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2화
92화
"내가 이전에 고안한 나선양수기라는 것이 있소. 바닷가에서 떨어진 곳에 웅덩이를 만들고 나선양수기로 물을 퍼올려 담아 둔다면, 밀물과 썰물을 쓰지 않아도 바닷물을 모아 둘 수 있소."
"그럼 염전은 어떻게 만들면 됩니까?"
"갯벌에 바로 만들 수는 없지만, 해안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 개흙만큼 고운 흙을 가져다 깔아서 만들면 될 것이오."
양녕의 설명을 다 들은 부윤이 작게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일손이 부족한데 나선양수기라는 것을 만들 사람을 빼내는 것은 물론이고, 생전 구경도 못한 기계를 그들이 잘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개흙만큼 고운 흙을 찾고 또 퍼와서 깔고 염전을 만드는 건 그보다도 더 일손이 들겠지요. 어렵다고 미리 못 박아 두시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나도 외통수에 걸린 기분이요. 나선양수기와 염전을 만들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맞으나, 너무 상황이 급한 탓에 그걸 만들 일손이 없소. 돌고 도는 악순환이오."
부윤이 절박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도성에서 도로를 깔고 있는 인부들 일부를 불러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주안에 염전을 만들면서 일부 돌린 것처럼 여기에도 인부들을 보내 주신다면 일손에 여유가 생깁니다."
"도성 코앞인 부평도 아니고 대관령 너머 여기까지 가서 일하라 하면 순순히 따를 인부들이 있겠소? 설령 강제로 추려서 보낸다 한들 여기에 많은 사람이 오면 그들이 먹을 식량은 충분하겠소?"
"그럼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까?"
"서해안의 방법을 그대로 쓰기는 어려울 것이오. 미련을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는 게 낫겠지. 부윤께서 생각하기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오? 차라리 그걸 어떻게 구해 보는 게 낫지 않겠소?"
"가장 필요한 것은 땔나무지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다 보니 소금 생산 철만 되면 사방의 나무가 남아나질 않습니다. 가까운 숲은 이미 나무는 물론이고 그루터기까지 캐어 쓴 지 오래고, 멀리 있는 숲의 나무는 베더라도 가져오는 것이 일입니다. 차라리 가까운 섬에 가 나무를 해 싣고 오는 것이 염분 가까이에 바로 내려놓을 수 있어서 지금 배 탈 줄 아는 이들은 모두 바다에 나가 있습니다."
"그나마도 장작을 말려서 쓸 시간도 없는 모양이오. 역취화로를 쓰는 데도 덜 마른 장작을 써서 그런지 연기가 엄청 심하게 나는군."
"맞습니다. 덜 마른 장작을 쓰니 화력도 시원찮아서 더 문제지요. 잘 마른 장작이 어디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경입니다."
"잘 마른 나무라……."
"예. 잘 마른 장작만 있으면 역취화로가 제 성능을 충분히 내고 그러면 적어도 나무하는 일손은 줄……. 대군? 왜 그러십니까?"
무언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녕을 본 부윤이 하던 말을 멈추고 물었지만, 양녕은 대답 없이 한참 생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관아로 돌아갑시다. 관아에 도착하는 대로 지필연묵을 가져다주시오. 아무래도 급하게 서신을 보내야 할 것 같소."
그 말에 부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겠습니다. 다른 고을이나 조정에 장작을 요청하시려나 보군요. 그럼 파발하고 파발마도 준비할까요?"
양녕은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젓고 말했다.
"배를 준비해 주시오."
* * *
며칠 뒤.
삼척목 관아 인근 염분.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많이 왔습니다."
"나도 이 정도로 올 줄은 몰랐소."
부윤과 양녕이 나란히 서서 바라보고 있는 해안에는 십수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고, 그 배를 타고 온 청년들이 온갖 물건들을 내리고 있었다.
"대군 마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청년들 사이를 지나 양녕에게 다가온 초로의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양녕이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을 서로 소개했다.
"오랜만일세. 이쪽은 대마현 호방이오. 이쪽은 삼척부윤이시네."
대마현 호방이 뭐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부윤이 감격한 표정으로 호방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고맙네. 정말로 고맙네. 이리 와주어서 정말로 고맙네."
"아닙니다. 대군 마님께서 저희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배를 타고 오면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양녕이 서신을 보낸 곳은 다름 아닌 대마도였다. 대관령을 넘지 않아도 동해안을 따라 뱃길로 올 수 있고, 목재가 풍부한 것은 물론이고 양녕이 부탁을 할 만큼 안면도 있었다. 그래서 대마도에 서신을 보내 각종 자재와 인력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고 물건이고 많이 올 줄은 몰랐네. 내가 부탁한 것보다 못해도 배는 온 것 같은데, 이렇게 와도 괜찮나?"
"항상 범에게 물려 갈까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던 저희가 따뜻한 지역에 터 잡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다 대군 마님 덕입니다. 그런 대군 마님께서 드물게도 저희를 필요로 하셨으니, 이 기회 아니면 언제 은혜를 갚겠습니까."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부윤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해서 많이 온 것 아닌가? 대마현 주민들도 생업이 있을 것이고, 자네도 호방이면 관아의 업무를 봐야 하지 않는가."
"괜찮습니다. 농한기라서 그리 바쁘지 않습니다. 이 청년들도 다들 자기가 가겠다고 모여서 이만큼이나 온 것입니다. 오히려 대군 마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칠주도에 간척 감독하는 일을 이미 받아두어서 여기 못 오는 이들이 아쉬워했지요. 그리고 현감 나리께서도 대군 마님께 은혜 갚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오히려 여러모로 도와주셨습니다."
"현감에게도 내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야겠군. 그나저나 장정들이 이리도 많이 오면 먹을 게 충분할지 모르겠군."
양녕의 걱정에 호방이 웃으며 말했다.
"일하러 와서 밥을 축낼 수는 없지요. 저희가 챙겨온 것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모자라면 섬에 말해서 미곡을 사서 보내 달라고 하면 됩니다."
"미곡을 사다니요?"
부윤의 질문에 양녕 대신 호방이 대답했다.
"대군 마님께서 칠주도를 조선의 땅으로 완전히 만드신 뒤로 온갖 물자와 사람이 본토와 칠주도를 오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마도를 거쳐서 가는 배들이 많으니 항구 시설과 객점을 운영하는 것으로 많은 소득을 얻고 있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런데 대군께서 요청하신 목재들은 그렇다 치고, 저 나무로 된 통이나 바퀴 같은 것은 다 무언가?"
"저희가 쓰던 나선양수기를 몇 개 가져왔습니다. 크고 무거운 물건이라 분해해서 가져왔지만, 어디에 둘지 위치만 정해 주시면 언제라도 조립해서 쓸 수 있습니다."
"나선양수기? 대마도에 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쓰던 나선양수기가 있단 말인가?"
놀라는 부윤에게 호방이 허허 웃고는 말했다.
"간척할 때 씁니다. 보통은 수심 얕은 해안에 흙과 돌을 부어 가며 천천히 땅을 넓히지만, 가끔은 바다를 먼저 틀어막아 소금물 웅덩이로 만들고 물을 퍼낸 다음 흙을 채우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지요. 그때 나선양수기로 물을 퍼냅니다."
"자네들도 필요로 하는 건데 여기 가져와도 되는가?"
"간척을 멈춘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지금 급하게 필요로 하는 곳에 써야지요. 여기에 주더라도 저희는 만드는 법을 아니 금방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부윤이 감동하는 동안 옆에서 양녕이 호방에게 물었다.
"내가 요청한 물건들은 다 구할 수 있었나?"
"예. 염분의 여러 시설을 만들 삼나무와 편백 목재는 이미 대마도에서 쓰려고 제재해 둔 것이 많이 있어서 그걸 가져왔습니다. 여러 철물들과 바닷물 끓일 쇠솥은 김해 쪽 대장간에서 샀고, 석탄도 구해 왔습니다. 저 배에 실린 것이 전부 석탄입니다."
호방이 가리킨 배의 크기를 본 부윤이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에 양녕이 피식 웃고 말했다.
"부윤께서 잘 마른 장작 얘기를 하셨을 때 석탄 생각이 났소. 석성부에서 나는 석탄 중에 소석탄을 만들 품질이 안 되는 것들은 민간에 팔고 있소. 소석탄만 못 만들 뿐이지 화력으로는 잘 마른 장작 못지않은 물건들이지. 그리고 석탄이 나는 석성부에 가까운 대마현이 이어서 떠올라 도움을 청하기로 했던 것이오"
"그리된 거였군요. 남북으로 석성부의 석탄과 김해부의 철을 구할 수 있고 섬에서는 목재가 나는 곳이니 대마현에 도움을 구하신 것이 정말 묘수입니다. 자네도 정말 고맙네. 내 조정에 자네들 일한 삯과 미곡값, 자재비를 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리 달려와 준 공로를 치하해 큰 상도 내려달라 건의하겠네."
"삯이나 상은 괜찮습니다. 그저 저희가 먹은 미곡값하고 자재비만 있으면 됩니다."
"사양할 것 없네. 자네들이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 하는 것은 이리 다른 일을 제쳐 두고 바로 와준 것만으로 충분하고, 일을 했으니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일을 하고 삯을 받지 않는 사례가 생겨 버리면 이를 악용하려는 이들이 나와 버리네."
양녕의 말에 호방이 잠시 생각하더니 끄덕이고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상은 괜찮으니 미곡값과 자재비에 삯만 적당히 받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런데 상은 그렇다 쳐도 삯까지 받지 않으려던 이유가 있는가?"
"돕는 일인데 삯을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돕다니?"
부윤의 질문에 호방이 바닷가에서도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크게 보이는 태백산맥의 험난한 산줄기를 슬쩍 둘러보고는 말했다.
"저희도 한때는 여기 사는 이들처럼 이런 험한 산줄기를 터전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저 화전민이던 저희는 산을 태워 먹고 살았고 염간인 이들은 바다를 끓여 먹고 산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 고된 것에 별반 차이는 없지요. 저희는 다행히 대군 마님 덕분에 여유롭게 살게 되었지만, 서신으로 보내신 여기 사람들 얘기를 읽고는 고생하던 시절이 떠올라 남 일 같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군 마님께 은혜를 갚는 것이나 이들을 돕는 것이나 둘 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삯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고 대마현 주민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여기 온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양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뜻이 있었군."
"곤란하군요. 이러면 삯을 무조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저들의 선행을 노역으로 치부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삯을 주지 않는 선례를 만들면 악용하는 이가 나올 수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민하던 부윤 옆에서 잠시 생각하던 양녕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되겠군."
"좋은 방안이 떠오르셨습니까?"
양녕이 끄덕이고는 호방에게 말했다.
"목재며 솥, 석탄과 같은 물자를 배로 가져온 것, 염분과 염전의 여러 시설을 만드는 것이 자네들이 이들을 도울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그렇지요."
"그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한 이 일들은 자네들의 뜻을 반영해 삯을 치지 않겠네. 하지만 삯은 줄 것이야."
수수께끼 같은 말에 부윤과 호방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양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삯을 주는 만큼 다른 일을 시키겠네. 그러면 자네들도 불만 없겠지?"
양녕의 묘안에 호방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대군 마님은 못 당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삯도 미리 쳐줬으니 빨리 일을 시켜야겠군. 삯 주는 일인 만큼 결코 쉽거나 적지 않을 테니 각오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