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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89화 (8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9화

89화

1422년 6월 중순 모일.

도성수축도감.

도성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원래도 투입된 인원이 많았던 데다가 개량이 끝난 녹로와 거중기, 유형거가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원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급해질 정도로 일이 잘 풀리니 다행입니다, 허허허."

도성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 대다수가 이후에 있을 도로 공사에도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힌지라, 인부들을 해산하고 새로 모집하는 대신 도성에 이어 도로 공사로 연달아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도성 공사가 빨리 진행되는 바람에, 한시라도 빨리 도로부설 계획을 세우고 시행하지 않으면 도성 공사가 끝난 인부들을 하는 일 없이 기다리게 만들 판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그래도 도로는 축성처럼 큰 돌을 위로 쌓아 올리거나 기계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 고려할 것이 적고, 내가 이미 생각해 둔 것도 있으니 빨리 될 것이오."

양녕의 말에 이천이 화색을 표했다.

"마지막 녹로 제작까지 끝내고 장 별좌가 상의원으로 돌아가면서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해 두신 것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실제로 만들었을 때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땅에 가장 적합하고 만들기도 쉬운 도로의 구조를 구상해 보았소."

그렇게 말한 양녕이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잠시 보던 황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건…… 단면도로군요."

"그렇소. 도로를 잘라서 그 면을 본 그림이오."

양녕이 이번 축성에서 성벽 단면도를 몇 장 만들어 쓰면서 단면도라는 개념이 조선에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아직 보는 법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 처음 보는 대상의 단면이니만큼, 양녕은 황희와 이천이 이해하기 쉽도록 손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우선 도로 폭을 정하고 그것보다 조금 여유를 두고 넓게 땅을 파야 하오. 파낸 부분 좌우에는 큼직한 돌이나 나무토막 같은 것으로 지면보다 높이 올라오게 해서 쭉 이어지게 막소."

"가운데에 뭔가를 채우는가 보군요."

"그렇소. 우선 사람 입에 들어갈 만한, 그러니까 두세 치쯤 되는 크기의 돌을 일곱 치가량 채워 넣소. 그리고 그 위에 한 치보다 작은 잔돌들도 두 치가량 되게 쌓는 것이오."

"두세 치 되는 돌로 일곱 치 높이 층, 그 위에 한 치보다 작은 잔돌들도 두 치짜리 층. 단면도가 시루떡 잘라놓은 모양인 이유가 이거였군요."

"그렇소. 중요한 건 잔돌을 그냥 붓는 게 아니라 적당히 다져가면서 쌓아야 하고, 다 쌓았을 때 원래 지면보다 높으면서 가운데는 또 좌우보다 세 치 정도 높아야 한다는 점이오. 그다음 조금 전에 좌우를 막은 돌이나 나무토막 바깥으로 배수로를 파면 완성이오."

"가운데가 높고 좌우가 낮고, 그 바깥은 배수로니 비가 와도 옆으로 빠지기 쉬운 구조로군요. 그런데……."

끝을 흐린 황희의 말을 이천이 대신 이었다.

"정말 이걸로 완성입니까?"

"그렇소. 왜 그러시오?"

"공력과 재료가 많이 드니 궁궐 전각 앞처럼 다듬은 돌을 깔지는 못하더라도, 궁궐 건물 사이처럼 고운 흙이나 모래로 겉을 다져야 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 없소. 길을 깔려는 것은 땅을 평평하고 걷기 좋게 만들려는 것인데, 잔돌을 펴서 깔았으니 이미 평평하오. 돌이 크지 않으니 사람이나 우마의 발은 물론이고 수레바퀴가 걸릴 것도 없는데, 굳이 이 위에 더 모래나 흙을 깔 이유가 없지 않소."

들어보니 맞는 말이라 생각되어 반론을 펼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 양녕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모래하고 흙을 펴서 깔면 다듬은 돌만큼은 아니라도 재료와 공력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여름에 비가 오면 진창이 되고 겨울에 마르면 먼지가 날리게 되오. 하지만 잔돌은 젖는다고 진창이 될 일도 없고, 마른다고 날리지도 않소. 젖지도 얼지도 않으니 겨울에 언 땅이 봄에 녹으면서 엉망이 될 일도 없지."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돌을 깐 것이라 흙처럼 한 덩어리로 굳어진 것이 아니니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천의 의견에 양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하오. 내가 구상한 쌓는 깊이와 돌 크기가 바로 들어맞지도 않을 것이고 더 좋은 수치가 있을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시험해 봐야 하고, 조선 땅 안에서도 기후와 조건이 다 다르니 그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오. 다만 흙 없이 돌로만 깐다는 기본 구조만은 그대로 유지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소."

양녕의 장담에는 이유가 있었다. 양녕이 도입하려는 것은 원 역사에서 후대에 만들어졌던 매캐덤 공법이었다.

기술이 발전해 결합용 물질이 추가되어 아스팔트 포장으로 이어지고, 그 이름도 공사 장비에 남을 정도로 획기적이면서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 공법이었다.

"대군께서 그리 확언하실 정도라면 의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어디에 먼저 시공할까요?"

"도성 안에 먼저 도로를 까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직 완성된 기술이 아닌데 도성 안에 깔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곤란합니다. 실험을 겸해서 다른 곳에 먼저 깔아보고 도성에 해야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깔아야 이게 과연 실제로 쓰일 때 어떤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이천과 황희의 대화를 듣던 양녕이 말했다.

"도성 바깥 도로에 깔자니 돈의문 밖은 중국 사신들이 오는 길이고, 숭례문은 정문이면서 계응국이나 녹아부에서 오는 이들이 들어오는 길이니, 공사 중인 모습이면 몰라도 길이 망가져 엉망이 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면 위엄에 문제가 생길 것이오."

"그렇다고 흥인문 밖에 깔 수도 없습니다. 지대가 낮고 땅을 파면 물이 나오는 탓에 태조대왕 때 흥인문을 지으면서도 고생했던 곳인데, 그렇게 특이한 조건인 곳에 실험용 도로를 깔 수는 없지 않습니까."

황희의 말에 한층 더 고민이 깊어진 이천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당장 정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우선 지금 나온 의견들을 종합해서 대사공(공조판서)께 드리고, 대사공께서 두 분 전하께 올려서 승인을 받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의 공조판서는 바로 최윤덕이었다. 정동군에서 함께하며 그 능력을 아는 양녕이 안심하고 대답했다.

"그게 낫겠소. 대사공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못 떠올린 좋은 방안을 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어차피 지금 공조에 돌아가서 활자 제작 업무를 봐야 하니 겸해서 같이 처리하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그동안 우리 둘은 다른 업무를 보고 있겠소."

"그럼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이천이 인사하고 관아를 나가자 양녕이 지친 얼굴로 황희에게 말했다.

"쉽지 않구려."

"별수 있겠습니까. 어떤 좋은 정책과 수단이라도 결국 현실에 적용하려면 여러 제약이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오. 그럼 어디 시간 난 김에 처리할 업무가 어떤 것이 있소?"

"큰 도로를 어떻게 깔지 미리 정하면 좋겠습니다. 기술이 완성되면 도성 안과 근처 도로를 먼저 깔겠지만, 그다음에는 전국 각지를 잇는 큰 도로가 있어야 할 테니까요."

"큰 도로라면 한성을 중심으로 대각선 둘이 겹치는 모양으로 놓는 게 먼저고, 다른 큰 도로는 그다음에 깔아도 괜찮다 생각하오."

"대각선이 겹친다니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생각한 양녕이 종이를 펼치고 간략한 조선 본토 지도를 그렸다. 그 위에 중간중간 지명을 적고 선으로 그어 가며 황희에게 말했다.

"우선 충주에서 조령을 넘어 진주부와 동래부로 이어지는 도로를 먼저 놓아야 하오. 영남이 도성과 잘 통해야 영남 너머의 칠주도도 통제하기 좋지 않겠소."

"최근에 조선 땅이 된 데다가, 바다로 떨어진 큰 섬이고 중요한 곳이니 확실히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칠주도에서 나는 유황이나 금은, 김해에서 생산한 철을 도성으로 옮기는 데에도 필요하오. 지금은 주로 해운으로 옮기다 보니 멀고 위험하고, 보조적으로 낙동강으로 옮기는 것도 제한이 있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은 어느 쪽입니까?"

이번에는 한양에서 출발한 선이 호남 땅끝까지 쭉 이어졌다.

"전주와 나주를 지나 해진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고 있소."

"좌초 위험이 있는 조운선을 보조해서 세금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게 주 용도가 되겠군요. 그러면서도 굳이 해진까지 이은 것은 제주를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맞소. 제주의 특산품 중 귤은 이제 더 나은 재배지인 칠주도를 얻었다고 하나, 말을 기르기에는 제주는 여전히 중요한 곳이지 않소."

"탐라마는 하나같이 준마들인데 수운으로 옮기다 사고가 나거나 제대로 된 도로가 없어 다치기라도 하면 큰 손해지요."

황희의 말에 끄덕인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다음은 금성과 함흥을 거쳐 동북면으로 가는 도로요."

"대군께서 동북면을 확고한 조선의 땅으로 만드시려는 포부가 있으시다는 것을 이미 상왕 전하께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순서가 좀 뒤쪽인 것 같군요."

"아바마마께 이미 들으셨구려. 거기엔 이유가 있소. 철과 식량, 즉 무기와 군량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여진족 세가 강한 동북면을 도모하기란 어려운 일이오. 그리고 동북면은 이득을 보려 하는 것이니 뒤로 미뤄도 좋지만, 삼남에 도로를 까는 것은 백성의 고통을 줄이려 하는 것이니 미룰 수 없소."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대각선으로 엇갈린다 하셨으니 남은 것은 한성에서 의주를 잇는 도로겠군요."

"맞소. 평안도는 여진족과 접한 지역이라 거둔 세곡을 현지에서 쓰니 많은 세곡을 옮길 일이 없소. 거기다 개성과 평양이라는 옛 도읍들이 있고, 평지이면서 조선과 명의 사신들이 오가는 땅이니 쓸 만한 길도 이미 있소.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어도 급할 것 없소."

"거기까지 다 까신 다음에 다른 도로들을 놓을 계획이시겠군요."

"그렇소. 어떤 것 같소이까?"

"이대로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예 없는 길을 내시려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한성과 중요한 고을들을 잇던 길목들 중에서 넷을 추리신 것 아닙니까."

"그렇소. 다른 길목들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넷이 시급하다 생각해서 먼저 깔자 한 것이오."

"도로를 깔면서 요령과 자료가 쌓여 까는 속도도 점점 빨라질 테니 나중에 까는 도로들이라고 해서 너무 늦어지지도 않겠지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좋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어차피 이것도 결국 대소신료들의 의견까지 전부 수렴한 다음 아바마마와 주상께서 결정하실 일이지만, 방촌 대감께서 이거면 충분하다 하시는 걸 보니 이대로 쭉 가서 금방 결정될 것 같소."

"과찬이십니다."

양녕의 칭찬에 흐뭇하게 웃던 황희의 시선이 문득 조금 전 양녕이 그린 지도에 가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황희의 행동에 양녕이 무슨 일인지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황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지도 곳곳을 천천히 짚어 가며 혼잣말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칠주도의 구리와 유황. 김해의 철. 호서와 호남의 미곡. 제주의 준마. 귀화한 옛 시마즈 방계 무사들. 동북면으로 가는 정비된 도로."

말을 멈추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황희가 양녕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심약한 사람은 마주치기만 해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라고 소문난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동북면을 안정시키고 천년만년 확고하게 이어질 조선의 땅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그다음으로……."

잠시 말을 멈췄던 황희가 밖에 들리지 않게 작은, 그러면서도 예리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군께서 얻으려 하시는 것은 요동이겠군요."

"어떻게 아셨소?"

양녕의 눈썹이 꿈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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