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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85화 (8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5화

85화

1422년 5월 초순 모일.

한성부 숭례문 인근.

양녕이 한성에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다.

겸직하던 다른 모든 자리에서 완전히 내려오고, 사실상 명예직이나 마찬가지가 된 축자후만을 남기게 된 양녕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도성 안 도로를 천천히 걸으며, 오랜만에 보는 한성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돌아오신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릴 때까지 시간을 보내시는가 봅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본 양녕이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방촌 대감 아니시오. 한성에 돌아오신 게요?"

양녕의 인사를 받은 황희가 담이 작은 사람은 마주치기만 해도 기죽을 만큼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예, 얼마 안 됐습니다. 오랜만에 한성 공기를 마시니 좋군요."

황희는 양녕의 방탕한 행실이 한참 문제가 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이방원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갔었다. 얼마 뒤 양녕이 폐세자되고서도 돌아오지 못하다 최근에야 겨우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방촌 대감께서 나 때문에 고초가 많으셨소."

"아닙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지요. 사간원에서야 그게 일이니 저를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올렸겠지만, 반대하는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서 이조에서 일하게 하자는 의견은 있었지요."

양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오 태백으로까지 여겨지면서, 양녕의 폐세자에 반대했던 황희는 졸지에 양녕의 진가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만 양녕이 이도에게 세자를 넘기려는 깊은 뜻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을 뿐인 셈이 된 것이다.

"그래도 너무 오래 고생하셨습니다. 거의 4년간 유배지에 있던 것 아닙니까."

"대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당연한 과보이지요. 어찌 불만을 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양녕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맞으나 세자를 넘기려던 것만 못 알아챘던 것처럼 말하는 황희를 보고 양녕은 웃음을 참았다.

황희가 유배 전에 보았던, 김홍빈이 빙의하기 전의 양녕은 진짜 난봉꾼에다 무뢰한이었으니 진가고 뭐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세자쯤 되는 사람이고 나이도 젊으면 그 정도 사고는 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양녕을 옹호했음을 원래 역사를 통해 뻔히 아는 양녕이었지만, 굳이 지적할 이유도 없어서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구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여기에 오셨소?"

"유배 전에 있던 판한성부사 자리, 아니 지금은 군현의 제도가 달라져서 한성판윤이 된 그 자리에 다시 임명되었습니다. 도성인 한성부를 관리하는 수령이니 도성 정문인 숭례문에 오는 것이니 이상할 것은 없겠지요. 그나저나 대군을 이렇게 밖에 계속 서 계시게 하고 대화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 * *

잠시 후.

양녕을 근처 관아로 자연스럽게 안내한 황희는 다모에게 차를 내오라 하고는, 양녕을 상석에 앉히고 자신은 다른 의자에 앉았다.

"새로 생긴 관청인가 봅니다."

"임시 관청입니다. 성벽이 무너진 곳이 많아 보수하기 위해 만들어졌지요. 이름은 도성수축도감이라 합니다."

당시의 한양도성은 흙을 다져 올려 쌓은 토성이었다. 상부 폭 18척, 높이 25척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이었지만 재료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흙으로 쌓은 것이니 비가 많이 오면 허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그러면 석성으로 고쳐 쌓는 것이오?"

"예. 전부 석성으로 쌓고, 만일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인왕산 아래에서 남산까지, 즉 다른 나라 사신들이 와서 보는 구간만은 돌로 쌓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도성 성벽이라는 것이 실제로 전투에 쓰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허물어진 곳이 생겨서 아예 석성으로 바꾸려는 것, 잘 안 풀리면 일부만 쌓을 계획인 것과 그 구간 위치까지 원래 역사와 똑같았다.

"진행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아직 계획을 짜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까 보셨던 숭례문 근처도 그대로지요. 애초에 도성수축도감 자체가 지난달에 생겼습니다."

도성수축도감은 원래 역사보다 몇 달은 늦게 생긴 것이었다.

"건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군께서도 정동군을 이끄시더니 축성에 관심이 많아지신 모양이군요. 대사공(공조판서)입니다. 이미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임곡(최윤덕)이 새롭게 대사공이 되었지요."

"한성에 돌아오고 며칠 정신이 없어 지금 처음 들었소."

"그러셨군요. 대군과 함께 칠주도 정벌과 관리에 공을 세웠던 만큼 일을 아주 잘합니다. 이번 건의도 이치에 합당한 것이라 주상 전하께서도 듣자마자 바로 도성수축도감을 만들라 하셨지요."

최윤덕이 공조판서가 된 것과 성벽 개축을 제안한 것, 그 내용은 원래 역사와 같았다. 하지만 최윤덕의 건의와 도성수축도감이 생긴 시기는 원래 역사와 달라져 있었다.

'공조판서가 된 것은 같지만 칠주도 정벌로 군사행정이나 축성, 공성전 등을 겪고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어서 행동에 변화가 있던 거겠지. 조도표도 그렇고 이제 내가 개입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많이 바뀌기 시작하는군.'

양녕은 또 크게 달라진 것이 있나 확인하기로 했다.

"칠주도에 가 있는 동안 별일이 다 있었나 보오. 대감께서도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는 것은 알지만, 혹시 다른 큰일이 있었는지 아시오?"

"선공감에서 얼마 전에 끝낸 수로 공사가 크다면 큰일이었지요. 그래도 완성되고 나니 칠주도에서 들어오는 각종 자원들이나 김해에서 만들어진 철을 들여오는 것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도로와 건설을 맡은 관청인 선공감과 수로가 언급되자 양녕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어디와 어디를 잇는 수로였길래 그렇소?"

"아, 그걸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제물포에서 한강을 잇는 수로입니다. 강화도까지 돌아서 오면 거리도 멀고 암초에 배가 상하는 경우도 많아서 파게 되었습니다."

"제물포에서 한강이면 부평을 지났겠구려. 큰 바위에 막히지는 않았소?"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원래 역사에서 완공에 실패하고 굴포천으로 남게 된 그 수로가 맞는지 확인하려던 것이었지만 황희가 예상외로 놀라는 바람에 양녕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부평은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니, 산 사이의 평지라 해도 산세가 땅속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니 팠을 때 큰 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오."

"그렇군요. 대군께서는 역시 통찰이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시오. 그나저나 정말로 바위가 있었다면 어떻게 뚫었소?"

"인력으로 안 되길래 화약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지축이 뒤흔들리더군요."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양녕이 다시금 확인했다.

"화약을 썼단 말이오?"

"예. 두 분 전하는 물론이고 대소신료들도 과연 화약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위력을 낼 수 있는지 이 기회에 알아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특히 폭파를 주관했던 군기시정은 화포나 화약으로 적들의 요새를 날려 버릴 때 참고가 될 것 같다면서 신이 나서 열성적으로 나섰습니다."

군기시정 최해산이 화포와 화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양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별문제 없이 폭파는 성공했나 보오."

"예. 쪼개려다 실패했던 쐐기 구멍마다 화약을 채우고 터뜨리니 단숨에 박살이 났습니다. 그 뒤로는 별 어려움 없이 수로를 팠지요. 그걸 보시고 주상 전하께서는 이제 큰 바위가 막아도 화약으로 깨 버릴 수 있으니 전국 곳곳에 도로를 깔려 하십니다. 이를 위해 선공감에 시키는 대신에 임시 관청인 도로부설도감도 새로 만들라 하셨지요."

"도로를 말이오? 칠주도와 김해의 물자는 이제 수로를 통해서 한결 편히 오가게 된 것 아니었소?"

"다른 물자를 나르기 위해 만드는 것입니다. 대군께서 쓰신 국부론이라는 책 덕분이지요. 거기 담긴 경세제민의 이치에 조정의 모든 이가 감탄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백성들이 공납하는 괴로움을 더는 것이 우선이니 대동법을 먼저 도입하기로 했고, 그러려면 도로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지요."

원래 역사에서도 이미 이도 재위 초기에 공납의 폐해를 지적하고 대동법에 해당하는 제도를 시행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소. 무작정 공납을 쌀이나 포목으로 대신해 버렸는데 막상 조정에 필요한 물건을 도성 근처에서 살 수가 없으면, 쌀이나 포목을 짊어지고 전국으로 사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오. 그런 일을 막으려면 도로를 통해 쉽게 오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지."

조선 교통의 가장 큰 걸림돌은 땅 그 자체였다. 산지가 많고 그나마도 매우 단단한 화강암이 대다수라 길을 내기 어려웠다. 평지도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고 겨울이면 땅속까지 얼어붙는 기후 때문에 진창이 되어 유지하기 어려웠던지라 조선은 어지간한 운송은 강과 바다를 통한 수운으로 버텨야 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도로가 깔리고 전국에 물산이 돌기 시작하면 점차 화폐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화폐까지 말이오?"

급격한 화폐 개혁이 가져오는 충격을 알기에 양녕이 걱정스럽게 묻자 황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 번에 바로 도입할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화폐를 쓰게 만들기 위해 무작정 곡물과 포목으로 거래하는 것을 법으로 막고 저화(지폐)만 쓰게 했는데, 국부론을 읽고 나서 관리들 모두 그것이 왜 제대로 된 정책이 아니고 실패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우선 물산을 돌게 해 전국의 상공업을 활발하게 만든 다음 곡식과 포목으로 거래하던 것을 천천히 화폐로 대체할 것입니다."

"점차 도입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오. 그런데 화폐 재료는 충분하겠소?"

"대군께서 칠주도를 정벌하셔서 구리 광산을 많이 확보했으니 해볼 만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동전만으로 어렵다면 은전이나 금전도 도입하면 될 것이고, 장차 조총을 철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기존의 구리 조총들도 녹여서 다른 데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해도 따지고 계산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겠소."

"그래서 이전에는 한성부의 시장만 관리하던 경시서를 평시서라 고치고, 전국의 상공업과 화폐에 관한 일을 모두 맡겼습니다."

"대단하오. 그나저나 방촌 대감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어떻게 그리 잘 아시오?"

양녕의 말에 황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전부 제가 맡아서 하는 일이니 잘 알 수밖에요."

짧은 침묵 후에 황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저는 한성판윤 겸 도성수축도감 도제조 겸 경시서 제조 겸 선공감 제조입니다. 조만간 도로부설도감이 생기면 그 도제조도 겸하겠지요."

그 기나긴 직함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도성수축도감 관청에 들어오셨던 게였구려."

"예. 여기서 업무를 보고 있다가 일 때문에 숭례문을 보러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큰일이겠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도울 것이 있으면 돕겠소.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이 동북면의 일이기는 하나 지금 방촌 대감께서 맡아서 하는 것들과 제법 관련 있기도 하니 말이오."

양녕의 그 말에 황희는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처럼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군. 정말 감사합니다. 한 시름 놓았습니다."

"아니오. 나라의 중요한 일을 돕는 것이니 감사받을 일도 아니지. 그럼 난 이만 연회에 늦지 않게 가봐야 할 것 같소."

"예, 살펴 가십시오."

황희의 건강이나 업무량을 잘 관리해줘서 원래 역사보다도 오래 살면서 일하게 만들려는 속내는 꿈에도 모를 황희의 인사를 받으며 양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한참 뒤.

경복궁 경회루.

"내 일찍이 이렇게도 즐거운 적은 없었소. 오늘은 오랜만에 나와 내 아들이 재회한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이니 경들도 마음껏 즐기시오!"

호탕하게 외친 이방원은 손에 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초저녁이었지만 이미 취기가 제법 오른 모습이었다.

"아바마마. 너무 과음하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주상! 양녕이 알려준 비방 덕분에 고질병이던 종기도 씻은 듯이 나은지가 오래이니 오랜만에 이 정도 마시는 것쯤은 괜찮소. 많이 취하면 또 어떻습니까? 내 장성한 아들들이 이리도 듬직한데!"

한껏 기분이 좋아진 이방원은 이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을 붙잡고 무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원래 술이 약하던 효령대군은 이미 취했는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아버지인 이방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양녕에게 다가온 이도가 말을 걸었다.

"형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예,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더 드실 것 같으니 내일은 기침하시는 데로 꿀물을 올리라고 미리 내관들에게 말해 둬야겠습니다."

"크게 탈이 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바마마도 말씀하셨지만, 형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치료하고 나서 종기로 시달리시는 일이 없어지고 건강도 좋아지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형님께서도 아바마마가 많이 그리우셨나 봅니다. 조금 전부터 계속 흐뭇한 눈으로 아바마마를 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까?"

"예.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갈 정도로 그리우셨나 보군요."

"그랬나 봅니다. 그래도 바뀌어서 정말 다행이고 경사에요."

"티 안 나게 많이 취한 건 아니시지요?"

무슨 뜻인지 모를 양녕의 말에 걱정스러워하는 이도의 말에 대답 대신 슬쩍 웃어 보이며, 양녕은 경회루 바깥으로 보이는 반보다 조금 더 차오른 달을 흘끗 보았다.

1420년 5월 10일. 오늘은 원래 역사에서 이방원이 사망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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