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90화
90화
"대군께서는 대마도를 친 것에서 멈추지 않고 기세를 뻗어 저 큰 칠주도를 통째로 얻으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어찌 동북면만 얻고 멈추시겠습니까. 요동까지는 가셔야지요."
"설마 그 이유 하나로 짐작하신 게요?"
어이없음을 넘어 당황마저 섞인 양녕의 질문에 황희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성을 쌓거나 도로를 놓는 기술은 없지만, 큰 판을 내다보는 재주는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제가 봤을 때 여진에게서 국경을 지키는 계책은 그들을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는 것이고, 두만강 안쪽을 확실히 지키는 계책은 두만강 너머까지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만강 너머를 안정시키는 계책은 요동을 얻는 것이지요."
양녕이 굳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난 설마하니 대감께서 찍어서 맞추신 건가 했소. 대감 말대로요. 동북면의 방위는 결국 요동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소."
"하지만 명을 빼놓고 요동을 이야기할 수도 없지요."
황희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본디 중국이란 장성 남쪽의 땅인지라 장성 끝 산해관 밖의 요동은 중국이 아니오. 요동이 별도의 성이 아니라 산동성에 속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도 명이 어떻게든 중국 밖의 땅인 요동을 쥐고 있으려는 것은 너무 중요한 땅이라서임은 나도 알고 있소."
"예. 삼한이 요동을 얻으면 강성해져서 중국마저 막아 내는 나라가 되고, 여진이 요동을 얻으면 세를 키워서 중국을 황하 아래로 쫓아내는 나라가 되었지요. 그리고 몽골이 요동을 얻으면 중국은 물론이고 온 세상을 말발굽 아래에 꿇리는 존재가 되는 것은 중국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 것입니다."
"맞소. 그런 연유로 명은 요동에서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누구도 얻지 못하게 붙잡고 있어야만 하고, 삼한과 여진, 몽골은 그 땅을 얻으려 드는 것만으로도 명의 역린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탐을 낼 수밖에 없소. 그야말로 갈망의 땅이지."
"대군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그런데 그럼 어떻게 요동을 얻으실 계획이십니까? 설마 명나라와 싸워서 얻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굳이 점령하고 지방관을 보내야지만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힘만으로 소를 다루는 것은 초 패왕이 오더라도 어려운 일이지만, 코뚜레를 잡아당기면 어린아이라도 황소를 끌고 갈 수 있지 않소."
황희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양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코뚜레만 얻으면 소를 얻은 셈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조금 전에 명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요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긴 했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요동은 이득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오. 날씨가 추워 농사가 어려운 척지라서 식량을 계속 보내 줘야 하니 사실상 손해만 있는 땅이지. 이런 어려움은 설령 조선이 요동을 얻더라도 마찬가지이니, 어찌 보면 다루기 힘든 땅을 명나라가 알아서 관리해 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소."
"오랑캐들과 가까운 변방의 척지라 중국인들은 가서 살지 않으려 하지만, 대신 고려 말 혼란기에 요동에 자리 잡은 삼한인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까지 따져 보면 요동이 완전히 명나라의 땅이라고 할 수도 없겠군요."
"그렇소. 명나라가 겉으로는 요동에서 창해에 이르는 북방을 모두 다스리는 것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요동만 겨우 들고 있고 이를 통해 북방의 여진족들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고작이오. 그 요동마저도 삼한인과 여진족을 빼면 중국인은 반도 되지 않소."
"요동은 명에는 이득이 되지 않고 지출만 있고 다루기 힘들기까지 하지만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땅. 조선에는 여진족을 다루고 동북방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얻을 수 없는, 혹은 얻어도 경영하기 힘든 계륵과도 같은 땅. 과연…… 이제 알겠습니다. 요동이 코뚜레인가 했는데, 요동도사가 코뚜레였군요! 하하하하하!"
황희의 호탕한 웃음에 양녕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대감께서는 바로 알아차리시는구려. 그렇소. 명나라가 어떻게 요동을 관리하고 여진족을 관리해야 이득인가 하는 해답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명 조정도 알기에 요동을 붙잡고 있겠지. 하지만 명나라의 이해득실이 곧 요동도사의 이해득실인 것은 아니오."
"안 그래도 요동도사 자신을 포함한 중국인은 얼마 없는 판인데, 만일 사방에서 여진족들이 극성을 부리고 조정에서는 잘 관리하라며 닦달하기라도 한다면 누구라도 다른 방법을 찾기 마련이겠지요. 그런데 이러려면 상황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이오?"
"먼터무가 근거지를 서쪽으로 옮기고 명나라에서 벼슬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요동도사가 여진족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다루고 있는 상황이라 극성부리는 여진족도, 닦달하는 조정도 없을 것입니다."
황희가 말한 먼터무는 오돌리 부족 족장으로, 몽골식 이름인 몽케테무르 혹은 그 음차인 맹가첩목아로도 잘 알려진 이였다.
이성계 휘하의 부족장 가운데 하나로 계속 조선을 섬겼지만, 이방원 재위기에 변심하고 명나라에 붙어 관직을 받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명의 권세를 빌어 조선에 볼모로 있던 자신의 가족들을 무사히 돌려받기까지 했다.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눈뜨고 잃게 생긴 상황에서 이방원은 여진족과의 교역을 모두 끊은 것은 물론, 군사를 보내 여진 부족 수백 명을 죽이고 마을을 초토화했다. 먼터무가 다시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경원 일대를 약탈하면서 더 험악해졌던 분위기는 어찌어찌 간신히 수습되었지만, 위기를 느낀 먼터무는 아예 두만강 일대를 떠나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대감 말씀대로 지금은 아바마마께서 토벌하신 이후로 두만강 일대도 잠잠하고, 먼터무도 요동도사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온 상태니 지금은 요동도사가 골머리를 썩일 일은 전혀 없소.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기회가 왔을 때 소 코뚜레를 붙잡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지 않겠소?"
"소 주인이 들으면 기겁을 할 얘기로군요."
씨익 웃으며 눈빛을 교환한 양녕과 황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기침을 했다.
"무슨 얘기 있었소?"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 얘기도 없었지요."
그렇게 절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조금 전 양녕이 그린 지도와 도로 까는 순서를 정리해 건의할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군, 공조참판 이천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시오. 아니, 벌써 끝났소?"
관아 건물로 들어오는 이천을 보며 양녕과 황희가 둘 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천은 활자 제작 업무가 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공조판서 최윤덕과 상의해서 도로를 어디에 먼저 깔 것인지 의견을 정리하고, 다시 그것을 이방원과 이도에게 올려 승인을 받기로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엄청 일찍 돌아온 것이다.
"활자 제작은 제 생각보다도 잘 되고 있어서 금방 끝났습니다. 그리고 건의는 대사공께서 종합해서 두 분 전하게 올리자마자 금방 결정이 났습니다."
"아바마마와 주상께서? 아니 그 신중하신 분들께서 이리 금방 정하셨단 말이오?"
"예. 전부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말문이 막혔던 양녕이 되물었다.
"전부 다라니. 무슨 뜻이오?"
"안으로는 육조거리에서 밖으로는 사대문 바깥까지, 도성 일대에 전부 도로를 깔라 하셨습니다. 넓은 지역과 다양한 조건을 모두 실험장 삼아서 도로를 깔아 봐야 제대로 된 기술이 나올 것이라는 이유라 하셨습니다."
"그야 전부 다 깔면 어디부터 깔지는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도성에 깔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찌하려고 그러신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혔던 황희의 말에 이천이 대답했다.
"인부 숫자가 엄청 많으니 도성 일대에 한꺼번에 다 깔고, 만일 문제가 생기면 그 인력으로 바로 수습하면 되니 괜찮다 하셨습니다."
"호쾌하시구먼. 하긴 신중할 때는 신중하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빠르게 결단하시는 분들이지. 좋소. 그러면 기술을 만드는 것이 빨라지는 것은 물론, 여러모로 실험을 해보아 만든 기술이니 전국에 기술을 가르치고 도로를 까는 것도 수월하겠구려. 다만 인부는 많더라도 실험 관리와 기술 정리를 할 사람이 부족할까 걱정이오."
"그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은 선공감에서 다른 일 하던 관원들을 보내어 돕게 하고, 도성 공사가 다 끝나면 도성수축도감 관원들을 그대로 다 도로부설도감으로 옮겨 일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결국 다 내 일이군."
선공감 제조 겸 도성수축도감 도제조 겸 도로부설도감 도제조 황희가 이제는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주상 전하께서 대군을 찾으셨습니다."
"나를 말이오?"
"예. 무슨 용건인지는 따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보군. 알겠소. 지금 바로 가보겠소."
* * *
잠시 후.
창덕궁 조계청.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마주 앉은 이도가 양녕의 말에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도로부설도감에 명해 바로 도성 일대에 도로를 깔 것이라는 얘기는 듣고 오셨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너무 급히 하는 것이라 여기실지도 모르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도로를 깔아야 전국 백성들의 고통이 덜어질 것이라 생각해 그리하였습니다. 한성부에 사는 이들이야 이미 공납에 시달리지 않으니 급한 공사에 시달린다 한들 어찌 불만을 품겠습니까."
"그런 뜻이 있으셨군요. 역시 주상께서는 실로 백성을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양녕의 칭찬에 슬쩍 웃은 이도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갑자기 진지해진 이도의 표정에 양녕이 집중하고 듣기 시작했다.
"주상의 뜻이니 어찌 부탁이라 하겠습니까. 어떤 분부든 내려 주십시오."
"사실은 얼마 전에 삼척부윤이 장계를 올렸습니다. 소금 생산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소금이요?"
"예. 전조 고려 때는 소금 생산을 집안을 정해 역으로 지워 세습하게 하고 그들을 염호라 불렀고, 지금은 염간이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매우 고되고 힘든 일이지요."
"들은 적 있습니다.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금이 귀해져 값이 치솟아 더 큰 문제가 생기는 탓에 아직 없애지 못하고 있는 제도라 알고 있습니다. 염간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염간으로서 이번 정동군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공을 세우면 괴로운 염간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들 생각이 맞았는지 공을 세운 이들이 많아, 더러는 계속 군인을 하는 이들도 있고 칠주도에 터를 잡은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남은 염간들에게는 큰일이로군요."
양녕의 말에 이도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특히나 상황이 심각한 삼척부에서만 올라왔지만, 아마 앞으로 염간을 두고 소금을 생산하던 다른 고을에서도 하나둘 장계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고된 일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공을 세워 벗어났건, 그 과정에서 죽었건 간에 염간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쉽게 다시 채워질 리도 없으니까요."
양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도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소금을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백성을 위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겠다 하면서 소금만은 예외로 둘 수도 없습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고자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이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금을 쉽고 많이 만드는 법을 만들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