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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87화 (8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7화

87화

양녕의 부름을 받고 도성축성도감에 온 상의원 별좌 장영실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고 있었다.

대군인 양녕과 한성판윤 황희는 물론이고, 상의원이 속한 공조의 참판인 이천에 이르기까지 장영실에게 편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양녕의 말이 들렸다.

"내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만들고자 해서이네."

양녕은 장영실이 오는 동안 그려 두었던 종이들을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수레로 보이는 그림이 한 장, 뭔지 모를 기계가 그려진 종이가 두 장이었다.

수레는 알겠지만 다른 두 기계가 대체 무엇인가 궁금해하던 황희와 이천도 주목하는 가운데, 종이를 슬쩍 훑어본 장영실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수레고, 나머지 둘은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데 쓰는 기계로군요."

장영실의 즉답에 양녕이 감탄하며 말했다.

"바로 맞추었네. 역시 대단하군."

장영실이 그 극적인 신분 상승으로 유명한 탓에, 이도 재위기의 발명을 혼자 이끈 것 같은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기술자들도 많았다.

원래 역사에서도 지금 공조 참판인 이천의 지휘하에서 다른 학자들과 협력해서 여러 물건을 개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특출난 분야는 있기 마련이지. 맞춰서 다행이군.'

그런 여러 개발에서도 장영실이 주도하거나 큰 기여를 했던 것은 천문관측 도구나 시계의 제작이었다.

둘 다 정밀하게 움직이는 물건이니 장영실의 재능이 기계 쪽이라고 생각하고, 천문관측 도구나 시계가 아닌 공사 장비 제작이지만 장영실에게 도움을 받기로 한 양녕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맞추었다니 기쁩니다.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 기계들입니까?"

"우선 이 수레는 유형거라 하네. 다른 수레보다 사람이 잡고 다루기 편한 구조야. 큰 몸통에 긴 목이 달려 꼭 앉아 있는 학처럼 생긴 이 기계는 녹로라 하네. 돌을 직접 들고 나르지 않아도 높을 곳으로 올리는 기계일세. 좌우로 넓게 퍼진 이 기계는 거중기라 하네. 무거운 것을 쉽게 들고 내리는 기계지."

"무거운 것을 쉽게 들고 내리다니, 그런 게 정말 가능합니까?"

벌써부터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보는 장영실에게 양녕이 대답했다.

"물론 사람을 장사로 만드는 그런 것은 아닐세. 다만 짧게 움직이려면 힘을 많이 들여야 하고, 힘을 적게 들이려면 길게 움직여야 하는 사물의 이치를 응용한 것이지."

그렇게 말하며 양녕은 종이 한 장을 새로 꺼내 탁자에 올렸다. 지레, 도르레, 축바퀴 등의 단순 기계들을 복잡한 개념 설명 없이도 최대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전에 그린 것이었다.

"지렛대라는 이것은 저울의 이치와 같은 것이로군요. 이리 숫자와 숫자의 곱으로 이치를 나타내니 이해가 잘 됩니다."

장영실은 그 그림을 보자마자 눈을 떼지 못하고 혼잣말까지 하며 꼼꼼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했던 탓에 주변의 세 사람 모두 장영실의 이해를 방해하지 않으려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다 보았습니다."

"그래. 어떤가?"

장영실은 한참 들여다봤던 단순 기계 그림을 옆으로 치우고 거중기 그림을 펼치고는 짚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군께서 그리신 이 구조로도 작동은 하겠지만, 위쪽에 고정된 도르래를 둘, 아래에서 움직이는 도르래도 둘 늘리면 더 좋겠습니다. 또 손잡이를 당겨 들어 올리다가 멈춰야 할 때가 있을 테니, 도중에 감던 것을 고정할 수 있는 구조로……."

가만히 듣다가 놀란 양녕이 물었다.

"아니, 벌써 다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개량 방안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역으로 장영실도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려고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려고 한 것은 맞으나 이리 빠를 줄은 몰랐네. 내 생각 이상이야. 대단한 재능이로군. 그럼 마저 개량 방안을 말해 주게나."

감탄한 양녕이 장영실의 설명을 듣는 동안, 옆에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천이 황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상왕 전하께서 기물 만드는 재주를 보고 궁에 불러들여 면천하고 일을 맡기셨고, 올해에 주상 전하께서 상의원 별좌로 삼으시기는 했지만 저런 대단한 재능도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대군께서는 그 재능을 알아보고 부르셔서 도움을 구하시니, 정말 두 분 전하와 대군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다루는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이천의 말만 듣고서도 황희는 지친 표정이 되었다.

"대단하시지……."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듯 양녕과 장영실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유형거는 이대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말이로군."

"예. 큰 돌을 올렸을 때 나무가 버텨 줄지, 어떤 나무를 써야 할지, 사람이 다루기 좋은 수레 크기가 얼마일지는 일단 만들고 써 보면서 바꿔 가는 게 좋겠습니다. 기존에 있던 수레를 개선한 것이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좋네. 그럼 거중기하고 녹로는 아예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니 나하고 같이 설계를 검토해 보세."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하는 표정이 어딘가 어두운 것을 보고 양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런가? 무슨 문제 있는가?"

"제가 부품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상상 속에서 기계를 조립하고 움직이면 잘 움직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제로 만들어도 곧잘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무거운 것을 움직이는 큰 기계를 만드는 것은 처음입니다. 아마 생각으로는 잘 되더라도 실제로는 나무로만 만들면 부품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으니 보강해야 하고, 어떤 부품들은 아예 처음부터 금속으로 만들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종류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내가 돕겠네."

이천의 갑작스러운 말에 장영실이 놀라며 말했다.

"참판께서 직접 말이십니까?"

"나는 무관 출신이지만 쇠에 관한 재주가 있어서 공조 참판까지 되었네. 비록 직접 두들겨 만드는 재주는 아니지만 철물에는 자신이 있어."

"하지만 지금도 주상 전하께서 지시하신 활자 제작 책임자를 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활자만큼이나 축성도 중요한 일이지. 무엇보다 대군께서 개발하시려는 것들은 축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나라의 여러 일에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들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별좌인 자네가 주가 되고 참판인 내가 보조가 되는 것 같아서 찝찝하다면 그럴 필요 없네. 이건 대군께서 주도해서 하신 것이니 자네와 내가 같이 대군을 보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원해서 기세를 몰고자 하는 일이기도 해."

"기세를 모신다니요?"

"자네를 불러오라 하기 전에 대군께 들은 바가 있어 다시 생각해 보았네. 지금 대군께서 쓰신 여러 책과 만드신 기술들이 여러 용도로 쓰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예. 측거의, 제철, 선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요."

"지금 만드시려는 이 기계들도 단순히 성벽을 쌓는 것에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게야. 큰 건물을 지을 때 부재를 들어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배나 요새 위에 화포를 올리고 내리기에도 좋겠지. 해자를 파고 그 위에 놓을 다리를 이 기계로 들거나 내린다면 방어에도 유용하지 않겠나?"

무관 출신다운 발상으로 양녕과 황희를 감탄하게 만들며 이천이 말을 이어 갔다.

"대군께서 종이에 정리한 저 지레며 도르래며 하는 것들이 사물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고, 그 이치를 써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나라에 유용하니, 기술이라는 것이 결코 깊이가 없는 분야가 아닐세. 이런 기술들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쓰이고, 사람들이 그 깊이를 온몸으로 느낀다면 장인들의 기술이 그저 잔재주가 아니라 학문으로 자리 잡을 날도 오지 않겠나?"

기술자인 장영실은 이천의 그 말에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날이 더 빠르고 확실하게 오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이군요. 감사합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황희도 말했다.

"혹시라도 상의원 일하고 같이 하느라 힘들거나, 한쪽이 소홀해지거나, 소임 아닌 일을 한다고 누가 뭐라 할 것 같다면 걱정 말게나. 내가 직접 주상 전하께 건의하겠네. 이 일의 중요성, 대군의 안목, 자네 능력을 모두 아시는 분이니 아마 자네가 여기로 옮겨와서 일하는 걸 수락해 주실 게야."

"감사합니다 대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부담 가질 것 없네. 이 일이 빠르고 잘 끝나야 나도 겸직한 자리들을 빨리 내려놓고, 그 과정에서 성과가 크다면 나도 유배 갔던 흠이 좀 없어지지 않겠는가? 내가 자네를 돕는 만큼 자네도 날 돕는 셈일세."

일을 빠르게 잘 끝내고 성과까지 크다면 과연 이도가 겸직을 줄일지 늘일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는 말을 양녕이 참는 동안 이천이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그럼 이 도구들 개발은 대군께서 주도하시고, 장 별좌가 세부적으로 설계하고 계획하겠군요. 철물 제작이나 조립 감독은 공조참판인 제가 하고, 도제조로서 총감독하고 주상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은 대감께서 해 주시는 것이고요."

"그렇네. 그럼 개발이 완료되고 본격적으로 기계들이 쓰이기 전까지는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다치는 사람이 최대한 안 나오게 하라고 관원들에게 당부해 둬야겠군. 그랬다가는 새 기계고 뭐고 그냥 사람을 많이 써서 빨리 공사를 끝내버리고 말자는 소리가 나올 테니 말이야."

이천과 황희의 말에 양녕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도와줘서 고맙소. 그럼 어디 장인들의 기술이 학문이 되는 날을 위해 이번 기계 개발을 시작해 봅시다.

* * *

1422년 5월 하순 모일.

한성부 인근 채석장.

벌써 몇 번인가 시행착오를 거치고 새로 만들어진 거중기와 유형거를 채석장에 설치하고 처음 가동해보는 날이었다.

"오늘은 성공하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양녕은 피곤한 듯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진행 중인 첫 가동을 지켜보았다.

거중기는 채석장의 분업화된 구간 중 돌 다듬기가 완료되는 곳에 설치되어있었고, 인부 하나가 다 다듬어진 돌을 밀고 와 거중기의 도르래 아래쪽에 천천히 밀어 넣고 있었다.

도르래 아래쪽 바닥에는 나무로 짠 틀이 박혀 있고, 틀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돌을 충분히 밀어 넣자 돌은 나무틀 좌우에 걸쳐지고 아래쪽에는 빈 곳이 생겼다.

"다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묶습니다!"

양녕에게 큰소리로 진행을 알린 인부가 돌과 나무틀 사이 공간으로 밧줄을 통과시켜 묶고, 다시 거중기 도르래에 튼튼하게 묶었다.

"감습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인부가 뒤로 물러나고, 다른 인부들이 거중기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움직도르래가 많이 쓰여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손잡이는 잘 돌아가는 편이었지만, 대신 당겨야 할 밧줄이 길어진 탓에 돌이 올라가는 속도는 느렸다.

"준비됐습니다!"

끼릭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돌이 충분히 올라가고, 철물로 된 잠금장치를 양쪽에서 걸고 인부가 외쳤다. 다른 인부들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놓았지만,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윽고 옆에서 조금 전 돌을 묶었던 인부가 유형거를 끌고 와 거중기 돌 아래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반대쪽으로 나온 유형거 앞부분을 다른 인부가 잘 잡아 고정하고 다시 외쳤다.

"돌 내립니다!"

양녕은 물론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이천과 장영실, 황희도 긴장한 가운데, 이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마 또 박살 나지는 않겠지요."

이 직전 시도에서 거중기는 돌 무게를 버텼지만, 돌을 얹은 직후 유형거 바퀴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 나며 주저앉았다. 그 점을 반영해서 이번 유형거는 바퀴 내외부를 두꺼운 나무로 보강한 것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다시 잠금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반대로 돌리자 돌이 천천히 내려왔다. 유형거 위에 돌이 올라오자 묶었던 밧줄을 풀고, 그대로 유형거를 뒤로 당겨 빠져나왔다.

"됐군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황희의 말에 양녕은 말없이 끄덕이며 다음 단계를 지켜보았다.

거중기 옆으로 자리를 옮긴 유형거 바퀴 앞뒤로 움직이지 않게 나무토막을 괴고, 손잡이가 확 올라가지 않게 힘을 주고 천천히 들어 올리자 이윽고 수레 앞쪽 끝이 바닥에 닿았다. 옆에서 돌에 걸린 밧줄을 잡고 당기자 큰 어려움 없이 돌이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모든 과정이 성공하자 지켜보던 수많은 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황희도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한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드디어 한숨 돌렸군요. 거중기도 유형거도 제대로 동작합니다. 물론 많이 쓰다 보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돌을 달구지나 들것으로 옮기고, 거기 올리고 내리는 것도 사람이 하던 때보다는 사람이 다치거나 돌이 상하는 일은 줄고 속도는 빨라지겠지요."

양녕도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제 거중기를 더 설치하고 유형거도 더 많이 만들어야겠군. 다들 고생 많으셨소. 그럼 이제 녹로만 잘 개발되면 되는데, 진행은 어떻소?"

양녕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장영실에게로 향했다. 거중기와 유형거가 성공했는데도 심란한 표정인 것을 보고 다들 불안함을 느꼈다.

"시제품은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문제점이 많아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대로는 제대로 쓰기가 힘들 지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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