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5화
95화
삼척목 서남부 산간.
산골에 석탄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양녕은 그 길로 부윤과 호방은 물론이고, 대마현 청년과 삼척목 청년 일부까지 데리고 발견지로 향했다.
"엄청나게도 깊이 들어와야 하는군요. 오십천만 잘 따라서 오면 길 잃을 걱정은 크게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이구야……."
그 말을 마치고 부윤이 허리를 굽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목사 겸 부윤이라고 해도 그 넓은 면적이 거의 다 산지인 삼척목을 전부 다녀봤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 초행길에 기운이 빠진 것이다.
화전민으로 살 때나 대마도에서나 산지에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 덕분인지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 호방이 그 옆에서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검은 돌들이 가득 있군요. 이게 정말로 다 석탄일까요?"
"확인해 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 큰 걸 하나 가져와서 쪼개라!"
양녕의 호령에 청년 몇이 그 근처에서 가장 큼직한 검은 돌을 가져와 내려놓고, 다른 청년이 망치를 높이 들었다가 내리쳤다. 돌이 경쾌하게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이 다가와 둥글게 둘러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겉은 비바람을 맞은 탓인지 그냥 검은 돌 같았지만, 안쪽을 깨서 단면을 보니 새까만 것이 정말로 석탄을 닮았군요."
"하나 더 확인해보면 확실할 걸세. 여기에 돌을 둥글게 쌓아놓고, 태울 만한 것을 가져오게."
양녕의 지시에 청년들이 돌을 둥글게 쌓고, 삭정이 몇 개를 꺾어와 그 안에 놓았다. 거기 다가가 쪼그려 앉은 양녕이 허리띠에 걸려 있던 놋쇠 발화통을 켜 삭정이 관솔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불이 퍼져 작은 모닥불이 만들어지자 조금 전 깨진 돌 조각 몇 개를 집어 그 위로 던져넣었다.
"약간 흰색으로 변한 것 같긴 한데, 불 속이라 잘은 모르겠군요."
부윤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끄덕인 양녕이 적당한 나뭇가지를 들고 돌 조각을 굴려 둥글게 쌓은 돌 바깥으로 밀어냈다. 맨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은 천천히 흰색으로 변해 가며 계속 타고 있었다.
"석탄 맞군."
자리에서 일어나며 툭 던지듯 꺼낸 양녕의 한마디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그중에서도 석탄을 옮겨오고 다뤘던 청년들이 한마디씩 했다.
"저희가 석탄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거랑은 달랐습니다."
"예. 게다가 이건 연기가 하나도 안 납니다."
"종류가 달라서 그렇네. 조선 본토에서 나는 석탄은 칠주도에서 나는 것에 비해 좀 더 광택이 있고 태울 때 연기가 나지 않네. 하지만 석탄인 것은 같아. 굳이 구분해서 부르자면 연기가 없으니 무연탄이라 불러야겠지."
양녕의 설명에 호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무연탄으로도 소석탄을 구울 수 있습니까?"
양녕이 고개를 젓고 말했다.
"무연탄으로는 못 굽네. 찰기가 부족해서 아마 구우려고 해도 바스러져 버릴 게야. 조선에서 이걸 쓰는 건 북방의 군영에서 진흙과 섞어 굳힌 다음 난방하거나 밥 짓는 데에나 쓰는 정도일세."
"연기가 나지 않아 위치나 밥 짓는 규모를 알 수 없으니 군영에서 쓰기에는 제격이군요. 하지만 소석탄을 구울 수 없다면 제철용으로는 못 쓰겠습니다."
"제법 괜찮은 화력으로 꾸준하게 오래 탄다는 장점은 있네. 하지만 불을 붙이는 게 약간 오래 걸리고, 잘못 태우면 독한 공기가 나오는 탓에 닫힌 공간에서 섣불리 태웠다가는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어."
설명을 듣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호방과는 반대로, 부윤은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 듯 말했다.
"단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유용히 쓰일 수도 있겠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독한 공기가 나온다면 집 안에서 쓰기에는 위험하네. 하지만 바닷물 끓이는 솥은 어차피 밖에 놓고 쓰지 않는가. 화력이 꾸준하게 오래간다면 오랫동안 끓이는 데에도 적격이지."
부윤의 말을 이해했는지 호방이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소금 만들 연료는 계속 필요하지만, 칠주도에서 계속 석탄을 사 와서 쓰기는 어렵겠지요. 여기 석탄이 풍부하다면 장작 하러 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겠습니다."
"그렇네. 그냥 캐서 쓸 수 있다면 멀리까지 가 나무를 베고 옮겨와 쪼개서 말리고 하는 수고를 다 덜 수 있어. 대신 문제는 그만큼 석탄량이 되는가와, 석탄을 산에서 캐서 내려가는 게 과연 장작을 하는 수고보다 덜한가이지.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장작 하는 것보다 낫다면 석탄을 캐서 쓰는 게 훨씬 나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양녕이 말했다.
"양이 되는가는 걱정할 필요 없소. 석탄은 본래 땅속에 있는 것인데 이렇게 밖으로 드러나 있다면, 그 양이 엄청 많아서 그런 것 아니겠소."
"하긴 석성부 일대도 이렇게 밖으로 나온 석탄이 있어 찾아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많이 묻혀 있던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맞아. 여기도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다 쓰고 나면 땅을 파고 들어가서 캐내어야겠지만, 적어도 양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걸세."
지금 처음 와본 것은 부윤이나 호방과 마찬가지지만 양녕이 매장량을 호언장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삼척 관아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온 것은 확실하다. 삼척 서남부 산간의 석탄 산출지라면 여기가 바로 원래 역사의 태백시에 해당하는 지역이겠지. 한반도 남부 최대의 탄전지대인 만큼 석탄 매장량은 걱정할 필요 없다. 오히려 무작정 사방을 탐사해서 찾을 필요 없이 이렇게 염간의 말 한마디로 노천에 드러난 광맥을 통해 태백탄전을 찾았으니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일이다.'
"대군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양은 걱정할 건 없겠지요. 그럼 이제 산에서 캐고 옮기는 수고가 문제로군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에게 요청할 게 있네."
"무엇입니까?"
"자네들이 삯을 받고 하기로 한 만큼의 일을 할 때가 왔네."
양녕의 말에 호방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드디어 때가 됐군요. 어떤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여기서 석탄을 캐서 아래로 옮길 때 쓸 길을 만들어 주게. 여기서 오십천이 나올 때까지는 산길을 다듬고, 오십천 중상류쯤부터는 수심이나 수량을 따져서 배나 뗏목으로 나를 수 있을 것 같은 구간부터는 하천을 정비하면 될 것이야."
양녕의 지시에 부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석탄을 짊어지고 육로로 산을 내려가는 것보다는 수로로 옮기는 것이 당연히 낫겠지만, 대군께서도 올라오시면서 보신 것처럼 오십천은 그 강줄기가 오십 굽이를 넘게 휘어진다 해서 오십천입니다. 정비한다고 해도 무언가를 나르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정 연료로 쓸 석탄이 필요하다면 칠주도에서 저희가 사 와서 팔아도 됩니다. 소금만 충분히 생산된다면 대금은 소금으로 받으면 되고요. 어차피 저희가 사 오는 것도 소석탄을 못 구울 품질인 석탄인 것은 똑같고, 독한 공기가 나오나 연기가 나오나 어차피 밖에서 바닷물 끓이는 데에는 문제 되지 않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조금 전 같이 산길을 걸어 올라왔던 부윤과 호방이 만류하듯 말했지만, 양녕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정 육로나 수로로 많이 옮기게 만들기가 어렵다면, 적어도 석탄 자루 하나를 지게에 지고 내려가는 데 지장 없을 정도의 길만이라도 내주게. 그 정도면 소금을 생산하지 않는 시기의 염간이나, 염간 아닌 이들이 부업 삼아 석탄을 캐서 팔러 오가는 정도에는 충분할 것이야."
"대군께서 그리 강경히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유가 있겠지요. 그 정도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으니 군소리 않고 길을 만들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하나만 더 해주게."
호방이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양녕은 부윤을 향해 말했다.
"저번에 삼척에서는 좋은 석회가 많이 난다고 하셨지 않소?"
"예, 했었지요."
"지금 바로 거기로 안내해 주시오."
이어서 호방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그 석회석을 구울 가마를 만들어 주게."
* * *
한참 후.
삼척목 북부. 석회석 산지 인근.
가마를 급하게 짓고 석회석을 캐오는 일이 제법 시간을 잡아먹은 덕분에, 7월의 긴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서야 석회석 굽기가 끝나 가마를 열어 내용물을 꺼낼 수 있었다.
"가지고 내려온 무연탄 절반은 성능 확인 차 바닷물 끓이기에 쓰고, 남은 반만 석회 굽는 데에 써서 양이 부족할까 걱정되긴 했는데 다행히 충분했소."
"예. 그래도 구덩이에 석회석을 넣고 그 위에 모닥불을 피워 굽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가마로 구워도 연료가 제법 들긴 하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혹시라도 연료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서든 석탄을 구해 올 것이니 너무 걱정은 마시오."
양녕은 별 의도 없이 한 말이었지만 부윤은 화들짝 놀라더니 당황해서 말했다.
"대군을 책망하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대군께서는 여기 오셔서 지금까지 계속 연료를 아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원래 있던 연료가 아니라 오늘 새로 쉬이 얻게 된 것이라고는 하나, 제법 양이 되는 연료를 소금 만드는 것 외의 용도로 쓰셨다는 게 의외라서 그리 말한 것입니다."
"나도 부윤더러 뭐라 하는 의도로 한 대답은 아니었으니 안심하시오."
피식 웃으며 부윤을 안심시킨 양녕이 말을 이었다.
"석회석을 몇 번 굽는 정도로는 연료가 그리 많이 들지 않아서 하는 것이오. 토판을 구우려 한다면 이런 크기의 가마로 십수 번은 구워야 증발지에 다 깔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연료를 들여 구워도 잘 구워질지, 구워진 토판이 제구실을 할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 않소."
"그건 그렇지요. 대마현 청년들은 물론이고, 여기 주민들도 석회는 가끔 구워 봤어도 토판을 구워 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렇소. 하지만 이건 실험 목적으로 해 보는 것이니 그리 많이 굽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 장담도 할 수 있소."
"그 정도로 확신하십니까?"
"그렇소."
오늘따라 장담하고 확신하는 일이 많은 양녕과 그런 양녕을 신기한 시선으로 보던 부윤에게, 가마 상황을 살피던 호방이 말을 걸었다.
"구운 석회석을 다 꺼낸 모양입니다."
"좋아. 그럼 이제 부숴서 가루로 만들 차례지만…… 거의 해가 넘어갔으니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내일 해야겠군."
"예,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부숴두라 하겠습니다."
호방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양녕이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피우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석회라 부르니 구분이 힘들구려. 아무래도 이름을 나눠서 부르는 게 좋겠소."
"이름이 있으면 좋지요. 어떤 이름을 붙이시고자 하십니까?"
"석회석을 구워서 부수어만 놓은 것은 물이 닿으면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과 같으니 생석회라고 하고, 거기에 물을 붓고 피워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은 그 생생함이 다한 것이니 소석회라 하여 구분하면 어떻겠소?"
"구워서 보관하는 가루 상태가 생석회, 거기에 반응하지 않을 때까지 물을 부어 피워내어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는 것이 소석회로군요. 복잡하지 않고 좋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하나 물어볼 게 있소. 저번에 처음 증발지 바닥을 만들 때 썼던 개흙에 가까운 진흙은 어디서 구했소? 혹시 아직 남아 있소?"
양녕이 이미 증발지 바닥에 깔았다 실패했던 재료를 다시 찾자 부윤은 조금 궁금한 눈치였다.
"오십천변에 넓게 깔려 있던 고운 흙을 모아 온 거라 아직도 엄청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찾으십니까?"
"만들어진 생석회를 다 부수는 대로 바로 물을 부어 피워 소석회로 만들고, 남은 인력은 거기 가서 진흙을 모아 오게 하시오. 그런 다음 그 둘을 섞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