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9화
79화
특이한 칼을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는 모리하루에게 양녕이 말했다.
"조선에서 만든 칼이오. 한번 뽑아서 보시오."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는 칼날이나 칼끝이 양녕을 향하지 않도록 살짝 몸을 틀고 칼을 천천히 칼집에서 뽑아냈다. 열린 장지문으로 들어오는 대낮의 햇빛을 받은 칼날이 묵직하게 빛났다.
"이건……."
말을 흐린 모리하루가 눈을 빛냈다. 삼한 혈통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의 무사로 지낸 세월이 더 오랜 오우치 가문의 당주답게, 익숙한 손놀림으로 칼의 무게중심을 확인하고 손끝으로 칼날 두께를 가늠하더니 양손으로 들고 벽을 겨누어 보기도 했다. 이어서 칼날 옆을 조심스럽게 쓸어보고 두들겨 보더니 다시 칼을 집어넣어 내려놓고는 양녕에게 감탄하듯 말했다.
"조선 장인들은 화포 말고 칼도 이리 잘 만든단 말입니까?"
"왜인 출신 장인들에게 조선의 좋은 철을 주어 만들게 한 것이오. 뭐 곧 조선인이 될 것이니 조선 장인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겠소만."
양녕의 농담 섞인 말에도 모리하루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인 장인들이 만든 것치고는 모양이 좀 특이합니다. 아예 일본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양식이군요."
"정확히 보셨소. 기존의 왜도가 많이 휘어서 말 위에서 쓰는 칼이라면, 이건 걸어 다니며 쓰기 적합하게 만든 것이오. 이제 곧 일본에 전란의 시대가 열리면 무사들만이 아니라 농민들까지 끌어모아 싸우는 시대가 될 것이오. 그리되면 돈이 많이 드는 기병은 귀해지고 무사들도 걷는 이가 많겠지. 그 시대에는 이런 칼이 주류가 될 것이오."
"확실히 칼날 휨이나 손잡이 모양 같은 것이 걸어 다니면서 쓰기 좋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칼을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 칼을 더 만들어 일본 무사들에게 팔려고 하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조선 칼이 이리 좋다고 미야코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다녀야 하는 것인데 당연히 받으셔야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이 많은 면포를 기꺼이 종잣돈으로 내어 주시면서 좋은 칼을 좋다 알리는 것으로 대신하라 하시니 황송할 정도입니다. 한데 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조선에서 만든 칼이 차고 다닌다 하면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그 말대로 조선과 내통했다 의심하는 이가 나올 수 있소. 그러니 선수를 쳐서 이 칼이 바로 조선 기병들이 쓰고, 귀화한 시마즈 방계 무사들이 썼던 바로 그 칼이라 하시오. 그래서 적을 알고자 할 겸 조선을 상대할 좋은 무기를 갖추려고 입수했다 하면 되지 않겠소?"
"이게 정말로 그 칼입니까?"
진지하게 물어보는 모리하루의 질문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마지막 전투까지 살아남아 미야코로 탈출한 이들은 기병들과 시마즈 방계 무사들의 칼에 호되게 당한 이들이 많을 것이오. 아마 조금만 소문을 퍼뜨려도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한 것이 이런 칼이 맞다 하고 다니겠지. 그래야 명검을 상대하면서 힘겹게 싸우다 진 것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결국 대군께 패배하고 이를 갈며 달아난 이들이 계속 대군을 돕게 되는 격이로군요."
"그런 셈이오. 그런 소문에 더해서 칼집과 손잡이에 장식이 없어서 오히려 눈에 띄기도 할 테니, 궁금해하는 이가 있으면 뽑아서 구경시켜줘도 좋을 것이오. 아마 그렇게 소문이 퍼질 때쯤이면 칼도 더 생산될 테니, 그때는 공께서 중계무역으로 일본에 파실 물량도 충분하리라 생각하오."
"결국 이 칼을 알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훗날의 제 이득을 위한 것이로군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대군께는 하나부터 열까지 큰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대군이자 제후로서 같은 조선의 제후를 돕는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저, 대군. 이렇게 많은 것을 이미 받아 놓고서 염치없는 소리인 줄은 알지만, 하나만 더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모리하루가 이렇게 진지하게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양녕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엇이오?"
"장차 계응국의 미래를 위해 호족 자제들 가운데 영특한 젊은이들을 뽑아 조선의 한성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자 합니다."
예상 밖의 말에 양녕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대답했다.
"괜찮은 생각이오. 그런데 그리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을 보니 뭔가 더 있는 모양이군."
"예. 아무리 일본 조정과 귀족들이 섬 안에서만 지내 외교 감각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아예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저와 대군, 나아가서는 조선과의 사이에 무언가 은밀히 오가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만하오. 다행히 쇼군과 대다수 귀족들은 농경지인 부젠을 잃어 가면서도 협상한 공을 믿는 것 같긴 하지만, 맨 처음에 내가 아예 공을 협상 담당으로 특정하다시피 한 것부터 시작해서 의심하려고 하면 할 부분도 많으니 말이오."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이유 없이 조선에 호족 자제들을 보내면 다른 이들에게도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외교가 목적이라면 좁은 바다 건너에 왕자이신 대군께서 계시는데 굳이 한성까지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제야 모리하루의 말을 이해한 양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유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로군. 걱정 마시오."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내가 조정에 말해 조선 조정의 명의로 일본 조정에 통첩을 보내겠소. 그러면 될 것이오."
통첩이라는 강한 어조의 단어에 약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모리하루를 보며 양녕이 계속 말했다.
"이런 내용이 될 것이오. 오우치 가문이 협상 담당이면서도 이번 정벌 중에 부젠 호족들을 돕는 등 수상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삼한 혈통이니 크게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계로 삼을 것이다. 대신 수도인 한성에 오우치 가문원을 볼모로 보내라."
"그렇게 하면 젊은이들을 한성에 보낼 명분이 생기는군요."
"그렇소. 당주인 공과 후계자인 공의 조카는 볼모로 보낼 만한 자식이 없고, 그렇다고 본인들이 직접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신 호족 자제들을 여럿 보내겠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없소."
양녕의 계획에 모리하루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실로 묘책입니다. 어차피 누구를 볼모로 보낼지 결정할 쇼군은 저를 믿어주고 편들어주니 저나 조카더러 직접 가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고, 호족 자제들을 인질로 보내겠다 하면 아마 그렇게 하라 하겠지요."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호족 자제들을 인질로 보내겠다는 요청을 수락하면 되고 말이오. 그리하면 볼모로 오우치 가문원을 요구했던 것을 협상으로 호족 자제로 낮춘 것이 되니 공의 위신도 설 것이오."
"예. 조선군을 막으려 부젠 호족들을 도왔던 탓에 볼모를 보내는 상황이 된 것이니 조선과 내통한다는 의심도 줄어들 것이고, 믿을 만한 이들을 볼모로 보내 역으로 조선을 정탐하겠다 하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좋소.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지금 바로 석성목에 돌아가 통첩문을 써 도장까지 찍어서 보내겠소."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빠를수록 좋은 것은 맞으나 오늘은 직접 오신 데다가 면포와 명검까지 주셨는데, 이리 금방 다시 가시게 하면 제가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괜찮소. 내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오."
"무슨 다른 일이 있으십니까?"
"조만간 오랜만에 한성에 갈 것이오. 기왕이면 그때 호족 자제들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 * *
1420년 6월 하순 모일.
한성부, 창덕궁.
창덕궁에 입궐하며 증축된 인정문 일대를 흥미롭게 보던 양녕에게 반가운 얼굴 둘이 다가왔다.
"대군. 오랜만에 한성에서 뵈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종무와 최윤덕의 인사에 양녕도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덕분에 잘 지냈소. 찬성과 참찬께서는 어찌 지내셨소?"
정동군이 해산되며 정동군단장에서 의정부 찬성이 된 이종무가 왼손을 움직여 보이며 말했다.
"여전히 잘 움직이지는 않지만 감각은 조금 돌아왔습니다."
"다행이오. 시간이 지나면 분명 완쾌될 것이오. 참찬께서는 얼굴은 좀 괜찮으시오?"
마찬가지로 중군사단장에서 의정부 참찬이 된 최윤덕이 자기 얼굴을 슬쩍 만지며 말했다. 흉하게 보일 정도로 일그러지지는 않았지만 선명한 화상 자국이 왼쪽 이마부터 뺨까지 덮고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 잠깐 사이에 대군을 둘러싼 소문이 더 퍼졌습니다. 아마 장수들과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퍼진 것 같은데, 덕분에 대군을 칭송하는 사람이 늘었나 봅니다."
자신을 지키다 다친 두 사람의 상처에 양녕이 괜히 미안해하기 전에 최윤덕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양녕도 얼추 눈치채고 최윤덕의 말에 대답했다.
"어떤 소문이길래 그렇소?"
"대군께서 지극히 검소하신지라, 헐리는 사당을 가져다 궁궐을 짓고 널빤지로 지붕을 잇고, 궤짝을 옥좌 삼아 정무를 보신다는 소문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도 비용을 줄이고자 사당을 옮겨 짓고 나무판으로 지붕을 이은 것이고, 신물을 모시던 궤짝을 의자로 쓴 것은 거기 더해서 조선이 일본의 신령보다도 강하다는 위세를 보이기 위함이긴 했다. 하지만 일본식 사당이 정확히 어떤지 모르는 조선 본토 백성들에게는 꼭 단칸 너와집을 궁궐로 삼았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도 되는구려."
이번에는 이종무가 입을 열었다.
"또 있습니다. 대군께서 구주도의 고을을 일곱 개로 줄이고 이름도 칠주도로 바꾸셨는데, 구주는 천자가 다스리는 땅을 가리키는 것이라 아무리 원래 이름이라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계시는데 참람하게 쓸 수 없다 하여 격을 낮추셨다는 소문이지요."
"그건 정말로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꿈보다 해몽이 아닐 수 없소."
"이번에 한성으로 오시면서는 오우치 가문 휘하의 호족 자제들도 데리고 오셨으니, 조만간 소문이 더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윤덕의 그 말에 양녕과 이종무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잠시 후.
창덕궁. 조계청.
이종무와 최윤덕과 헤어진 양녕은 오늘 입궐한 본래 목적대로 이방원과 이도를 만나고 있었다.
"소석탄과 반사로라는 것을 써서 철을 제련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왜인 도검장들을 써 그 철로 왜도를 만들어서 팔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고. 네가 보내준 그 왜도가 실로 명검이라 할 만했으니 필시 잘 팔릴 것이다."
흐뭇하게 말하는 이방원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예. 이번에 올라오면서 보니 남부지방에 제철시설도 잘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이도의 칭찬이 이어졌다.
"각 지역에 백성들을 다 보내셨다는 보고도 받았습니다. 정말로 올해 여름이 가기 전에 칠주도가 완전히 조선 땅이 되었군요. 게다가 오우치 모리하루까지 계응후로 책봉해 영향권에 넣었으니 형님께서 영토를 넓히시는 것이 실로 대단합니다."
"과찬입니다, 주상.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축자해 간척도 해야 하고, 평호도에 교역항도 설치해야 합니다. 백성들도 갓 보내졌을 뿐이라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왜인들도 꾸준히 동화시켜 조선인으로 만들어야지요."
"얘기하는 것을 보니 칠주도에 좀 더 있을 모양인가 보구나."
쓸쓸한 표정으로 이방원이 말하자 이도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양녕이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도 한시라도 빨리 한성에 돌아와 두 분과 있고 싶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칠주도가 경상도만 한 큰 땅인지라 앞으로 엄청 빨라야 1년, 느려지면 3년 이상도 잡아야 할 겁니다. 그동안 제철을 비롯한 기술들도 다듬어야 하고, 칠주도의 광산들도 찾고 개발해야겠지요."
"그럼 얼추 2년 뒤에는 오십니까?"
"예. 제가 없이 조정에서 보낸 지방관들만으로도 문제없이 돌아갈 정도가 되면 바로 오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고, 바쁘지 않을 때에는 가끔 한성에 와 얼굴이라도 보여다오."
"맞습니다. 정무를 돌보시는 것이 기력을 많이 쓰는 일이니 고기도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두 분 말씀대로 하고 몸 건강히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2년 뒤에 돌아온다 치면 그때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갑작스러운 이방원의 질문에 잠시 생각한 양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북면을 도모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