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2화
82화
1422년 3월 하순 모일.
녹아부 녹아목, 청수성 저택.
'확실히 큐슈의 유서 깊은 대호족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가문답군.'
그런 생각을 하며 양녕은 악사들의 연주와 진귀한 해산물 요리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석성목에서 칠주도 반대인 여기까지 오시느라 여독이 많이 쌓이셨겠습니다."
심구풍의 말에 양녕은 상념에서 돌아와 대답했다.
"괜찮소. 천천히 돌아보며 오느라 힘들지도 않고, 비록 여기가 내 영지는 아니지만 같은 칠주도 영주로서 공의 얼굴은 보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해진 심구풍이 옆에 두었던 비단 보자기를 양녕 쪽에 놓고 펼쳤다. 보자기 안에 들어 있던 크고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열자 각각 연갈색 덩어리와 나무 빗 하나가 들어있었다.
"한성부로 가시는 대군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설탕과 빗입니다."
양녕이 잔을 소반에 내려놓고 몸까지 돌려 흥미롭게 물건을 살피자 심구풍이 신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유구국을 통해 어렵게 묘목을 구한 다음 대군께서 주신 책대로 키웠더니 정말로 사탕수수가 자랐습니다. 아직 저희가 키우는 법이 미숙해서 줄기를 많이 얻지는 못했고, 그나마도 짧게 잘라 다시 땅에 꽂아 종자로 삼은 것들이 많아 즙을 짜서 설탕으로 만든 양은 이것뿐입니다."
"그럼 이게 녹아부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설탕이지 않소. 이런 귀한 걸 나에게 줘도 괜찮겠소?"
"이것을 대군께 안 드리면 누구를 주겠습니까. 대군께서 안 계셨으면 아직 제대로 된 성씨도 가지지 못하고 칼질에만 의지해 살았을 저희의 큰 은인이신 대군께 드리는 선물로는 사실 너무 초라하다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게 말한 심구풍은 술병을 들어 양녕의 잔에 따르며 슬쩍 이어 말했다.
"사실 이게 처음으로 생산된 것이니 썩지 않게 옻칠이라도 해서 사당에 신체로 모시자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대군께 드리는 것이 마땅한 물건인 데다가 또 어찌 조선의 제후가 괴력난신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그렇게 대답하며 양녕이 미소지었지만, 심구풍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보다도 너무 뻔히 보이게 점수를 따려는 언행에 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저도 대군께서 하신 것을 본받아 사찰은 남기더라도 사당들은 줄이고 있습니다. 아마 나중에는 저희 가문의 조상이나 산신, 해신을 모시는 사당만 일부 남지 않을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런데 사당을 철거한다 하면 반대하는 이들이 있지는 않았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경하게 밀고 나간 데다가, 신벌은 고사하고 오히려 녹아부가 번성하기까지 하니 그런 말은 쏙 들어갔지요. 설탕 농사는 아직 막 시작한 상황이지만, 대군의 정벌로 칠주도가 평안해진 덕분에 먼바다에 나가지 않고도 특산품을 교역할 수 있게 된 덕분입니다."
먼바다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외부세계와 멀어졌다는 뜻이었기에 양녕은 한층 더 흐뭇해진 얼굴로 나무 빗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그 특산품 가운데 하나인가 보오. 아주 좋은 회양목 빗이로군."
양녕 입장에서는 이 지역 회양목 빗이 에도시대에는 일본 전국에 팔려 나가기까지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기에 한 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심구풍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대군께서는 안목이 높으신지라 바로 무엇인지 알아보시는군요. 녹아부 땅이 화산재로 된 지라 나무가 잘 크지 못하지만, 대신 천천히 자란 덕분에 결이 치밀합니다. 원래도 늦게 자라고 치밀한 회양목이 더욱 치밀해져서 빗 재료로는 최고지요."
"고맙소. 내 상투 틀고 의관을 정제할 때 잘 쓰도록 하겠소."
"잘 써 주신다면 제가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에 가시면 언제 또 오십니까?"
"언제일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안 올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자신의 가장 큰 조선 연줄인 양녕이 아예 가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는지 심구풍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행입니다. 대군께는 보답할 것이 정말로 많습니다. 성씨를 받고 조선의 봉신이 된 것은 물론이고, 동사부에 살던 서먹한 옛 분가들이 정동군을 도와 싸우고 성씨를 새로 받아 조선 본토로 넘어간 덕분에, 그 뒤로 녹아부 내부에서 불만을 품은 방계와 호족들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게 어찌 내 덕이겠소. 다 공께 정통성과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설탕 농사도 더 힘쓸 것이고, 녹아백 자리를 이을 맏이 말고 둘째와 셋째 아들도 좀 더 크면 공부를 시켜볼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혹시라도 공부할 책이나 가르쳐 줄 이를 구하기 어려우면 언제라도 말하시오. 내 기꺼이 돕겠소. 녹아 심씨 문중에서 급제자가 나오는 것을 본다면 내가 공께 받는 보답으로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소."
칭찬에 기분 좋게 웃는 심구풍을 보며 양녕이 미소지었다.
이미 호족 자제들을 한성에 유학 보내 계응국 자체를 강하게 만드는 중인 오우치 모리하루와 달리, 권력욕이 강한 심구풍은 다른 호족들은 공부시키지 않고 자식들만 공부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권력에 취하고 설탕 농사에만 집중하다 시기를 놓치고 영영 조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라. 그게 너희 가문과 녹아부에 어울리는 미래일 것이다.'
양녕의 미소 너머에 있는 생각도 모른 채, 심구풍은 그저 기분이 좋은가보다 생각하는지 자기도 즐거운 표정으로 따라서 웃고만 있었다.
* * *
며칠 뒤.
좌하부 남부 해안.
좌하부윤과 나란히 서서 간척 현장을 지켜보던 양녕이 손짓하며 말했다.
"저들이 간척 일은 잘하오?"
양녕이 가리킨 것은 감독이나 지휘 등 간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하고 있는 대마현 사내들이었다. 양녕이 보낸 것이 아니라 부윤이 직접 대마현에서 고용해 온 이들로, 간척이 진행 중인 칠주도 고을마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엄청 잘합니다. 역시 대마도에서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우던 이들답습니다."
"다행이구려."
양녕이 부윤의 말에 대답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부윤이 말한 대로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우는 대마도 간척은 듣기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뻘밭을 뭍으로 만드는 좌하부 간척과는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비슷한 환경을 간척 중인 조선 본토의 사수(현 만경강) 일대 백성들이 더 적임자였다.
"역시 대군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답게 재주가 뛰어납니다."
"내가 딱히 가르친 것도 없소. 궁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찌 간척하는 법을 알겠소. 그저 이리 간척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저들에게 말했을 뿐이오. 나머지는 저들이 지혜를 내고 열심히 노력해 이룬 것이고, 여기 와서도 마찬가지로 지혜를 내고 열심히 할 뿐이오."
부윤은 양녕의 말을 겸손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산으로 바다를 메운다는 거대한 규모, 실제로 성과를 냈다는 점, 해동의 오 태백으로 여겨지는 양녕이 직접 지시를 했다는 점, 그리고 가깝다는 점까지 더해져서 다들 대마현 주민들을 고용해 간척 중책을 맡기기는 하지만 대마현 주민들도 잘 모르는 분야의 간척이었다. 그저 지금 이주해 온 조선 백성들은 간척을 더 모르는 데다가, 실수가 있더라도 이미 양녕과 대마도에 가진 선입견에 취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뿐이었다.
결국 대마현 주민들은 차마 간척을 잘 모른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양녕 말대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 오시기 전에 들리셨던 포전부의 조선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거기도 새 중심지인 포전목 인근 뻘밭을 열심히 간척 중이긴 하지만 여기처럼 땅이 될 만한 뻘밭이 넓지는 않소. 대신 구중산에서 유황을 캐서 파는 것을 부업으로 삼는다 하오."
"그렇군요. 이주 온 조선 백성들이 다들 열심이라 다행입니다. 많이 번창해서 퍼져야 칠주도를 확실히 조선으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공감하며 끄덕인 양녕이 부윤에게 물었다.
"조선으로 만든다 하니 생각난 것인데, 추가적인 세금 제도를 적용하는 것은 어떻소?"
"잘 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정동군에 참전했다 전사해야 조선인으로 대우받았는데, 이제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잘해 수령에게 인정만 받으면 그때부터 조선인이 되고 세금도 바로 1할로 내려가는 것이니 다들 받아들일 만하지요."
"다행이오. 문제점은 없소?"
"문제점은 딱히 없습니다. 대신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오?"
잠시 생각한 부윤이 입을 열었다.
"왜인 세금이 3할인 것은 그대로지만 이전에는 정동군에서 일을 도우면 2할 5푼, 아예 병사로 들어오면 2할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동군이 해산되었으니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익혀서 바로 조선인이 되는 것 말고는 왜인들이 세금을 줄일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그건 부윤들의 자율에 맡길 생각이었소. 이미 여러 권한을 부윤과 그 아래 수령들에게 넘겨주고 있기도 했고, 곧 떠나는 판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시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생각해서 말이오."
"그러면 조언이라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서류로 남는 것이 아니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짧게 고민한 양녕이 끄덕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소. 우선 지금 토지 상황부터 알고 싶소."
부윤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양녕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대군께서 칠주도도 조선 땅이 되었으니 마땅히 태조대왕께서 만드신 제도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며 수조권을 개혁하신 것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까."
양녕이 실시한 수조권 개혁, 즉 과전법 얘기를 하면서 부윤이 목소리를 낮춘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세금 거둘 권한을 개혁한 게 아니라, 조선에 투항하고 살아남은 호족들에 대한 숙청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대놓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양녕도 부윤처럼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렇소. 수조권을 다시 나라에서 가져가 세금을 직접 거두겠다 했을 때 얌전히 내놓고 목숨을 건지는 대신 몰락하거나, 못 내놓겠다며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 일본 조정 몰래 땅을 완전히 사유화했던 이들만 소수 살아남은 것은 생각해 보면 참 재밌는 일이기도 하오."
원래 일본도 땅의 소유자인 조정이나 중앙 귀족이 세금을 거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산지가 많아 운송이 어렵고 현지 관리에도 써야 하며, 중앙에서 멀어서 통제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 남북조 내전까지 겹치면서 조정과 귀족들이 관리자로 파견했던 슈고와 호족들이 수조권을 위임받아 세습하며 사실상 지금의 영지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고려 말 비슷한 상황이던 권문세족을 과전법으로 몰락시켰던 사례가 있으니, 과전법을 시행하면 명분과 결과가 모두 확실할 수밖에 없었다.
"예. 조정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수조권을 명목상으로나마 남겨 두고 땅을 영지로 삼았던 이들은 몰락하거나 수군여단 병사들에게 몰살당했지만, 아예 가문 소유로 만들고 입을 싹 닦은 이들이 살았지요. 문제는 그다음 단계로 왜인들 땅을 가져다 조선 백성들에게 줄 명분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조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땅은 어떻게 확보한 것이오?"
"조선에 저항하다 몰살당한 호족 중에는 정당하게 땅을 소유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수조권과 상관없고 주인도 없게 된 그들의 땅을 나눠주었지요. 그래도 그것만으로 조선 백성들을 부양하기는 조금 벅차서 왜인들에게 고세율로 거둔 세곡 일부를 간척 공사 품삯 명목으로 나눠 주어 버티게 하고 있고, 새 땅이 간척되는 대로 그 지역을 간척한 이들에게 나눠 줘서 늘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간척에 열심이었군."
양녕은 그렇게 말하고 생각에 잠겼다. 간척하는 백성들이 서로 뭐라 지시하며 외치는 소리만이 멀리서 들리기를 잠시. 양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금 좌하부 북쪽으로는 숲을 개간하고 남쪽으로는 뻘밭을 간척해야 하오. 당연히 그 중심은 조선 백성이 되어야 그들이 개척의 공로로 새로 생긴 농지를 받아가 세를 늘리고, 남북 사이에 갇힌 왜인들은 확장하지 못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 백성들이 많이 왔다고는 하지만 원래 살던 왜인들에 비하면 수가 엄청 많은 것은 아니오. 왜인은 세금이 많고 조선인이 된 왜인이나 이주해 온 조선인들은 적게 내니, 길게 보면 조선인이 늘고 왜인이 줄어들 것은 자명하오. 하지만 이대로는 얼마나 걸려야 칠주도 사람을 모두 조선인으로 만들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소. 게다가 정동군이 해산하면서 조선에 동화되는 중간 과정도 없어져 문턱까지 높아졌지. 아마 공께서도 그래서 나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겠고."
양녕의 말에 부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전에는 조선 편을 드는 정도에 따라 2할 5푼, 2할로 내려가는 것이 있었으니 조금씩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말을 유창하게 해서 바로 조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해한 상황이 맞군. 그렇다면 해결책도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