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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93화 (9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3화

93화

1422년 7월 초순 모일.

삼척목. 염분 일대.

"돌려 보게."

양녕의 지시에 대마현에서 온 청년들이 방금 막 조립한 나선양수기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바다에 들어가 있는 나선양수기 한쪽 끝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른 바닷물은 이윽고 반대쪽 끝으로 넘쳐 나와, 그 아래에 대놓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렸다. 항아리를 가져왔던 염간이 그 장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말했다.

"그냥 돌리기만 했는데 물이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참 신기합니다. 이런 게 있으면 항아리에 물을 담으려고 발 시리게 물속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파도에 발이 쓸려 자빠질 일도 없겠습니다."

염간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옆에서 대마현 호방이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 배에 싣고 오는 동안 문제는 없었나 봅니다. 조립하자마자 이렇게 잘 작동하는 걸 보니 딱히 손 볼 곳은 없겠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장작 구하러 다니는 일손에 더해서 물 뜨는 일손도 줄일 수 있겠군."

호방과 양녕의 그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벌써 바닷물은 항아리를 가득 채워 찰랑거렸다. 그 항아리를 번쩍 들어 옮기는 염간의 뒷모습을 보던 삼척부 부윤도 입을 열었다.

"역취화로를 추가로 만들어 이번에 호방이 가져온 솥도 모두 걸었습니다. 이제 장작 구하고 물 뜨던 일손을 돌려 바닷물만 열심히 끓이면 되겠습니다."

"소금 생산은 충분할 것 같소?"

"예. 이 속도로 생산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주안과 연안에 만들어지는 염분 개선이 잘 되어서 공납으로 보내야 하는 소금까지 줄어든다면 더 나아지겠지요."

"부윤께서 그리 예측하신다면 맞겠지. 다행이오. 그럼 일단 이 나선양수기는 저들이 쓰게 두고, 나머지를 더 설치하기 전에 바닷물 담을 저수지를 만들어야겠소. 그다음 나선양수기들을 바닷가에 설치하고 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저수지까지 연결할 계획이오."

"그럼 나선양수기를 돌리면 물이 바로 저수지로 들어가겠군요."

부윤이 양녕의 말에 끄덕이는데 옆에서 호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말씀입니다만, 굳이 바닷물 모아 두는 곳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얘긴가?"

양녕의 질문에 호방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조선 본토와 칠주도를 오가는 이들이 대마도를 경유해 간다는 이야기는 저번에 드렸지요. 그들 가운데 서해안에 접한 고을 출신이 있으면 열에 아홉은 천모만 간척에 관심을 보입니다."

"서해안에 접한 고을들도 간척이 활발하니 그럴만하지."

"예. 그래서 그런 이들이 묵어가는 날이면 섬사람들과 여럿이 모여 간척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다른 고을이 어떤 곳인지도 듣곤 합니다. 들은 바로는 서해안을 밀물에 덮이고 썰물에 드러나는 뻘밭의 넓이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간신히 보일 정도고, 물이 차고 빠지는 높이도 몇 길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화전민으로 산에서만 살다 대마도로 간 대마현 주민들에게 서해안은 가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풍문으로 들은 것치고는 비교적 정확한 내용이었다.

"몇 길까지는 아니더라도 차이가 큰 곳은 두세 길은 된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게 저수지와 관련이 있는가?"

"예. 그런 곳이라면 염전에 물을 채우려 할 때가 하필 썰물이라면 뻘밭을 지나 바다까지 가서 물을 떠 와야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바닷물 가두는 곳을 미리 만들어두고 밀물 때 채워 두어야 썰물 때에도 염전으로 바닷물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맞네. 수초나 티끌 같은 것을 한번 가라앉힌 다음 염전으로 보내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고, 바닷물을 보관해두고 쓰려는 주목적으로 저수지를 만드는 것일세."

"그렇다면 동해안에서는 저수지가 없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마도도 그렇지만 여기 삼척도 아무리 밀물이 크게 들어 봐야 썰물 때보다 물이 한 자 넘게 차면 많이 찬 것 아닙니까."

옆에서 같이 설명을 듣던 부윤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굳이 저수지를 만들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나선양수기로 바닷물을 끌어 올려도 되지 않느냐 하는 게로군."

"예. 나선양수기가 파도에 상하는 것을 막거나, 조금 전 대군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초나 티끌을 걸러야 한다면 바다에서 수로로 이어진 큰 웅덩이를 파고 거기 양수기를 설치해도 될 것입니다."

"수로 입구에 큰 돌을 쌓거나, 발 같은 것으로 막으면 파도도 막고 이물질을 걸러내기도 좋을 것 같네. 대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양녕은 짧게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네. 내가 채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 주었어. 서해안과 동해안의 상황이 다른데 굳이 똑같이 다 만들 필요는 없지. 필요하지만 없는 것은 만들어야 하겠지만, 필요 없는 것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는 법이니 말이야. 그리하도록 하지."

양녕의 승낙에 호방과 부윤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군."

"그러면 저수지 만들 인력과 시간, 물자, 장소를 다 아낄 수 있겠군요."

"그런 셈이오. 그럼 저수지는 건너뛰고 바로 증발지를 만들도록 합시다."

"증발지는 어떤 식으로 만드실 계획입니까?"

호방의 질문에 양녕은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는지 바로 대답했다.

"맨 처음 바닷물이 들어가는 1차 증발지는 주변보다 꽤 높게 만들고, 2차, 3차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낮게 만들 생각이오. 증발지 사방을 막은 나무틀 중간을 뚫고 평소에는 나무 칸막이로 막아 두었다가, 전 칸에서 충분히 바닷물이 증발해 짜게 되었다 싶으면 칸막이를 열어 다음 칸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만들면 물을 옮기는 일손은 많이 들지 않겠군요."

"제 생각에도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그럼 전체적인 구조는 이렇게 만들기로 하고, 1차 증발지를 어떻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지는 여러 가지로 실험해서 결정하도록 하지."

* * *

며칠 뒤.

삼척목. 염분 일대.

며칠 전 만들어 바닷물을 채워 두었던 1차 증발지를 내려다보던 양녕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래서는 실험도 되지 않겠군."

조건을 조금씩 다르게 해 1차 증발지 실험용으로 총 세 칸을 만들어 바닷물을 채워 두었었는데, 지금은 세 칸 모두 물은 바닥에나 겨우 남아 있었다.

양녕 옆에 서 있던 호방이 쪼그려 앉아 증발지를 가까이서 살펴보더니 물에 손을 담갔다가 빼고는 입에 넣어 보았다. 바로 몸서리치더니 다시 일어서서 말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해 봤지만, 물이 증발해서 바닥에 소금기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닷물이 원래보다 짜게 졸아든 것도 아닙니다."

"그럼 역시 땅속으로 거의 다 스며들어 버린 것이겠군."

"큰일입니다. 그나마 이 근처에서 가장 개흙에 가까운 흙들을 모아서 만든 것인데, 다른 흙과 섞어서 깐 칸은 물론이고 원래 흙을 그대로 써서 만든 칸조차 며칠 사이에 이렇게 물이 다 땅속으로 스며 버린다면 염전 구실을 못 하지 않겠습니까."

양녕과 호방이 얘기하는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증발지를 내려다보던 부윤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석회를 쓰면 어떻겠습니까?"

"석회를 말이오?"

"예. 삼척에서는 곳곳에서 좋은 석회석이 납니다. 이걸 굽고 피워 소석회를 만든 다음 모래와 섞어 다져 바닥을 만들고 굳히면 물이 안 새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본 양녕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만들면 튼튼하고 물도 새지 않겠지만, 염전에 필요한 것은 그냥 바닥이 아니라 먹는 소금을 만들 바닥이오. 사람 입에 들어갈 것인데 석회가 섞이면 안 되지. 게다가 막 만든 석회에 물이 닿으면 그 물은 살갗을 상하게 하는 독성을 띠니, 일하는 이들이 다칠 수 있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녕이 진지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없는 개흙을 만들 수는 없으니 그건 제외하고……. 주안에 실험용 염전을 만들 때 여유가 되면 실험해 보라 말하고 온 것 중에 질그릇이나 오지그릇 만들 듯 납작한 토판을 구워 까는 것이 있긴 했소."

"그릇처럼 만든 것을 깔았으니 물이 새지 않겠군요. 그럼 토판을 구워서 깔면 되지 않겠습니까?"

"토판을 만들려면 먼저 토판을 구울 가마와 토판을 만들 흙이 있어야 하오. 최대한 물이 덜 새게 오지그릇처럼 만들 거라면 잿물도 있어야 하고, 이 일을 할 인력과 구울 때 쓸 연료도 필요하지."

양녕이 쭉 열거한 필요조건을 들은 호방이 옆에서 말했다.

"잿물이야 지금까지 나무 장작 태우고 나온 것을 비료로 쓰려고 모아 둔 것이 있으니 그걸 쓰면 된다 치고, 가마 만들고 토판 구울 인력은 대마현 청년들이 하면 됩니다. 토판 만들 흙도 땅을 깊이 파면 구할 수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연료로군요."

"그렇네. 소금 생산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석탄을 써서 토판을 구워 깔면 되겠지만, 지금은 급한 불만 겨우 끌 수 있을 상황이네. 바닷물 끓이기에도 벅찬데 다른 곳에 연료를 쓰기에는 무리가 있어."

본인이 소금 생산 상황을 가장 잘 아는 탓인지 딱히 기대하지는 않는 얼굴로 부윤이 말했다.

"그래도 토판 굽는 데 쓴 것과 같은 양의 석탄을 바닷물을 끓이는 데에 쓴 것보다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효과가 있어야 그리되는 것이오. 만일 실패한다면 연료만 들이고 아무 성과도 없을 수 있지 않소."

"역시 연료가 문제로군요. 연료 없이 토판을……."

말끝을 흐리고 잠시 생각하던 부윤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관아 기왓장을 걷어와서 깔면 어떻겠습니까? 지붕에는 대신 갈대나 짚을 엮어다 올리면 됩니다."

대체 무슨 괴상한 농담을 하나 싶어 양녕과 호방이 옆을 보았지만, 부윤의 표정은 진지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삼척부에 있는 기와란 기와는 다 걷어와 깔 것만 같은 분위기였던지라 양녕은 차분하게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어렵소. 첫째로 기와는 딱 맞물리게 생긴 것이 아니라 사이에 틈이 생기오. 둘째로 틈이 생기지 않더라도 눈비를 맞은 기와가 약해져 있다면 사람이 밟고 다니다 깨져 다칠 수 있소. 셋째로 깨지지는 않더라도 기와는 질그릇이나 오지그릇처럼 치밀하지 않아서 바닷물을 오래 머금으면 문제가 생기거나 샐 수 있소. 마지막으로 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 평평하지 않고 휘어있는 기와를 깔면 바닥에 요철이 생겨 작업할 수가 없소."

"그러면 안 되겠군요."

부윤이 시무룩해진 사이, 호방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럼 나무를 깔면 어떻겠습니까?"

"나무를?"

"예. 물지게에 걸어 쓰는 통은 항아리 아니면 나무통이지 않습니까. 나무를 짜서 맞춘 것이라 틈이 있지만, 물을 담아 나무가 불면 틈이 막혀 물이 새지 않지요. 그렇지 나무를 짜서 바닥을 만들고 바닷물을 채우면 물을 담아둘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무로 바닥을 깔자는 말에 부윤도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무통처럼 만들 것이면 참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써야 하지 않는가. 자네들이 가져온 참나무 목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다듬는 것도 한참 걸릴 것 같은데."

"꼭 참나무가 아니라도 됩니다. 조선 본토와 칠주도를 오가는 배들을 보면 항아리보다도 나무통을 많이 씁니다. 대나무 살로 테를 두른 것이 본 적 없는 모양이라 신기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칠주도의 왜인이나 왜인 출신 조선인 목수들이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료로 삼나무나 편백을 써서 가벼우면서도 물이 새지 않아 배에서 쓰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하더군요."

"삼나무나 편백은 연하면서도 질기고 나무 자체도 곧으니 제재해 판재로 만드는 데에 큰 어려움도 없겠군. 마침 자네들이 가져온 목재에서 가장 많은 것이 삼나무와 편백이니 어디 한번 자네 말대로 해 보세."

"그럼 이미 만든 이 1차 증발지 세 칸 위에 바로 판재를 깔아 만들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틈새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턱을 내서 맞추려면 품이 많이 들 텐데."

"판재끼리 맞닿는 부분을 대각선으로 깎아 내 빗이음으로 이으면 쉽게 금방 만들 수 있고, 물이 새지도 않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 보세. 이야기를 들으니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계속 어렵다고만 하던 양녕이 드디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부윤도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예, 대군! 잘 되면 좋겠습니다!"

* * *

며칠 뒤.

며칠 뒤 다시 모인 세 사람은 1차 증발지를 내려다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나무로 바닥을 까는 것 자체는 성공적이군요."

"물도 새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네. 너무 그대로라서 문제지."

아무리 며칠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증발하긴 한 것인지 티조차 나지 않는 증발지를 내려다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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