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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86화 (8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6화

86화

1422년 5월 중순 모일.

한성부 인근 채석장.

"태조대왕 때에는 산에서는 이미 있는 돌을 써서 쌓고 평지에는 흙으로 다져서 쌓아서 재료 구하기는 편했는데, 평지도 석성으로 고치려 하니 돌 구하는 것부터 일이군요."

옆에 나란히 선 황희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오. 그나마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쓸만한 채석장을 찾아서 다행이오."

한성부에는 인왕산이나 낙산처럼 가깝고 좋은 석재가 나는 곳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굳이 다른 곳에서 채석장을 찾은 것은 인왕산이나 낙산은 도성 산악구간을 이루는 산인지라, 돌을 떠내서 모양을 상하게 하거나 깎아 낸다는 행위 자체가 꺼려졌던 것이 첫째 이유였고, 새로 도입된 채석 방법상 이미 성벽이 올라가 있는 산에 쓰기 위험하다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어명이오!"

다들 이미 암벽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쩌렁쩌렁하게 어명이라 외친 인부 하나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는 힘껏 달려서 최대한 멀리 벗어났다.

다들 숨죽이고 가만히 있기를 잠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돌조각과 흙먼지를 날리며 암벽이 무너져내렸다.

"굳이 어명이라 외치지 않아도 이 기세면 산신도 겁먹어서 동티 내릴 엄두를 못 내겠습니다."

"산신이 동티를 내릴까 어명이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산신더러 살고 싶으면 빨리 피하라고 외치는 것일지도 모르겠소."

황희와 양녕이 서로 농을 주고받고는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화약으로 석재를 얻는 방법이 제법 괜찮군요."

"쐐기를 박아 가며 돌을 떠내는 것에 비하면 원하는 크기의 돌을 얻기는 어렵지만, 어차피 성을 쌓을 것이니 규격 크기 이상의 돌만 얻어진다면 필요한 만큼 깎아서 쓸 수 있으니 별문제도 되지 않소."

"쐐기로 떠내는 것보다 공력과 시간도 적게 들고, 바위에 붙어서 작업하다 석재가 떨어지면서 사람이 상하는 일도 없으니, 화약이 든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일하러 온 이들이 많으니 이들에게서 나온 대소변을 모아 초석밭에 넣으면 다시 초석도 만들어질 것이고, 유황도 칠주도에서 꾸준히 들어오는 그것도 단점이라 할 것은 아니오."

"그렇…… 콜록! 콜록!"

황희는 양녕의 말에 뭐라 대답하려다가 흙먼지를 마셨는지 연신 기침을 했다.

"괜찮으시오? 먼지를 많이 들이마셨으니 이따가 돌아가면 차라도 마셔서 목을 씻어 내는 게 좋겠소."

양녕의 걱정에도 대답을 못 하고 한참 기침하던 황희가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요즘 하도 차를 마셨더니 더 마시면 위장을 상하게 할 것 같습니다."

"위장이 상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마셨단 말이오?"

"예, 주상 전하께서 일하다 지치면 마시라며 특별히 찻잎을 몇 말이나 내려 주시고 차 맷돌도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등청하자마자 마셨지요."

남부지역에서만 재배되어서 사치품에 가까운 차를, 그것도 찻잎을 여러 번 우릴 수 없고 한 번에 마셔 없앤다 해서 명나라에서는 태조 주원장이 금지하기까지 했던 말차로 만들어 마시라고 맷돌까지 주었다는 것은 명백하게 진하게 마시고 차의 각성효과로 잠 깨서 일하라는 의미였다.

"탈 안 나게 조심하시오."

"알겠습니다. 맡은 자리가 한둘도 아니고, 나이도 있으니 잘 관리해야지요."

원래대로라면 수로 공사가 완료되었으니 황희도 선공감 제조 자리에서는 내려올 법도 했다.

하지만 도성수축도감과 도로부설도감 둘 다 임시기관이니 두 기관을 관리하고 기록을 남길 상설기관인 선공감을 같이 맡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선공감 제조를 계속 맡으면서 도로부설도감 부제조도 새로 맡아 총 5개 자리를 겸직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이번 일이 도성과 도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세금 정책과 상업 진흥과도 이어져 있으니, 한 사람이 맡아서 하는 것이 일관성 있으니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대군께서 인력이 분산되면 안 된다면서 도로부설은 도성 공사가 끝난 다음에 하자고 건의해주신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인력들이 분업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도 그렇고, 도로에 쓰일 재료를 수급하는 것도 그렇고 당연히 도성 공사부터 했어야 할 일이라 건의한 것이니 혹시라도 부담 갖지 마시오."

양녕의 말대로 칠주도 정벌에 쓸 무기를 만들 때에 이어 이번 도성 개축에도 분업이 도입되어 성과를 보고 있었다.

돌을 크게 쪼개는 것, 작게 다듬는 것, 운반하는 것 등등을 모두 익힐 필요 없이 하나만 제대로 익히면 되니, 비숙련자들도 금방 배워서 곧잘 해내고 당연히 작업 속도도 올랐다.

"확실히 일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분업한 효과도 있겠지만 무작정 데려다 시키는 대신 품삯을 주고 시키는 것이라 그렇겠지요. 요역으로 동원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제 발로 온 것치고는 많이 오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렇소. 대동법과 병행한 보람이 있구려."

전국적으로 시행하기에 앞서 대동법이 처음으로 적용된 곳은 조선 본토 남부지역이었다.

나라에서 제철시설을 두고 철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울산 등 기존에 철을 공납으로 내던 지역부터 공납품 대신 포목을 내게 한 것이었다.

"예. 일하면 포목을 준다고 하니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도 많지만, 세금을 포목으로 내야 하는 지역에서는 당연히도 엄청 많이 왔지요."

"이게 해결되어도 갈 길이 먼데 시작이 잘 풀려서 다행이오."

"그렇지요. 공납을 미곡과 포목으로 대체하면 공납품을 구하는 고생은 줄어들겠지만 이제 미곡과 포목을 한성으로 옮기는 게 문제입니다. 운송에 드는 비용이나 유실분 보충은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부담하는 것인데, 공납품은 귀한 것들이기는 하나 대체로 크기는 작았는데 포목이나 미곡은 크고 무거우니 어려워지겠지요."

"그렇다고 나라에서 운송비를 대주거나 유실분을 채워 주겠다 하면 운송비를 부풀리거나 유실했다 속이고 빼돌리는 이들이 나올 것이오."

"결국 운송비를 내리고 유실분을 적게 하는 것이 최선인데, 그러려면 도로를 깔아야 하지요."

돌고 돌아 자기가 맡은 도로부설도감의 일이 나오자 황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소. 도로가 제대로 깔리기 전에는 대동법을 시행해도 그 지역 주민들의 괴로움은 그대로고 괴로운 이유만 달라질 우려가 있으니 말이오."

"천천히 병행해서 하는 수밖에 없지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경세제민의 길이 어디 쉽겠소. 저화(지폐)만 해도 그냥 도장 찍은 종이를 돈으로 쓰라고 한 것이 아니라 관청에 가져가면 정해진 양만큼의 쌀로 바꿔 준다고 해 가치를 부여하고, 세금으로 내라고 해 필요성을 주었는데도 제대로 퍼지지 못했지 않소."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생산할 수 있는 쌀이나 포목을 두고 굳이 저화로 바꾸어서 거래하고 세금을 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결국 화폐를 널리 쓰이게 만든다는 것은, 먹을 수 있는 미곡도 아니고 입을 수 있는 포복도 아닌, 구리조각과 종잇장을 가치 있다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오. 그것도 남북으로 배 타고 말 탄 외적들에게 백여 년을 시달려 의식주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백성들에게 말이오."

"힘든 일이로군요. 대동법이 시행되고 화폐가 널리 쓰이게 된다면, 백여 년이 후에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잘 다룰 수 있을련지."

막연한 황희의 말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육백 년 내로는 그 어떤 현인과 그 어떤 나라의 조정이라도 돈의 값어치와 흐름을 읽고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오."

황희는 양녕의 그 말에 왜 딱 떨어지는 오백 년도 아니고 육백 년일까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저 많다는 비유로 쓰이는 오백 년보다도 더 걸린다는 뜻으로 말했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 *

한참 뒤.

한성부. 도성수축도감.

채석장 시찰을 마치고 도성수축도감에 돌아온 양녕과 황희는 공조참판 이천과 함께 진행 중인 공사에 관해 토의하고 있었다.

"돌을 옮겨오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대신 역시나 기존 토성을 헐고 겉을 돌로 쌓아 올라가는 것에서 시간과 품이 많이 듭니다."

이천의 말에 황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차피 성벽을 통째로 돌로 쌓는 것도 아니고, 석성도 속은 흙으로 채우지 않는가. 그냥 토성 겉을 돌로 쌓아 보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천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양녕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겉에 돌을 쌓아 올려서 속에 채운 흙과 연결된 것이 없으면 쉽게 쏟아지는 문제가 있소. 그걸 막으려면 중간중간 뒤뿌리가 긴 돌들을 넣어 흙과 서로 맞물리게 해야지. 그렇게 보강해 가며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제 무게에 눌려 아래가 부풀거나 꺼지는 것이 성벽이오."

"겉에만 씌워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성벽을 비스듬하게 만들면 흙에 기댄 형상이 되니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번 개축은 도성의 위신을 위해서 쌓는 것이니 곧고 높게 세워야 하오. 그렇게 쌓은 다음 성벽 위에도 석회를 깔아서 빗물이 성벽에 스며들어 돌을 물고 있는 흙을 씻어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오."

양녕의 설명에 황희가 알겠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토성으로 쌓을 때와 다르게 따져야 할 게 엄청 많군요. 그래도 대군께서 도움을 주시니 문외한인 저도 이해가 잘 됩니다."

다른 모든 자리를 내려놓고 축자후의 작위만 남긴 지 얼마 안 된 상태인지라, 양녕에게 우호적인 신하들조차 종친이 관직을 계속 가지고 있는 전례가 생길까 봐 다른 자리에 임명하자고 건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기술이나 공사 진행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도 양녕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조언을 해 주는 것일 뿐이고, 세부적인 업무와 책임은 황희에게만 몰려 있었다.

"대군께서 축성을 엄청 잘 아시는군요. 역시 칠주도에서 석성목에 이름답게 석벽으로 외성을 쌓으시고, 왜인들의 성을 몇 개나 함락시키신 분답습니다."

이천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양녕은 잠시 당황했다. 적들의 성은 토축 위에 올린 것이 태반이고, 석성목 외성도 한성부 도성에 비하면 돌담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칠주도에서 익힌 것이 아니라 원래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탓에 양녕으로선 대답하기가 애매하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밖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판윤 대감! 큰일 났습니다!"

갑자기 불린 황희가 놀라서 장지문을 열자 관원 한 사람이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큰일이라니?"

"공사하다가 돌이 떨어져서 사람이 다쳤습니다!"

* * *

잠시 후.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에 급하게 작업현장으로 간 양녕과 황희, 이천이 본 것은 땅에 세로로 꽂혀있는 긴 석재와, 근처 천막 그늘에서 팔뚝을 부여잡고 있는 인부 한 사람이었다.

"자네가 다친 사람인가? 많이 다쳤는가?"

환자가 생기면 치료하려고 자원해서 와 있던 승려 한 사람이 인부의 팔에 부목을 대고 감아 주며 대신 말했다.

"떨어지는 돌에 빗맞았습니다. 다행히 뼈가 상하지는 않았으나 근골이 놀란 터라 부목을 감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니 다행이군. 대체 무슨 일이었나?"

한숨 돌린 양녕의 질문에 이번에는 인부가 직접 대답했다.

"중간에 넣으려고 뒤뿌리가 긴 돌을 몇 사람이서 밧줄을 걸어 옮기다가 그만 밧줄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잘못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놀랐을 텐데 어찌 잘못을 묻겠는가. 알겠네, 잘 쉬게나."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인부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옆 천막으로 자리를 옮긴 양녕에게 이천이 조용히 말했다.

"역시 큰 공사를 하다 보니 사상자는 피할 수 없겠군요.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다치고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을 감안해야 한다니, 왜 성을 쌓는 인부들을 축성군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요. 다치고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많이 나와서는 안 되오. 지금 진행 중인 것은 그저 성을 쌓는 게 아니라, 나라의 큰일에 요역을 지우는 대신에 품삯을 주고 사람을 쓰는 첫 사례요. 여기서 죽고 다치는 이가 많이 나와 버리면, 차라리 요역으로 사람을 많이 끌고 와서 일을 시키는 것이 사고가 덜 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올 것이오."

양녕의 단호한 말에 이천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다치는 사람이 더 적다면 그리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번 공사처럼 일하고 포목을 받고 세금도 포목으로 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면, 나중에 포목을 동전으로 대체하면 큰 충격 없이 화폐를 쓰게 만들 수 있소. 이것 말고도 품삯을 주는 방식을 정착시키려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소. 만일 다치는 이가 많아서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면, 다치는 이를 줄여서라도 정착시켜야 하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돌을 떠내다 다치는 사람은 화약을 쓰면서 이미 줄였소. 그럼 이젠 돌을 들고 옮기고 쌓느라 다치는 사람을 줄여야겠지."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만들어야 할 물건이 있소. 그걸 쓰면 될 것이오."

이천의 질문에 바로 대답한 양녕은 잠시 생각한 뒤 이어 말했다.

"상의원의 장 별좌를 불러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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