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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98화 (9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8화

98화

"석성부 동부에 평미대라는 넓은 고원이 있습니다. 지천으로 석회암 덩어리들이 굴러다니는 곳이지요. 그리고 석성부 동부는 깊은 산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석탄을 사방에서 캘 수 있는 곳입니다."

호방의 설명에 부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기서도 구울 수 있겠군. 아니, 오히려 거기가 더 조건은 좋겠어. 점석회 만드는 게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고 소석회를 점토에 섞어 다시 구우면 그만이니 기술이 전파되는 것도 금방이겠지."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진 호방이 위로의 말을 꺼냈다.

"그래도 지역별로 나는 석회석의 종류와 점토 성질이 다 다를 것이니 다른 곳에서 만들려면 어느 비율이 가장 적합한지 실험해서 찾아야 하니 시간은 걸릴 겁니다."

부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이 실험이 어디 오래 걸리고 어려웠는가. 바쁘고 어수선했던 여기에서 인력을 겨우 돌려 한 실험이 한 달이 걸리지 않았네. 이미 석탄업으로 부유하고 여유로운 석성부에서 실험한다면 여러 조건을 한 번에 실험해서 더 빨리 찾을 수 있겠지."

"예, 점석회를 필요로 하는 번화한 항구도 칠주도 여러 지역과 본토 남해안에 많이 있으니, 결국 석성부에서 사는 것이 가장 가깝겠지요."

호방이 위로 대신 현실을 말하자 부윤도 끄덕였다.

"석회하고 점토, 연료는 어느 땅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여기와 석성부에서 비슷하게 멀리 떨어진 조선 본토 서부에서도 머지않아 생산되겠지. 결국 삼척부에서 만든 점석회는 인근 지역에다가만 팔 수 있게 될 걸세."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한숨을 쉬려던 부윤이 그 말에 양녕을 돌아보았다. 양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딱 그만큼만 여기 백성들의 활로를 열어 줄 수 있다면 내 이리 서둘러서 기술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오."

양녕의 말에 호방도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석회가 물속에서 굳는 것이 신기해서 다들 구경하러 와서 보고 감탄하느라 주목을 못 받았지만, 물에 넣지 않고 굳힌 것도 단단히 굳어지지 않았는가."

"그렇지요. 굳이 망치로 쳐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물속에서 굳힌 것보다도 단단할 겁니다."

"그럴 것일세. 그리고 이런 걸 필요로 하는 곳이 있지. 바로 동북방일세. 산길을 따라 물자를 나르기가 어려우니 항구를 만들어 수운으로 나르는 것이 더 좋고, 여진족이 소란을 피울 때 방어할 튼튼한 요새가 필요한 곳이지."

"동북방이면 반대로 석성부보다도 여기서 실어나르는 게 훨씬 가깝겠군요."

"그렇네. 게다가 흙을 다져 성벽을 만들면 여진족이 교묘한 수를 써 넘어오고,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자니 그 춥고 척박한 곳에서 인력을 구하고 돌을 떼어와 쌓는 공력이 만만치가 않아. 하지만 점석회로 벽을 만든다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래와 자갈을 쓸 수 있고, 그런 재료를 섞으면 양이 불어나니 운반한 점석회 양보다 큰 벽을 만들 수 있네."

그 말에 옆에서 부윤이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대군께서 북방의 군영에서 석탄을 난방에 쓴다고 하셨으니 동북방에서도 석탄이 나겠지요. 그러면 석성부에서도 석탄과 석회암이 동시에 나고, 여기 삼척에서도 석탄과 석회암이 동시에 나니 동북방이라도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북방에서도 여기서 만드는 것만큼이나 쉽게 구워서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윤의 걱정에 양녕이 피식 웃고 말했다.

"석탄을 캐고 점토 비율을 조정해서 점석회를 구워낼 수 있는 이들이 지금 동북방에 있소?"

"대군께서 여기 오셔서 실험해서 만드신 기술이니, 동북방은 고사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요. 아직은 여기 백성들만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동북방에서 알아서 점석회를 만든다고 하면, 누군가는 석탄을 캐고 선별하는 요령, 점토를 고르는 법, 점석회를 구워 내는 방법을 처음 시작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이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부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이번에는 옆에서 호방이 말했다.

"저희에게 해 주셨던 것처럼 여기 주민들에게도 해 주신 것이로군요. 대군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산을 헐어 바다를 메워 간척하는 것은 천모만을 간척해 갈수록 대마도에서는 쓸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술로 칠주도 곳곳에서 간척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번 돈을 토대로 입지를 살려 항구와 숙박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 데에 큰 고민이 없게 된 덕에 지금 이렇게 다른 이들을 도우러 올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도움을 이번에는 저희가 이어받았군요. 석탄을 캐고 점석회를 만드는 기술이 쉽게 퍼질 것이라고는 하나, 그 퍼지는 동안에는 이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여기 주민들이 중히 쓰일 것이고, 퍼진 다음에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여기서 이미 검증을 거쳐 만든 점석회가 좋은 벌이가 될 것입니다. 여기 백성들이 그것을 종잣돈 삼아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겠지요."

감격한 목소리로 연신 말하던 부윤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는 여기 주민들도 다른 이들을 도우러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아니, 반드시 올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이오."

* * *

1422년 8월 초순 모일.

삼척목, 관아 앞.

점석회 기술이 완성되고 며칠 뒤 아침. 동이 터오고 새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양녕은 관아 앞에서 출발하기 전 빼먹은 것이 없나 마지막으로 점검 중이었다.

"큰 도움을 주신 대군께서 한성부로 돌아가시는데 아무런 잔치를 못 해서 어찌합니까?"

정말로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부윤에게 양녕이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이대로 가면 삼척부의 어려움이 나아지겠다 하는 것이지 아직 다 나아진 상황이 아니지 않소. 그런 상황에서 나 하나를 위해 잔치를 열 수는 없소. 대신 상황이 나아지고 나면 백성들과 잔치를 하고 나에게도 그 소식을 보내 주시오."

"잔치를 열기 전에 대군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하고 나서 소식을 보낸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 소식을 보면 나도 기쁠 것이오. 잔치를 열었고 나와 부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한 것이니 그러면 나도 잔치를 치른 셈 아니겠소?"

"허허허,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무슨 얘기를 하려나 유심히 듣던 부윤과 호방이 농담에 웃자 양녕도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짐이 많으니 늦게까지 먹고 마시고 잔치하면 이들도 지쳐서 산길을 가기 힘들 것이오. 대신 이들은 내 한성부에 도착하면 수고했다고 따로 잔치를 열어 주겠소. 그러니 자네들도 힘내 주게"

마지막 말을 하며 양녕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염전 제작과 석탄채굴, 점석회 제작 등등의 기술을 정리한 책과 과정을 적은 보고서만 큼직한 상자 하나를 채워서 한 사람이 짊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부윤도 다른 짐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무거운 짐이 많으니 대관령 넘을 때 조심하게."

책만 상자 하나로 나올 정도였던 만큼 다른 짐도 많았다. 결과물인 소금 항아리와 먹돌배기에서 캔 석탄 덩어리, 자갈을 섞어 물속에서 굳힌 점석회 덩어리는 물론이고, 소삼판과 낙삼판 몇 장, 삼척부에서 캔 석회석 덩어리에 오십천변 진흙 같은 재료들도 한성부에 돌아가 조정에 설명하기 위해 전부 챙긴 것이다.

"여전히 바쁠 텐데 짐 나르는 데에 일손을 쓰는 게 좀 걸리는구려."

"괜찮습니다. 공납 소금 나르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많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짐 드는 건 대부분 대마현 청년이고, 여기 청년 몇몇이 길 안내역으로 갈 뿐이지 않습니까. 이곳 일손이 모자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호방 자네도 마무리 잘해 주게."

"물론입니다."

"이제 대군께서 떠나시면 제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볼까 말까 하겠군요."

"괜찮소. 부윤께서는 곧 나라에서 중히 쓰이실 만한 분이니 한성부에서 계속 볼 수 있을 것이오."

양녕의 말에 부윤이 허허 웃고 말했다.

"수령으로서 부족해서 대군께 도움까지 받은 이 중늙은이를 그리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하연, 대군의 덕담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나야말로 그간 고마웠소. 그럼 이만 가보겠소."

"예, 살펴 가십시오."

삼척부윤 하연의 인사를 받으며 양녕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뒤.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그간 삼척부윤이 올린 장계는 모두 다 읽어 보았습니다. 소금 만드는 기술로 염간들의 괴로움을 줄여 주신 것은 물론이고, 다른 기술들까지 만드셔서 삼척부 백성들의 살길까지 터주시고 나아가 온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셨으니, 형님께서 제 부탁을 몇 곱절로 들어주신 셈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도의 칭찬에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상께서 저를 삼척에 보내셨고, 또 삼척에서 천운이 따라 석탄을 발견해 이룬 일입니다. 이게 다 주상께서 백성을 지극히 아끼시는 마음에 하늘이 감읍하셔서 이룬 것이니 주상의 덕이지요."

"과찬이십니다. 참, 군현에 관해서 몇 가지 형님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번에 대마현 백성들이 삯도 받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로 진심으로 삼척부를 도우려 했고, 그 성과도 컸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아마 대마현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오래 걸리거나 이루지 못했을 일이 많았습니다."

"예. 그래서 그 공로를 치하하고자 대마현의 읍호를 대마군으로 바꾸려 합니다."

군현의 등급은 기본적으로 중요도나 인구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지만, 공로가 크면 올라가고 중범죄가 일어나면 내려가는 등 상벌과도 연관이 있었다. 즉 이도는 대마현이 그렇게 고을의 등급이 올라갈 정도의 공로를 세웠다고 인정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마현 주민들은 물론이고 도움을 받은 삼척부 주민들도 기뻐할 겁니다."

"그리고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군현에 관해서 몇 가지 이르실 게 있다고 했었지요. 이번엔 무엇입니까?"

"칠주도 군현들의 읍호도 몇 곳 바꾸고자 합니다."

양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짚이는 것이 있는지 바로 대답했다.

"석성목의 이름을 바꾸시려는가 보군요."

호서지역 공주부에는 이미 석성목과 같은 한자를 쓰는 석성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그 두 고을이 지금 조선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같은 군현이었다.

"맞습니다. 형님을 후작에 봉한 것도 그렇고, 인뉴가 거북이로 된 도장을 내린 것도 모두 조선이 축자국이라는 번국을 거느린 나라임을 보여 위신을 세우려는 목적이었지요."

"번국은 본국이 아니니 이름이 겹쳤다고 바꿀 이유도 없고, 오히려 이름이 같은 고을이 있는 쪽이 번국임을 명확히 드러내기도 하지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고을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 그런데 이전까지는 괜찮았는데 형님께서 돌아오시면서 축자후가 거의 명예직에 가깝게 되고, 축자국 고을들의 지방관을 조정에서 바로 보내게 되니 이름이 같아서 헷갈리는 경우가 더러 생겨서 말입니다."

'그냥 바로 고을 이름을 바꾸면 명예직이나마 축자후인 내 기분이 상할까 봐 물어보신 게로군."

이도가 조심스럽게 물어본 이유를 알게 된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석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가장 큰 이유는 패가대니 박다니 하는 과분한 원래 이름을 버리고 별칭을 끌어 쓴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칠주도가 조선과 다른 나라라는 정체성이 생기지 않고 조선에 잘 합쳐지는 것이 제가 바라던 것이었으니, 만약 주상께서 석성목의 이름을 계속 두셨더라도 제가 언젠가 건의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양녕의 대답을 듣고 안심한 이도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실 이렇게 고을 이름을 바꾸면 형님 위신에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습니다."

"더 도움이 되다니요?"

궁금해하는 양녕을 앞에 두고, 이도는 형에게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려는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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