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6화
96화
단호한 양녕의 말에 부윤은 조금 어리둥절한 듯 했다.
"다 피워진 소석회에 진흙을 섞는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왜 그러시오?"
"무덤을 만들 때 관곽과 땅 사이에 소석회에 모래 섞은 것을 채워 굳히거나, 소석회를 벽에 발라 회칠할 때 여물을 섞어 잘 갈라지지 않게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진흙을 섞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조선은 왕조 내내 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나라였으니 전례가 없는 기술을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례를 어떻게든 끌어올 수 있다면, 정통성과 명분에 힘입어 더 기술의 채택과 보급을 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녕은 여기 쓸 만한 전례를 이미 떠올려 둔 것이 있었다.
"주자께서 가례에 이르시길, 석회란 모래를 얻으면 견고해지고 흙을 얻으면 찐득해지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굳어져서 돌이 된다고 하셨지 않소. 모래와 섞는 방법은 조금 전 부윤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널리 쓰이지만, 흙과 섞는 방법은 잘 쓰이지 않아서 그것이 과연 어떤지 확인해 보고 이롭다면 널리 써 보고자 하는 것이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이기에 그 누구도 토 달 수 없는, 주자가례라는 강력한 전례에 부윤도 일단은 수긍한 듯했다.
"저도 스승님께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묘를 만드는 방법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석회에 모래와 흙을 섞어 건축재료인 회삼물을 만드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맞소. 하지만 주자께서 모래와 흙을 동시에 모두 얻어야 견고하고 찐득해진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설명하셨지 않소. 흙을 빼고 모래만 더해 단단함만을 취한 것이 지금 여러 곳에 쓰이고 있으니, 모래를 빼고 흙만 더해 찐득함만을 취한 것도 세상에 쓸모가 있지 않겠소?"
하지만 부윤은 뼈대 있는 학통을 이은 선비답게 전례와 명분만이 아니라 실리 측면에서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흙만 더한 것을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있어서만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오. 쓰이는 방법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 석탄을 구워 소석탄을 만드는 법도, 염초 적신 끈으로 부시끈을 만드는 법도, 깃털로 붓을 만드는 법도 하나같이 일찍이 천하에 없던 기술이지만 만들어 내고 나니 여러 쓰임이 있지 않소?"
결국 양녕도 비장의 패로 자신이 만들어 보급한 기술들을 거론했다. 논리적으로는 조금 벗어날지 몰라도, 많은 선비들에게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권위를 들고나와 써먹은 것이다.
"그건 대군 말씀대로입니다. 지금 삼척부 백성들만 해도 대군께서 만드신 부시끈이나 역취화로 같은 것을 아주 잘 쓰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부윤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흙만 쓴다면 문제가 있을 수도 있소. 그래서 그냥 섞어 쓰지 않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것이오."
덧붙인 양녕의 말에 부윤은 설득된 듯 했다. 당장에 지금 자신의 임지인 삼척부가 양녕이 이번에 새로 만든 염전 기술 덕분에 여러 문제가 해결되는 중이었고, 양녕이 그 기술을 만들고 적용해 성과를 내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시도해보실 생각이십니까?"
"소석회를 진흙과 잘 섞은 다음 여러 덩어리로 만들어 다시 가마에 넣고 구울 것이오."
그 말에 부윤은 다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미 구워서 피워낸 소석회를 다시 굽는단 말씀입니까?"
"원래 석회라는 것이 구우면 성질이 달라지는 것이오. 이미 구워서 피우기까지 한 소석회라고 하나 진흙과 섞여 그 성질이 찐득해졌으니, 그걸 다시 구우면 또 성질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않소?"
이미 알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시 말을 무를 수도 없었던 탓에, 부윤은 여전히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만들어진 생석회를 부수고 물을 부어 피워 소석회를 만들고, 그 소석회에 진흙을 넣고 잘 반죽해서 다시 굽겠습니다. 맞지요?"
혹시나 싶어 다시 확인했지만 양녕은 오히려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렇소. 진흙과 소석회 둘 다 물기가 있는 재료이니 굽는 온도는 최대한 높게 하고, 진흙과 소석회를 섞는 비율은 덩어리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서 구워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 구워져 나온 것을 다시 가루로 잘 부수고, 배합 비율이 다른 가루끼리 섞이지 않게 잘 분류까지 한 다음 내게 알려주시오."
양녕이 실험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말하자 부윤은 양녕을 믿어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양이 많지 않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분류를 마치고 알려드릴 때까지라도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군께서 여기 오시고 계속 신경 쓰신 일이 많아 제대로 못 쉬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그러면 좋겠지만 여전히 할 게 있소. 여기 온 뒤로 만들어 낸 기술들을 문서로 정리해 조정에 보내기도 해야 하고, 주안과 연안의 염분 건설 상황은 어떤지 멀리서나마 파악하고 제안할 게 있으면 해야 하오. 그리고 그게 다 끝나면 먹돌배기 일대에서 여기까지 석탄을 옮겨올 길 만드는 것도 살피고 감독해야 하고 말이오."
그 말에 부윤은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대군께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시는 것이 실로 종사를 이롭게 하고 만인의 모범이 되는 일이니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하지만 중간중간에라도 쉬셔야 합니다. 대군께서 편찮아지시기라도 하시면 걱정하고 슬퍼할 이들이 많습니다."
원래 역사의 패륜 난봉꾼 양녕대군이었다면 절대로 들을 일 없었을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고 말했다.
"고맙소. 내 건강도 살펴 가며 하겠소. 참, 석회에 관한 앞으로의 작업은 여기 청년들과 사내아이들 가운데서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이들을 뽑아 같이 작업하시오."
"알겠습니다. 대마현 청년들이 떠나고 나서도 삼척부에 기술자가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기술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작은 섬인 대마도보다도, 좋은 석회가 풍부하고 오십천에는 진흙이 가득한 여기 백성들이 가장 잘 쓸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하나 더, 석회라는 것이 피울 때 열이 심하게 나고 사방으로 튀기도 하니 혹여라도 작업하다 다치는 이들이 없게만 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양녕은 이번에는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호방에게 말했다.
"자네도 다치는 이가 나오지 않게 신경 써 주게."
호방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품삯 받는 값은 제대로 해야지요."
* * *
다음 날.
삼척목 관아.
이른 아침부터 산에 올라 먹돌배기와 산 아래를 잇는 길을 만드는 현장을 살펴본 양녕이 동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을 훨씬 지나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군. 길 만드는 공사 상황은 어떻습니까?"
"큰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지게를 지고 오갈 만한 길로 처음부터 목표를 잡은 덕인지 순조롭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다행입니다."
"혹시 조정에서 뭔가 온 건 없었소?"
"안 그래도 오전에 한성부에서 문서가 왔습니다. 받는 대상이 삼척부윤으로 되어 있어서 제가 열어 읽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대군께서 보내셨던 내용에 대한 답변도 겸해서 내용을 합쳐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어떤 내용이오?"
양녕의 질문에 부윤이 조정에서 온 문서를 양녕 쪽으로 펼쳐놓고 말했다.
"주안에 새로 만든 염분이 시험 삼아 만든 것임에도 소금이 제법 생산된다 합니다. 조정을 포함해서 한성부 일대에 당장 필요한 양의 소금은 주안 염분에서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올해는 삼척부의 소금 공납을 면제한다는 하교였습니다. 그래서 영동지방과 안동부에 필요한 소금만 만들면 충분할 것이니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펴 가며 생산하라는 지시도 덧붙어있었습니다."
부윤의 설명을 들으며 하교 문서를 읽어내려간 양녕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상께서 염간들의 괴로움을 엄청나게 마음 아파하셨소. 급히 나를 보내신 것도 그 때문이었지. 이제 주상은 물론이고 부윤께서도 한시름 더셨겠구려."
"다 대군 덕분입니다. 삼척부의 소금 생산을 쉽고 많게 해주신 것도 대군이시고, 주안에 염분을 만들게 해 조정과 한성부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게 하신 것도 대군이시지 않습니까. 이제 앞으로 생산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테니 두고두고 했을 고생이 아예 없어졌습니다. 대군께서 하신 일이 실로 성인의 행적과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행한 것이 아니라, 주상께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내리신 분부를 따른 것이니 어찌 성인과 같겠소. 그리고 나는 방향만 잡았을 뿐이오. 나머지는 부윤과 호방, 한성부 의염색 관원들이 애써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소."
겸손히 칭찬을 돌려주는 양녕의 말에 부윤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목민관으로서 제 임지의 일도 해결하지 못해 조정에 도움을 요청했던 이 못난 이를 추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대군께서 지시하신 대로 소석회에 점토를 섞어 구운 다음 가루로 만드는 것까지 끝났다 합니다."
"결과가 잘 나왔으면 좋겠군. 어서 가서 봅시다."
* * *
한참 뒤.
삼척목 북부. 석회석 산지 인근.
"석회 가루다 보니 자루에 담으면 새어 버릴 수 있어서 빈 항아리를 최대한 모아서 담았습니다. 큰 항아리가 없어서 여러 항아리에 나눠 담은 대신 섞이지 않게 어떤 배합 비율로 만든 것인지를 목간에 써서 항아리 목에 걸어 두었습니다."
부윤의 설명을 들으며 항아리들을 살피던 양녕이 말했다.
"항아리 숫자는 많지만 막상 목간을 읽어 보니 배합 비율 종류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소."
"예, 처음부터 너무 조건을 세세하게 나눠서 하면 실험하기도 힘들고 제대로 결과를 파악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넷으로 줄였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결과를 보고 가장 좋게 만들어진 것의 비율을 기준으로 삼아 점점 조건을 좁혀가면 최적의 비율을 찾을 수 있겠지."
"예. 그리고 적어도 소석회와 점토를 섞어 구워서 이 석회를 만드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석회를 부윤이 모호하게 가리키는 것을 들은 양녕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존에 있던 석회는 생석회와 소석회로 구분해서 이름을 붙였는데, 새로 만든 이 석회는 이름이 없구려. 점토와 섞어 만들었으니 점석회가 어떻겠소?"
"점석회라……. 주자가례의 설명에서 석회가 흙을 얻어 찐득해진다 할 때도 점토의 점 자를 썼지요. 그 한자를 그대로 쓰는 것이니 옛 법도에도 맞는 좋은 이름입니다."
"좋소. 그럼 이 배합 비율 따라 넷으로 나눈 점석회 가루 양을 보아하니, 물을 더해서 반죽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비율 하나당 사방 한 자짜리 덩어리를 최소 다섯 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사방 한 자짜리 나무 틀을 만들어 거기 부어 굳히면 균일하게 만들 수 있겠군요. 각 덩어리 조건은 어떻게 다르게 만들까요?"
"하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하니 물로 반죽한 점석회에 모래만 섞어 굳히고, 다음 것은 모래에 더해 자갈도 섞어 굳히시오."
자갈을 섞으라는 양녕의 지시에 부윤이 놀라 되물었다.
"자갈을 말입니까? 모래알은 작아서 석회하고 들러붙어 굳어지겠지만, 자갈은 그러기에는 너무 크지 않습니까?"
부윤은 소석회에 점토를 섞으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미심쩍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참 설득을 해야 실험 비슷한 것이라도 할 수 있겠군.'
양녕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