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4화
84화
"영토, 교역, 화포, 화약, 금은에 물소뿔까지 두루 갖춘 섬이니, 칠주도를 얻은 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이 순식간에 강해지겠군요. 이런 걸 알았다면 절대로 승인해 주지 않았을 겁니다."
"명나라가 알았어도 그 가치를 몰라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총알 재료가 되는 납 광산과 거대한 석탄지대도 있소. 게다가 자원이라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만, 이미 검술에 뛰어난 시마즈 방계 무사들을 가문째로 조선으로 데려갔고, 섬이나 농사짓기 부적합한 땅에 목축을 하면 군마도 키워 낼 수 있소."
옆에서 듣던 최만리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저는 그저 소석탄으로 제철하는 기술을 숨기시려 동래와 석성을 잇는 항로에서 떨어진 곳으로 교역항을 옮기셨다고만 막연히 생각했는데, 철저히 숨기고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엄청 많이 있었군요."
"그렇네. 섬 중에서도 평호도로 옮긴 이유는 칠주도 본섬에서 떨어져 있으니 누가 몰래 내륙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도 좋고, 명에서 평호도까지 오는 길에 있는 치하도의 여러 섬들은 다 크기가 작고 평호도도 작으니 칠주도도 비슷한 크기라 생각하게 만들 수 있어서라네."
"그런데 이건 사실을 숨기는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안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심시킨다고 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네. 일본에서 명나라로 들어오던 무역품이 갑자기 줄어들고 조선이 조공으로 많이 가져오기 시작한다면, 조선이 칠주도를 제압하고 일본의 교역로까지 틀어막았다고 여길 것이야. 그렇다면 다시 조선이 요동으로 눈을 돌릴까 걱정하겠지."
"얼추 알겠습니다. 조선이 계속 남쪽의 별 것 아닌 작은 섬을 제압하지도 못하고 발을 빼지도 못해 붙잡혀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명나라를 안심시킨다는 말씀이셨군요."
"그래. 그걸 위해서는 일본의 혼란한 현실을 숨기고 건재하다고 속여야 하네. 그 방법이 교역항인 것이지. 어차피 평호도에 올 수 있는 것은 오우치 가문뿐인데, 오우치 가문은 만에 하나라도 칠주도가 다시 일본에 넘어가는 순간 입지와 출신을 살려 외교와 교역으로 얻던 이득을 모조리 잃을 테니 다른 왜인들이 평호도까지 오게 두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와 말도 맞춰줄 거야."
양녕의 말을 부윤이 받아 이었다.
"칠주도 크기나 자원 얘기야 말을 안 하면 그만이고, 오우치 가문이 삼한 혈통인 건 모를 테니 왜인이 직접 일본 정황을 말한다 생각하겠군요."
"그렇소. 일본에서 오는 품목을 다 틀어쥔 오우치 가문이 다른 나라 상인들에게 일본은 어디를 가나 자기네만큼 부강하다고 넌지시 흘리는 것이지. 자신들이 제일 잘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잘났다고 하는 것이니 솔직하고 겸손하게 사실을 말한다 생각할 것이오."
"일본이 칠주도를 되찾으려 들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일본이 전체적으로 부강하다면 조선이 일본을 압도하지도 못하고 칠주도를 방어하느라 남쪽으로 군사력을 몰아두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밀무역이 들키면 벌을 받을 텐데, 명나라 상인들이 평호도에 와서 들은 일본 소식을 명나라에 가서 말하고 다니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명나라 상인이라고 찍어서 말한 적 있나?"
"예?"
역으로 돌아온 양녕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최만리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쪽 바다에 일본이 있다면 남쪽 바다에는 유구국이 있네. 유구 역시 명나라의 조공국일 뿐만 아니라 조선에 조공을 바치거나 일본과 교역하기도 하였네. 칠주도가 조선 땅이 되었다고 하나 오우치 가문을 통해 일본과 교역할 수 있으니 유구인들도 평호도에 교역하러 올 것이야. 그들을 통해 명나라에 간접적으로 일본 소식과 무역품이 퍼지게 할 걸세."
"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역항을 설치했다는 사실만 퍼져도 제압이 힘들어 유화책을 병행한다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일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건 어떤 책략입니까? 정이대장군은 이미 오우치 모리하루를 완전히 믿고 따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어차피 태수와 호족들의 이익을 조율하는 대표에 불과하오. 내가 흐리려는 판단은 그런 태수와 호족들을 포함한 왜인들 대다수의 눈과 귀요. 이것 역시 오우치 가문을 통할 것이오."
양녕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인 부윤과 최만리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오우치 가문이 일본에 팔 포목이나 칼 등은 조선과 직접 거래한 것이고, 교역항에서 사가는 명나라 물건들은 밀무역상이나 유구 상인들을 통해 들어온 것이오. 하지만 오우치 상인들은 일본 상인들에게 팔면서 이것들이 전부 평호도 교역항에서 조선이나 명나라 상인들에게 산 것이라고 출처를 속일 것이오."
"그러면 다른 일본 상인들도 평호도에 와 교역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 삼한 혈통인 오우치 가문 아닌 왜인들은 칠주도를 지나 평호도까지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면 될 것이오. 조선 조정을 무시하고 밀무역을 시도했다가 걸리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오우치 가문을 거치느라 값이 조금 오르기는 해도 과하지만 않다면 얌전히 오우치 가문을 통해 살 것이오. 애초에 명나라에 조공했을 때에도 조공품은 전부 정이대장군 손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그때와 별반 차이도 없고 말이오."
"값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데도 오우치 가문이 교역품 출처를 속이게 하신다면 다른 이유가 있겠군요."
"명나라 상인들이 칠주도까지 와서 교역하는데 그들이 칠주도의 크기조차 제대로 모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하지 않겠소?"
부윤도 최만리만큼이나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명나라에 진실을 알리면 조선을 쉽게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나라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은 떠올리지조차 못하겠군요."
"거기에 더해서 명나라 물건들도 일본으로 계속 들어오고 있고 가격도 크게 높지 않으니, 오우치와 조선의 보복을 감수하고 밀무역하는 모험을 할 필요도 없소. 그렇게 안주한 채 오우치 가문을 통해서만 교역을 하다 보면 장차 바깥세상이 어떤지는 물론이고 먼바다를 항해하는 법조차 잊게 될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부윤이 스스로 지금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조선은 칠주도를 장악해 영토와 자원을 모조리 얻었고, 오우치는 조선과 손잡고 일본의 무역을 독점해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명나라는 조선이 작은 섬인 칠주도를 큰 이득도 없이 겨우 유지하면서 발목 잡혀 있다 생각하고, 일본은 오우치가 교역한 물건을 일본에 적당한 가격으로 들여와 준다 생각하게 되었으니 두 나라 다 안주하겠지요. 칠주도의 모서리인 평호도에 교역항을 두는 것 하나로 명과 일본을 동시에 잠재웠으니, 그야말로 진신두의 묘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윤의 칭찬에 양녕이 기분 좋게 웃는데, 옆에서 최만리가 조용히 물었다.
"저…… 진신두가 무엇입니까?"
"허허, 오로(烏鷺)를 모르는 것을 보면 정말로 착실하게 공부만 했나 봅니다."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부윤을 보고 양녕도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러게 말이오. 그렇다고 또 가르쳐 주면 저 착실한 승상이 좌은(坐隱)에 빠져서 장래를 그르칠까 걱정이오."
"오로하고 좌은은 또 무엇입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진지해지고 모르는 말이 나오자 잔뜩 긴장한 최만리가 작아진 목소리로 묻는 것을 보고, 더 재미가 동한 양녕과 부윤은 어떻게 더 장난을 칠까 궁리하며 슬쩍 눈빛을 교환했다.
* * *
며칠 뒤.
진주부 김해군.
"2년 전보다 제철시설이 엄청 늘었군. 거의 마을이라 해도 될 정도야."
"입지가 좋아서 그렇습니다. 낙동강이 지나니 배로 소석탄을 들여오고 만든 철을 내보내기에도 좋고, 고을 안에서도 철이 날 뿐만 아니라 서쪽 창원과 북쪽 울산에서 나는 철을 들여오기에도 좋습니다. 가락국이 강성했던 이유와 김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다만 낙동강이 조금만 더 넓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긴 합니다."
낙동강 하구 평야는 가락국(금관가야)이 처음 세워졌던 고대에는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며 낙동강을 타고 온 퇴적물이 쌓여 형성되어 갔다. 그 결과, 바다였던 김해만이 육지로 바뀌면서 원래의 유리한 입지를 잃은 가락국이 쇠퇴하고 말았으니 정확한 평가였다.
"그래도 낙동강이 이보다 더 넓고 항구로 쓰기 좋았으면 큰 고을이 이미 들어서 버려서 제철시설을 못 세웠을 수도 있었지 않겠나. 그나저나 정말로 자네가 물의 기운이 강한가 보군. 여기서 아예 자리 잡고 제철시설 총괄을 하게 되다니 말이야."
양녕과 나란히 걸으며 제철시설을 둘러보던 이비가 그 농담에 피식 웃었다.
"이제 쇳물 냄새까지 좋아지는 걸 보니 진짜 그런가 봅니다. 그나저나 이제 한동안은 칠주도에 안 돌아가시겠군요. 봉토가 그리워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대마도를 떠난 참이라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리워질 만큼 칠주도에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오히려 대마현 주민들이 내가 그리웠다며 엄청 환대하긴 하더군."
"대마현 주민들이요? 대마도에는 얼마 안 계시지 않았습니까?"
"주민들이 말하기를, '산속에서 추위에 시달리고 범을 두려워하며 화전을 일구고 살던 자신들인데, 따뜻한 남쪽 섬에 옮겨 주어 추위 걱정 호환 걱정을 덜었다. 이제 걱정 없이 농사짓고 은 캐고 나무해 팔고 고기 잡아 살 뿐만 아니라, 내가 가르쳐준 산을 깎고 바다 메우는 재주 덕분에 칠주도 곳곳에서 모셔 가서 대우받으면서 일도 하게 되었으니 내 덕분이다.' 뭐 그러더군."
"맞는 말이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대마도에 들렀을 때도 주민들은 천모만에 뜬 섬들을 목표이자 기준으로 삼고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워 자신들이 살 땅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살게 된 것은 노력한 덕분이지만, 노력할 기회를 준 것은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고맙네."
이비의 칭찬에 흐뭇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양녕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건물은 그냥 생산된 연철이 비를 맞지 않게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양녕의 시선을 따라간 이비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양녕이 보고 있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외벽에 걸린 물건이었다. 양녕은 말없이 벽으로 다가가 그 물건을 살펴보았다.
얇은 나무판 위에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규칙적인 줄이 그어져 있었고,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는 점마다 작은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몇몇 쇠못에는 색깔 있는 끈이 묶여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이게 뭔가?"
양녕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아니라 놀라움이 담겨 있었지만, 그 감정을 미처 읽어 내지 못한 이비는 그저 양녕이 처음 보는 물건이라 궁금해한다 생각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로는 생산된 연철의 양을 나타내고, 가로는 날짜를 나타냅니다. 그날 날짜에 해당하는 선과 생산한 연철량에 해당하는 선이 만나는 못에 색깔 있는 끈을 묶어 늘어뜨리면 지난 며칠간 하루에 얼마나 생산되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어서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정말로 막대 그래프가 맞았군. 그것도 종이를 쓰지 않아도 되고 끈을 풀고 묶어 무한정 쓸 수 있으니 종이가 귀한 이 시대에 이만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식을 풀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지.'
양녕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는 티가 나지 않게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비에게 물었다.
"대단한 물건이군. 이름이 무엇인가?"
"조좌표라고 합니다."
"끈으로 나타낸 좌표인가. 알기 쉬운 이름이군. 만든 것은 누구인가? 내가 좌표하고 소수를 가르쳐 줬던 당시의 산학박사 가운데 한 사람인가?"
"아닙니다. 주상께서 얼마 전에 만드셨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양녕은 진심으로 놀라며 물었다.
"주상께서?"
"예. 산학박사들이 좌표에 관한 것을 연구하고 정리해 올린 것을 보시더니, 바둑판처럼 줄 그은 것 위에 전후와 좌우의 위치를 한눈에 들어오게 나타낼 수 있다면 다른 것, 예를 들면 수량과 시간도 나타낼 수 있지 않겠냐며 그 자리에서 지시하셨습니다. 지금은 한성부 안에서는 안 쓰는 관청이 없을 것이고, 조만간 지방관들에게도 견본과 책을 보내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놀라움이 기대감으로 바뀐 양녕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칠주도에 있는 동안 조선 본토도 많이 달라져 있겠군. 한성부에 돌아가서 뭘 더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