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80화
80화
1422년 3월 초순 모일.
석성목 관아.
"축하드립니다, 대군. 이제 드디어 한성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서신을 읽는 양녕에게 최만리가 말했다.
한성부 방문 이후 2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칠주도에서 양녕이 직접 처리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들은 모두 종료되었다. 그리고 조정에서도 양녕이 한성으로 완전히 돌아와도 좋다는 서신이 온 것이었다.
"그렇네. 실권을 모두 내려놓고 한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이리도 바로 답이 오다니 대소신료들도 거의 만장일치이었나 봐. 역시 내가 중요한 광물들이 나는 칠주도를 가지고 있는 게 걱정이었나 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석탄을 만들 수 있는 찰기 있는 석탄이 난다는 것도 더해졌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나저나 나한테 축하한다고 하니 꼭 자네는 안 가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슬쩍 놀리는 듯한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대군께서 실권을 내려놓으시고 승상 자리도 사라지면 저는 그대로 대군께서 겸임하시던 석성목사 겸 석성부윤을 이어받아서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령 임기가 보통 30개월이고, 저도 승상을 그 정도 하긴 했지만 승상이 수령은 아니니 따로 계산한다 치면 크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닐까 해서요."
"자네만큼 축자국이, 정확히는 녹아부를 포함한 칠주도와 바다 건너 계응국까지 합친 이 일대를 잘 아는 관리도 없으니 그럴 만하지. 아바마마나 주상이나 일 잘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꾸준히 일 시키는 것을 좋아하시니 말일세."
"예. 저도 과거에 붙고 나서 한성에 오래 있던 것은 아니지만, 군기시나 이런저런 관청에서 화포나 다른 것을 개발하는 관리들이 그 자리에 오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군기시의 최해산을 말하는 것임을 파악한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화포에 능하고 또 좋아하기도 하는 이라면 화포 개발에 오래 두고 쓰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오래 쓸 수 있는 것은 그 자리가 오래 있다고 해서 권력과 이어지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네."
양녕은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수령이 임지를 파악하고 다스릴만하면 임기가 끝나는 문제가 있음에도 아직도 수령의 임기가 보통 30개월인 것은, 그 지역 출신을 피해서 수령을 보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토호들과 결탁하거나 자기 세력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네. 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그러한데, 직접 다스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 큰 섬의 정무를 맡아서 다스리는 승상이던 자네를 계속 여기서 쓴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런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네도 이제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해 보아야 장차 더 큰 일을 하지 않겠는가."
양녕의 덕담에 최만리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군. 하지만 아마 한성에 돌아가면 저보다도 대군께서 더 큰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자네야말로 좋게 봐줘서 고맙네. 그나저나 이제 떠나기 전에 칠주도를 한번 쭉 둘러보고 갈까 하네. 영영 안 돌아올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내 봉토 아니었는가. 서류로 보고받는 것 말고 직접 내 두 눈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보고 가야겠다 싶어서 말이야. 그래야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있고,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마침 석성목사 겸 석성부윤이 될 관리도 새로 왔으니, 다녀오시는 동안 업무를 넘겨주고 있겠습니다."
"자네도 갈 걸세."
뜻밖의 말에 최만리가 당황했다.
"저도 간단 말씀입니까? 업무를 넘겨주는 것 말고도 다른 처리할 일이 좀 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자네 혼자서 전부 했던 것도 아니고, 승천시에 있는 다른 문관들도 일 돌아가는 것은 다 알지 않나. 게다가 중요하고 급한 일은 다 끝났으니 자네하고 내가 한성에 돌아가는 것이지 않는가. 정 걱정이 되면 한성에 가는 건 좀 늦어지더라도 칠주도를 돌고 와서 업무를 알려주게."
단호한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데리고 다니시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있지. 자네가 수령으로 가건, 조정에서 일하건, 집현전에서 연구를 하건간에 다시 축자국 승상 자리가 생기지 않는 한 조정 신하 가운데서 칠주도의 일을 가장 두루 잘 아는 건 자네 하나일 걸세. 자네가 그 이점을 살려서 칠주도통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자네가 얼마나 잘 아는지와 상관없이 한 번 실제로 보아야 해."
양녕은 차분한 목소리로 최만리에게 계속 설명했다.
"설령 자네가 떠난 다음 칠주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해 보세. 직접 섬을 돌아본 적은 없지만 바뀐 섬의 상황을 잘 아는 이와 직접 섬을 돌아본 적 있지만 바뀐 섬의 상황은 잘 모르는 이가 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봤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지라 후자를 더 잘 아는 이라 생각할 걸세."
"지극히 현실적인 말씀이군요. 세태라는 것이 그럴만하지요. 제 장래에 관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지켜보고 싶으니 여기서 많이 배우고 많은 환경을 접하라고 말한 건 나였네. 그래서 섬을 같이 둘러보아 했던 말을 지키려는 것일 뿐이니 부담 갖지 말게."
배에서 내려 멀미에 시달리던 최만리를 처음 만나서 했던 말을 기억해 다시 해주었다는 사실에 감동한 최만리를 보며 양녕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어서 준비합세. 동쪽으로 출발해서 섬을 한 바퀴 돌 것이니 짐 잘 챙기고."
* * *
며칠 뒤.
석성목 중성.
출발하는 날이 되어 말을 타고 석성목 밖으로 향하면서, 양녕과 최만리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내성과 중성은 수로 하나 빼면 구분이 없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최만리의 질문에 앞서가던 양녕이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애초에 패가대 시가지가 나뉘어 있던 것을 그대로 쓰면서 이름만 붙인 것이니 사실 성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 특히나 비혜강 물줄기를 돌려 해자로 삼고 외성을 새로 쌓으면서 방어는 외성이, 교역은 외성에서 냉천만으로 낸 항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중요한 건 다 외성이 하니 내성과 중성은 더더욱 의미가 없지."
"그렇지요. 게다가 대군께서 쓰시는 관아는 내성 가장 안에 있고, 승상인 제가 일하는 승천시는 반대편인 중성 입구에 있다 보니 관청들도 그사이에 내성 중성 구분 없이 들어서 버렸고 말입니다."
"딱히 구분도 안 되면서 오가는 길이 성 사이마다 각각 다리 하나가 전부라 다니기 불편하니, 어쩌면 나중에는 각 성을 구분하는 물길을 모두 메우고 내성에서 외성까지 하나로 합칠지도 모르겠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데 앞에 마침 성복사가 보이자 최만리가 주제를 바꿨다.
"군승들이 거의 다 빠졌는데도 성복사는 요즘도 여전히 활발하게 뭔가 하는 것 같습니다."
최만리의 말대로, 정동군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왔던 군승들은 정벌이 끝나자 거의 다 조선 본토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이제 군승은 없지만, 자발적으로 석휴나 다른 승려들이 남지 않았나. 성복사 주지인 양예도 적극적인 사람이니 활발할 만하지."
"여전히 하는 일이 많은가 봅니다. 사실 군승은 정동군 관할이라 승상 업무가 아니기도 했고, 제가 불가의 일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오키타 지역 전투 이후로는 군승들이 치료하거나 장례 치를 일이 거의 없으니 칠주도 사찰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사당들을 조사해 괴력난신을 섬기는 곳들은 철폐하고 나머지는 사찰로 바꾸거나 합치는 것이 성복사와 군승들이 주로 하는 일이네. 여기까지는 알지?"
"예. 직접 하나부터 맡아서 한 것은 아니지만 성복사에서 조사해서 올린 내용을 토대로 사당을 철폐하러 보내거나 몰수한 기물들을 분류하는 일은 제가 했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거의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일본에서 하치만신을 가장 처음 모셨다던 사당에서 신체로 모시던 금덩어리를 몰수해 조정에 보낸 것이 벌써 오래전입니다."
"공적인 일은 끝난 게 맞네. 하지만 승가 안에서는 뭔가가 더 있는 게지."
"무슨 일입니까?"
"전조 고려에서부터 이어진 불교의 폐단이 큰 탓에, 아바마마 때부터 종파들을 통합하고 사찰들을 줄여왔네. 하지만 이번 정벌에 군승들이 기여한 것이 많아 불교에 대한 평이 좋아졌고, 아직 괴력난신과 불교의 영향이 큰 칠주도를 다스리려면 사찰과 승려들을 잘 활용하기도 해야 하네. 그래서 지금 승가에서 칠주도 사찰들을 모두 조선의 불교 종파에 나누어 속하게 하려는 것 같아."
최만리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끄덕거리고 말했다.
"목숨을 걸고 군승을 보내기도 했고, 칠주도의 괴력난신을 철폐하는 데에 도움도 되고, 조선이 칠주도를 다스리는 데에 쓸모도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게로군요. 석휴는 조선의 불교 종파와 사찰들을 지키기 위해, 양예는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셈이지. 참 우스운 일 아닌가."
승가의 일을 우습다며 일축하는 양녕의 말에 살짝 당황한 최만리는 양녕 왼쪽 손목에 감겨 있는, 이전에 양예에게 받은 자단목 염주를 슬쩍 보고 말했다.
"효령대군도 그러시지만 대군께서도 불가의 가르침에 관심이 많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대군께서 괴력난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귀신이 곧 보살이라는 궤변을 직접 논파하시기도 하고, 승록사에서 각 종파 판사들을 모아 호통을 치면서 법맥을 이어 나갈 방법을 알려 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관심이 많다는 게 곧 효령처럼 신봉하고 따른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칠주도를 다스리는 데에 불교가 쓰임이 많다는 것도 애초에 내가 시작한 말이었네. 이것도 그래서 하고 다니는 것이고."
왼쪽 손목의 염주를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든 양녕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법맥을 이어 나갈 방법을 알려 준 이유는 간단하네. 그들이 가진 기술과 건물, 법구 같은 것들 가운데 수백 년이 지나면 후대에 나라의 귀중한 보물로 여겨질 것들이 많음이 첫째일세. 그리고 여기 칠주도를 정벌할 때 군승들이 쓸모 있던 것처럼, 장차 동북면을 도모할 때에도 불교의 쓰임이 클 것이야. 그런데 내가 충분히 쓰기도 전에 도구가 사라져 버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 그 둘째 이유일세."
자신을 보면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백 년 뒤의 앞날을 다음날 계획처럼 태연히 말하고, 승가 전체를 도구쯤으로 여기는 양녕의 말투와 모습에서 풍기는 어떤 압도감 같은 것에 최만리는 살짝 굳었다. 양녕도 최만리의 그런 반응을 느꼈는지 화제를 돌렸다.
"냉천만에 배가 가득하구먼."
최만리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보니 과연 외성 건물들 사이사이로 돛대들이 잔뜩 보였다.
수군여단이 판옥선을 운용하면서 파악한 큰 선박의 장점이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조선 선박들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조선 본토와 칠주도를 오가야 하는 화물선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했다.
"소석탄이 많이 팔려 나가니 그럴 만합니다. 소석탄 싣는 배가 수시로 오가는 것을 보니 본토 남부지역에 그 양을 다 쓸 만큼 제철시설도 만들어진 모양이고요."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군. 철이라는 게 사실 부족하면 부족했지 남는 물건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제철시설도 더 많아질 것이고, 소석탄 필요가 늘어나니 여기 탄광도 활발해지겠지."
"제철시설이 많이 모여 있는 광경은 필시 장관이겠지요. 칠주도를 다 돌고 한성으로 가면서 볼 때가 기대됩니다."
진심으로 기대되는 표정을 하면서, 양녕과 최만리는 석성목 외성 문을 벗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