오 태백이라 하여 성인의 재래로까지 여겨지는 양녕이 스스로 군주감이 아니라 생각해 자신의 봉토에 주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백성들 사이에 퍼진 해석이었다.
그런 양녕이 이도에게 축자국을 온전히 바치고 그 뒤에야 비로소 주라는 명칭이 쓰였다면 성인에게 인정받은 이도야말로 진정한 군주가 되는 셈이었다.
이것은 양녕과 이도 두 사람의 위신을 모두 올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왕 씨는 물론 이 씨의 피바람으로 시작한 왕조 초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녹아목 역시 녹주목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녹아 심씨, 이제 녹주 심씨가 되겠군요. 그들에게도 위신을 좀 올려주실 목적이십니까?"
"조선의 충직한 봉신이니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지요."
말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이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차 조선으로 아예 흡수하기 위해 조선의 위신에 기반한 명예를 주어 가며 잘 길들이려는 목적임을 파악한 양녕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칠주도 북쪽에는 석주목을 중심으로 하는 석주부, 남쪽에는 녹주목을 중심으로 하는 녹주부가 생겼군요."
"그렇습니다. 공교롭게도 섬 남북 끝으로 주가 생긴 게 됩니다."
이도의 말에 끄덕인 양녕은 잠시 잊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참, 제가 같이 가져왔던 석탄과 점석회는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석탄은 몇 개 태워 봤는데 형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로 불붙이기는 어려워도 꾸준하고 오래 타더군요. 독한 공기가 나온다 했으니, 사람 쓰는 온돌방에는 써서는 안 된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다른 데에 쓸 연료로는 쓰임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석탄이 북방에서도 나고 영동에서도 날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칠주도에서도 납니다. 조선의 남북에서 모두 석탄이 나는 것인데 그 종류도 다 다르지요. 그렇다면 아직 석탄이 난다는 말이 없는 조선 본토 서부에서도 잘 찾아보면 새로운 성질과 쓰임이 있는 석탄이 나올지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전국의 자원 개발을 시작하게 유도하는 양녕의 말에 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렇겠지요. 연료를 석탄으로 대체한다면 목재로 쓸 수 있는 나무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점석회는 어떠셨습니까?"
"신하들이 잘 믿지 않으려 해서 가져오신 점석회 가루에 물과 자갈, 모래를 섞어 물속에서 단단히 굳어지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굳은 것을 보고 놀라고 잘 깨지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놀라더군요."
"놀랄 만하지요. 그래서 진짜임을 알고 놀란 뒤로는 뭐라 말한 것이 있습니까?"
"이런 것이 진작에 만들어졌다면 도성 성벽을 새로 쌓을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관원인가 보군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도의 질문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성 성벽은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반드시 지나가며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점석회를 굳혀 만든 견고한 성벽을 보게 된다면, 그 기술을 빼내 가려 하거나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조선을 견제하려 들겠지요. 젊어서 그런 것을 잘 모르는 관원이겠거니 싶었습니다."
"맞습니다. 거기다 자갈 섞인 석회로 만들어진 것보다는 큰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왕래하는 왜인이나 여진족들에게도 위엄을 더 살릴 수 있지요."
"아마 성벽 위를 보강해 벽 안에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데에는 쓸만할 것입니다."
"예. 하지만 지금은 어렵지요."
이도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는 각지에서 흉작이며 홍수, 가뭄 등의 재난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벽 보강 공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성벽을 쌓고 주안에 염분을 만드는 것은 끝나서 다행입니다."
"이제 도로를 까는 것만 남았지요. 도성 일대에 동시에 다 깔기로 하면서 땅을 한 번에 다 파 버린 탓에 중단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완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지만, 공사가 끝나고 인부들에게 품삯으로 미곡을 넉넉히 주어 고향에 돌아가게 하면 재해로 기근이 나는 것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화위복이 되면 좋겠습니다. 참 여러모로 큰일이군요."
"예. 그러니 한동안 점석회는 삼척부에서만 만들고 기술을 개발하겠지요. 아마 나중에 재해가 다 수습되고 점석회를 여기저기서 필요로 하면 삼척부의 기술자들을 데려다 쓰면 될 것입니다. 아마 형님께서도 이걸 바라시고 하셨겠지요."
정확히 자신의 의도를 짚는 이도의 말에 양녕이 살짝 놀라며 말했다.
"맞습니다. 역시 주상께서는 통찰이 뛰어나십니다."
"그저 짐작한 것일 뿐인데 맞았다니 기쁩니다."
겸손해하는 이도를 보다 문득 의문이 든 양녕이 조계청 안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그 말에 이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각지에서 흉년이나 홍수 얘기가 올라올 때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으셨는데, 가뭄 소식까지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나서는 많이 심란해하십니다. 빨리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까지 하셨지요."
"마음이 어지러우셔서 산책하러 후원에 가셨나 보군요."
양녕과 이도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유학자들은 미신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자연재해는 군주의 부덕을 하늘이 벌하는 것이라 여기는 인식이 적지 않은 시대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이를 적으로 돌리고, 죽이고, 숙청해 온 이방원에게 온갖 재해가 전국에서 일어나는 것은 상왕으로 물러난 지금도, 어쩌면 아들인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기에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일 것이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거중기에 녹로, 도로, 염전, 점석회처럼 수많은 기술이 만들어졌지만 널리 퍼지기는 고사하고 도성에서만 쓰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백성이 사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정묘한 기계와 뛰어난 기술이라도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보다 절대로 순위가 앞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백성들을 다 구하고 나서야 다시 염분을 개량하고 성을 쌓고 도로를 깔 수 있겠지요. 나라를 이끈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통감합니다."
"언제든 도울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힘닿는 대로 주상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말하며 이도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우려는 듯 작게 미소지었다.
* * *
1423년 4월 중순 모일.
길주부 길주목 관아.
부윤이 급하게 찾는다는 부름을 받은 군교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와 숨을 몰아쉬며 관아 정문을 들어섰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지 부윤은 동헌 앞 마루에 나와 서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헉헉대며 말하는 군교에게 부윤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여기 군교 가운데에서 가장 말을 잘 달린다는 데 사실인가?"
"예?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들 그리 칭찬하고, 자신도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이걸 받게."
부윤이 군교에게 준 것은 밀랍에 도장을 찍어 봉한 작은 문서함이었다.
"이게 뭡니까?"
"조정에 급히 보내야 하는 문서일세. 그러니 이것도 쓰게."
부윤은 그렇게 말하며 둥근 금속패 하나를 꺼내 군교에게 주었다.
"이건 마패 아닙니까? 하나, 둘, 셋, 넷…… 히익! 이걸 제가 써도 됩니까?"
마패를 받아들고 말 숫자를 세다 기겁한 군교에게 부윤이 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 그렇네. 조정에서 일개 군교가 마패를 썼다며 책임을 묻는다면 그 책임은 내가 다 질 테니 걱정 말고 쓰게."
소리는 낮췄지만 여전히 놀라 떨리는 목소리로 군교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러십니까?"
"하긴, 뭔지도 모르는 걸 들려서 보낼 수는 없겠군. 중요성을 알아야 더 서두를 것이고 말이야."
잠시 작게 한숨을 쉬고 생각을 정리한 부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진 오돌리 부족 족장 먼터무가 이쪽으로 돌아온다고 하네. 그것도 명 황제의 지시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