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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88화 (8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8화

88화

1422년 5월 하순 모일.

도성수축도감.

완성된 녹로 시제품은 거중기나 유형거와 마찬가지로 양녕이 정약용의 원본을 최대한 기억해내 설계한 모양 그대로였다.

"이렇게만 보면 튼튼하게 설계대로 잘 만들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냥 봐서는 모르는 문제가 있나 보군."

양녕의 말에 장영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계대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실제 제작한 뒤 알게 된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돌을 들어 올리는 부분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녹로가 목 긴 짐승이 앉은 것처럼 생겼다고 치면,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너무 좁고 약합니다."

"지금도 고정도르래는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예. 하지만 밧줄이 움직도르래와 고정도르래를 다만 두어 개씩이라도 번갈아 지나가게 해야 드는 힘을 많이 줄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도르래를 달 자리도 많이 없고, 억지로 단다고 해도 목 부분에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하긴 움직도르래를 많이 쓰지 못하면 그저 당기는 방향만 달라지지 드는 힘은 그대로니까. 그럼 녹로 목하고 머리를 좀 더 큰 목재로 바꾸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되면 머리 부분에 도르래를 달 공간도 충분해지고, 목 부분이 부러질 염려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러면 목과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문제입니다."

"무거워질 테니 나무막대로 꿰어서 조립하고 밧줄로 묶은 걸로는 못 버틴다는 얘기로군."

녹로의 목과 몸통 연결부는 목 밑동과 몸통 앞 기둥 밑동에 각각 구멍을 뚫고 나무로 꿴 것이 구조적 연결의 전부였다. 그 위쪽 벌어지는 부분에 다른 나무막대를 끼워 넣고 밧줄로 묶어서 목이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고정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걸 보강이라고 하기는 민망할 정도였다.

"목에 큰 부재를 쓰면 무겁고 굵어지니 연결도 튼튼해야 하고, 연결을 튼튼하게 하려면 몸통도 큰 부재를 쓴 다음 짜 맞춰야 됩니다."

"만일 어떻게든 만든다 치면 어떨 것 같은가?"

"거의 작은 초가집 하나 짓는 공력이 들어가겠지요. 공력은 둘째 치더라도 기둥이나 들보로 쓸 만한 목재를 녹로 재료로 써야 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격이지요."

옆에서 녹로를 살피던 이천도 감상을 말했다.

"크기나 부재 이전에 다른 문제도 있어 보입니다. 녹로라는 것이 목 부분이 움직이는 구조도 아니니, 땅바닥에서 돌을 걸어 끌어올려봤자 여전히 땅바닥 위 허공에 떠 있는 셈입니다. 이걸 성벽 위로 옮기려면 갈고리 같은 것으로 녹로 줄이나 돌을 묶은 밧줄을 걸어 당겨야 되겠지요."

"당겨서 받는 것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할 텐데, 당기다 놓치기라도 하면 돌이 이리저리 휘둘러질 테니 위험하겠군. 안 놓치더라도 돌을 당기다 녹로 전체 중심이 흐트러져서 뒤가 들리면 그대로 넘어지겠고 말이야.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려 만드는 것인데 이래서는 효과가 없어."

황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원래 역사에서 수원화성을 건축할 때 녹로가 쓰이긴 했지만, 당시는 화약 무기가 전쟁의 대세가 된 시대였다. 수원화성 역시 거기 맞춰서 포격을 견딜 수 있게 성벽을 두껍고 낮게 만들었으니, 지금 짓는 도성보다 석재를 들어올려야 하는 높이가 낮아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런 좋은 조건에서도 수원화성 전체 공사에서 딱 두 개만 만들어져 쓰인 이유가 있었군.'

양녕은 생각에 잠겼고, 장영실도 해결책을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이천이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말을 꺼냈다.

"이미 거중기하고 유형거만으로도 축성에 큰 도움이 되고 있고,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녹로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는 아닙니다. 하던 대로 해도 성은 지어지겠지요. 다만 만들어지기만 하면 다른 곳에도 여러모로 쓰임이 많았을 물건인데 제대로 안 된다니 아쉬울 뿐입니다."

황희도 끄덕거리면서 거들었다.

"큰 돌을 들고 옮기고 하는 것이니 쉬울 리도 없었지. 백성들이 쓰는 연자방아 같은 것도 큰 돌을 통째로 쓰는 것인지라 만들기 어려워, 하나를 만들어 방앗간에 두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쓰고 관리하고, 움직이는 것도 사람 힘으로는 버거워 황소를 시켜 돌리지 않는가."

"예. 그렇다고 이번 공사에 황소를 쓸 수도 없지요. 소가 사람처럼 구령에 맞춰서 힘 조절해 가며 녹로 손잡이를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갈고리로 걸어 돌을 당기는 데에 쓰자니 소를 올리기에는 성벽 위가 좁습니다. 애초에 농사에 필요한 귀한 소를 위험한 공사현장에 데려올 수도 없고요. 차라리 사람도 황소 같은 힘이 있다면 손잡이 돌리는 것이고 갈고리로 당기는 것이고 다 편했을 텐데……."

"바로 그거요."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불쑥 말한 양녕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방법이 있었소."

영문모를 양녕의 말에 이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소가 구령에 따라 힘 조절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으십니까?"

"아니오."

옆에 있던 황희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사람이 황소 같은 힘을 내게 하는 방책이 떠오르신 겁니까?"

"그것도 아니오."

갑작스러운 양녕의 말에 당황했던 장영실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떤 방법입니까?"

"연자방아요. 연자방아처럼 만들면 되는 것이었소."

* * *

다음 날.

도성수축도감.

도성수축도감에는 전날 모여 녹로에 관해 얘기했던 네 사람이 다시 모여 있었다.

양녕과 장영실은 무언가 들뜬 표정이었지만, 전날 양녕이 장영실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오라며 떠밀 듯 퇴청시켰던 탓에 이천과 황희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장 별좌도 그렇고 대군께서도 좀 피곤해 보이시는데, 설마 어제 퇴청 안 하셨던 겁니까?"

피곤한 기색의 양녕에게 황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 다 잠은 잤으니 괜찮소. 그런 것보다도 이걸 보시오."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설계도로만 그려서는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작게나마 만들어 봐야 어디를 어떻게 고칠지 보일 것 같아서 만들었소. 개량한 녹로의 축소판이오."

개량 녹로를 본 황희가 바로 떠오른 감상을 말했다.

"어제 장 별좌가 녹로를 설명하면서 앉은 짐승처럼 생겼다고 했는데, 이건 꼭 서 있는 학처럼 생겼군요."

황희의 말대로 모형은 어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녹로 아래에 나무를 짜서 만든 높은 구조물이 받치고 있어 학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구조입니까?"

특이한 모양에 관심을 가진 이천이 말을 꺼내자마자 장영실이 들뜬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물건을 매단 밧줄이 머리 부분의 도르래에 걸리는 건 이전 녹로와 같습니다. 대신 밧줄이 몸통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몸통 뒤까지 갑니다."

"저 꼬리 부분에 달린 동그란 물건하고 이어지나 보군."

이천이 학으로 치면 엉덩이 뒤, 꼬리 아래에 해당하는 위치에 달려 있는 물레방아의 물레바퀴 같은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저걸 돌려서 밧줄을 감아올립니다."

"물레바퀴만 하다고 치면 실제로 만들어도 그리 높이 달려 있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어떻게 돌리는가? 크기도 손잡이를 달아 돌리기에는 너무 커 보이는데, 정말로 물레바퀴처럼 물을 부어서 돌리지도 않을 것 아닌가."

"사람이 들어가서 앞으로 걸어가면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사람이 걸어서 돌린다고?"

자신만만한 장영실의 말에 놀라는 이천에게 양녕이 대신 대답했다.

"사람의 팔보다 다리가 힘이 센 법이라 곡식을 찧을 때도 절구질보다는 디딜방아가 더 편하고 힘도 잘 들어가지 않소. 이것도 사람이 들어가서 걸으면 다리로 힘을 주면서 체중도 더해서 눌러지니 손으로 돌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오."

"잘못해서 떨어지면 다치지 않겠습니까?"

"바퀴가 돌아가는 데 걸리지 않을 정도 높이로 아래에 넓게 단을 쌓으면 떨어지더라도 높이 떨어지지 않으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이오. 그 단에 계단까지 만든다면 단에 올라가서 물레바퀴에 들어가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돌리기 편한 것 말고 다른 점도 있습니까? 발로 돌리는 것만이 장점이라면 이전 녹로에 저 물레바퀴만 다셨을 텐데 아예 모양이 다른 것을 보니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천의 질문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보셨소. 첫째로 이전 녹로는 목에 해당하는 부재가 몸통 앞에서 연결되고 끝이었소. 하지만 이건 그 부분이 학의 등을 지나 꼬리까지 이어지니 더 안정적이오."

"지렛대라는 것의 원리로군요. 몸통이 받침점이 되고, 꼬리와 머리가 지레가 되는 것이니 균형 잡기 좋겠습니다."

"맞소. 이전 녹로는 목이 아래로 쳐지려는 힘을 몸통 연결부가 다 버텨야 했지만, 이건 뒤에 달린 저 물레바퀴가 아래로 누르는 힘과 균형을 이루오. 작업할 때에도 앞에 돌을 달면서 뒤에도 사람이 들어가니 균형은 유지될 것이외다."

"그럼 둘째로 다른 건 무엇입니까?"

"이거요."

양녕이 그렇게 말하면서 녹로 몸통을 잡고 돌리자, 아래에 있는 받침은 그대로 둔 채 몸통만 돌아갔다. 그 모습에 이천과 황희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장영실은 한층 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양녕이 웃으며 설명했다.

"다리와 몸통을 별도로 만들고, 몸통 중앙의 큰 기둥을 축으로 삼아 다리 중간에 꽂았소. 그래서 받침은 땅에 고정된 상태로 녹로만 돌릴 수 있소."

움직이던 모형을 보던 황희가 이제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을 걸고 물레바퀴를 돌려서 들어 올리고, 몸통을 돌려서 돌이 성벽 위로 올라가게 하고, 바퀴를 다시 반대로 돌려서 돌을 성벽 위로 내리면 되는군요. 바퀴가 달린 생김새나 움직이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연자방아입니다. 제가 지나가듯 말한 연자방아에서 이런 신묘한 걸 떠올리다니 역시 대군이십니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소."

양녕의 대답은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했던 물건을 잊고 있다가 연자방아라는 말에 떠올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지구 반대편에서도 서서히 퍼지는 중이겠지.'

중세 유럽에서 나타나 쓰이기 시작한 이 건설기계의 학을 닮은 모양은, 이후에 모양이 크게 달라진 21세기까지도 유럽 언어에서 이런 기계를 학과 관련된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기도 했다.

"초를 치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약간 걱정이 되는 게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이천의 말에 양녕이 물었다.

"무엇이오? 오히려 문제점을 찾아 바로 고칠 수 있으니 초 친다 생각하지 말고 말해주시오."

"지금 이 모형이야 작게 만든 것이니 괜찮지만, 설계대로 큰 부재를 써서 만들면 구조적으로 괜찮을지 좀 걱정이 됩니다. 나무가 자기 무게를 버티는 것이나 연결부가 결합을 버티는 것 둘 다 크기가 커지면 상황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 문제로군. 그건 어차피 이전 녹로를 개량만 하거나, 녹로에서 아예 벗어난 기계를 만들었더라도 거쳐야 하는 시행착오 아니겠소. 그리고 공께서는 잘 해결하실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천은 잠시 양녕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부재 연결과 보강에 쓰이는 철물 제작과 기계 조립 감독이 자기 일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그대로 굳었다.

"거중기도 잘 만들었는데 녹로라고 못 만들겠습니까. 제가 열심히 할 테니 기운 내십시오."

이천의 표정이 얼마나 굳었는지 설계 실무자인 장영실이 역으로 이천을 격려하고, 황희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도움이건 물건이건 최대한 구해 줄 테니 언제든 말하게나."

그 모습을 보며 양녕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나 격려의 뜻이 아닌, 유능한 이들을 알차게 일 시키는 것이 어떤 즐거움인지 이제 알겠다는 끄덕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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