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8화
78화
"어차피 왜도를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왜인들 아닌가. 왜도 도검장들을 데려올 것이니 기술에 모자람은 없을 것이고, 일본에서 나는 것보다 더 좋은 품질의 철을 쓰니 칼도 더 좋게 만들어지겠지."
"하지만 조금 전까지 적국이었던 조선에서 만든 칼이 과연 팔리겠습니까? 무기를 사 줄수록 조선에 이익이 되는 것 아닙니까."
최만리의 걱정에 양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정 생각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걸 결정하는 건 조정이 아냐. 일본 조정은 그저 무사들 대표 아닌가. 주로 칼을 사 갈 거라 생각하는 건 호족들이네."
"곧 일본에 난세가 찾아올 것이라고 하셨지요. 하긴, 농기구보다 무기가 우선시되는 시대가 되면 좋은 무기를 두고 누가 만들었는지나 따지는 이는 난세에 휘말려 사라지겠지요."
"그래. 그리고 오히려 적국으로 싸워 봤기 때문에 조선 칼을 사려 드는 이들도 있을 거야."
양녕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으나 약간 의아하게 생각한 최만리가 되물었다.
"칼에 능한 자신들을 이긴 칼이라 생각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조선이 주로 쓴 무기는 궁시와 화포지 않습니까."
"그 주 무기에 제대로 맞은 이들은 다 죽었는데 제대로 전달이 되었겠는가. 살아남은 이들은 궁시와 화포만큼이나 기병의 칼과 시마즈 방계 호족들의 칼에도 당한 이들이야. 그들 머릿속에서는 조선군이 여러 무기를 비슷비슷하게 썼다고 생각하겠지."
"자신들이 당한 기병과 시마즈 방계 호족들의 칼이 새로 만들어질 조선의 좋은 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실 생각이시군요."
"그렇네. 그리고 기존 왜도보다 더 좋은 칼이니 당연히 값도 더 받을 수 있을 것인데, 만일 기술을 발전시켜서 기존 왜도보다 더 싸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익도 더 커질 것이고 말이야."
이해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최만리가 말했다.
"그런데 왜도를 만들어 팔기까지 해서 일본에서 사 올 것이 많습니까? 금은과 구리, 유황까지 모두 칠주도에서 나는 것이니 필요한 자원은 충분히 확보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칠주도 아닌 일본 땅에서만 나는 무슨 중요한 게 있나 봅니다."
"아니. 그런 건 없네."
당연한 듯 아니라고 하는 양녕의 반응에 최만리가 역으로 당황해서 물었다.
"그러면 굳이 왜도를 만들어 파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철을 많이 써야 하는 왜도 말고 다른 교역품도 많지 않습니까."
"사올 것이 없는 것이지 파는 이유는 있네. 시간이 지나서 조선이 만든 왜도가 유명해지고 무사들이 앞다투어 구하려 하게 되면, 반대로 왜인들이 만든 무기는 값이 싸질 것이네. 그때 그것들을 사들일 걸세. 왜도는 쉽게 분해가 가능하니 날만 구해다 고철로 녹여 쓸 것이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칼은 조선 것을 쓰는 것이 당연해지고, 왜도는 그저 고철 취급을 받겠지. 왜인 도검장들은 모두 기술을 잃고 사라질 것이고."
"왜인들의 칼 만드는 기술을 없애시려는 겁니까?"
양녕이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어차피 저들이 아무리 칼을 들고 달려와도 조선의 화포는 이길 수 없는데 굳이 없애서 무엇하겠나. 단지 저들은 학문보다 무예를 숭상하고, 선비가 지필연묵을 벗으로 삼듯 칼을 벗으로 삼네.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수백 년 지난 뒤에 저들이 '이것이 우리의 얼이다.'하고 꺼내놓는 칼들이 모조리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재밌지 않겠나?"
그 말에 최만리가 경외감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칼 만드는 기술 정도가 아니라 더 큰 걸 없애려 하시는군요. 정말로 왜인들을 싫어하시나 봅니다."
"싫어하긴 무슨. 싫어했다면 이번 정벌에서 멸문시킨 호족보다 포섭한 호족이 많지는 않았겠지. 조선에서 여진족들을 꾸준히 견제하고 뭉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여진족들을 미워하고 싫어해서겠는가. 단지 그것이 나라의 생존법이기 때문이야. 나라의 생존법에는 인도 의도 없는 법일세. 그런 이유일세."
"인을 토대로 의로 다스리는 것이 정도지만, 정도로서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권도를 써야 한다. 사마법 인본편의 구절이로군요. 씁쓸한 일이지만 또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 칠주도에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표정과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최만리를 보며 양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석성목 관아.
동헌 앞마당에는 전날 양녕이 장담했던 대로 도검장들이 거의 다 와있었다. 부인이 임신했거나 노모가 배를 타기 어려울 것 같다며 빠진 몇몇을 제외하고 전부 온 것이다.
"다들 잘 생각했다. 너희를 위해서도, 너희 자식들을 위해서도 좋은 판단이야."
양녕의 말에 도검장 하나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왕자님. 그런데 저희는 언제 조선 땅으로 옮겨가게 됩니까?"
"지금 바로는 어려울 것이다. 너희를 조선인인 양인으로 대우해 달라 조정에 건의도 해야 하고, 아직 조선 남부에 제철시설도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바로 가도 할 일이 없다. 어차피 너희도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업무를 처리하고 문관들이 가서 너희 가족들을 데려오는 동안 여기서 좀 기다려라. 그동안 시킬 것도 있다."
"어떤 일입니까?"
"가져와라!"
양녕이 동헌 옆쪽을 보고 외치자 일꾼 몇이 큼직한 쇳덩어리를 들고 와 도검장들 앞에 내려놓았다. 망치로 두들겨서 넓적하게 모양은 잡았지만 여전히 울퉁불퉁하고 한쪽 끝에는 반사로에서 작업할 때 쓴 쇠막대를 잘라 낸 흔적도 있었다.
"조선의 기술로 만든 철이다. 와서 만져들 보아라."
양녕의 말에 머뭇거리면서 다가온 도검장들이 쇳덩어리를 둘러싸고 앉았다. 이리저리 살펴도 보고 만지고 두들겨 보던 도검장들 표정에서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너희가 드물게나 볼 수 있던 좋은 철일 것이다. 이걸 전부 써도 좋으니 너희가 힘을 모아 칼을 만들어 보아라."
"이걸 통째로 말입니까?"
깜짝 놀라는 도검장의 말에 양녕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이걸 칼 하나에 다 쓰면 천하에 들고 휘두를 사람이 없겠지. 너희 실력이 이리 대단하다고 조정 신하들에게 보여 주어 너희가 인정받게도 해야 하고, 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께 바치기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려면 여러 자루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몇 자루나 만들면 좋을까요?"
높은 분께 바치는 칼을 만든다는 말에 걱정과 기대가 섞인 표정으로 묻는 도검장의 말에 양녕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다섯 자루를 만들어라. 쇠가 부족할 것 같으면 한두 자루는 단검으로 만들어도 좋다."
그 말에 최만리가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 전하께 드리고 대군께서도 한 자루를 가지신다 해도 다섯 자루는 약간 많지 않습니까?"
"보검을 만들게 시키려면 구야자 대접은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양녕의 말을 듣자마자 최만리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군께서 오 태백이시면 축자국은 오나라, 축자국과 치열하게 싸운 왜는 오의 앙숙인 월나라, 월나라 장인들이 칼을 만드니 과연 다섯 자루가 맞겠군요."
전국시대 월나라 도검장 구야자가 명검 다섯 자루를 만든 이야기를 두고 한 것이었지만, 그런 고사와 거리가 먼 왜인 도검장들은 웃는 최만리와 양녕을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멍하니 볼 뿐이었다.
* * *
1420년 6월 초순 모일.
스오노쿠니. 오우치 저택.
오우치 저택 안쪽, 활짝 열어 놓은 장지문 밖으로 잘 꾸며진 연못이 보이는 방에 양녕과 오우치 모리하루가 마주 앉아 있었다.
"제가 직접 가도 되는데 어찌 대군께서 찾아오셨습니까."
"괜찮소. 이전까지는 전쟁에서 조선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협상을 하러 내 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이후로는 내가 직접 찾아오기도 해야 하오. 그래야 주상 전하의 대리인 나와, 일본 조정의 대리인 공께서 대등하게 보이고 공의 입지가 설 것이오. 공께서 나를 찾아오기만 하면 너무 저자세로 나간다고 뭐라고 하거나 그래서 협상을 망친 거 아니냐는 이들이 나올 수 있지 않겠소."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런 걱정도 살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내가 마침 잘 찾아온 것이구려. 조선이 대단하고 강하다는 인식은 이미 왜인들도 다 갖게 되었소. 그런 조선에게 저자세로 나가지 않고 당당히 협상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다들 공을 대단하다 여기겠지. 그리고 그렇게 공이 일본 안에서 자연스럽게 거물이 되어 가야 언젠가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양녕이 모리하루를 처음 만난 날 얘기했던, 일국의 군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임을 파악한 모리하루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 가져온 게 있소."
"무엇입니까?"
"장차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역으로 공께서 이득을 얻으려면, 일본에서 조선 물건을 구하려 드는 이들이 많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려면 우선 조선 물건이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고 말이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몇몇 교역품들을 챙겨왔소. 가져오거라."
양녕의 말에 장지문이 열리고, 문관 몇이 저마다 꾸러미를 한 아름씩 들고 와 내려놓고 나갔다. 양녕이 그중 큰 꾸러미 몇 개를 펼치자, 다 합쳐서 십수 필은 되어 보이는 흰 면포가 드러났다. 그 광경에 모리하루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면포입니까?"
"엄청 놀라시는구려."
"예. 일본에는 목화를 키우는 곳이 없습니다. 옛날에 천축국에서 온 자가 키우려다 실패했다는 전설만 있지요. 그래서 면포는 전부 조선이나 명에서 수입하는 것만 의지했는데, 지난 정벌에서 하카타의 교역품들이 많이 타 버리고 교역 자체도 끊기고 거의 1년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되었지요. 그런 것이 눈앞에 이리 많이 쌓인 것을 보니 저절로 놀라게 됩니다."
"일본에서 면포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들었고, 이전에도 조선 상인들이 일본에 면포를 많이 팔았다는 말을 들어서 구해와 본 거긴 한데 그 정도였소?"
모리하루가 면포 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여름에는 시루 속처럼 덥고, 겨울에는 또 제법 쌀쌀합니다. 면으로 속옷을 지어 입으면 여름에는 땀을 흡수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지요. 그런 탓에 지금 면포라 하면 비단만큼이나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냥 면포가 비단만큼 귀하다면, 이것은 값이 얼마쯤 매겨질 것 같소?"
양녕이 새 꾸러미에서 꺼낸 것을 본 모리하루가 작게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꾸러미 안에는 쪽물을 엷게 들인 옥색 면포 몇 필이 들어있었다.
"쪽물을 거듭 들이는 것이 워낙 품과 재료가 많이 드는 일이라 진하지 않은 색으로 이만큼만 있소. 하지만 쪽물에는 벌레 쫓는 효과가 있으니 일본의 여름에는 이것이 최고가 아닐까 싶소."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면포에다가 쪽물 들인 것까지 있으면 이걸 치를 돈이 가문에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대금은 없어도 되오. 그냥 주려고 가져온 것이니 말이오."
조심스럽게 옥색 면포를 만지며 걱정스럽게 말하던 모리하루가 놀란 눈으로 양녕을 보았다.
"그냥 주시다니요. 이걸 전부 다 말입니까?"
"그렇소. 일본에서 조선 물건이 널리 퍼지게 하려고 투자하는 물건인데 돈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오. 게다가 일본에서나 귀한 것이지, 조선에서는 몇 십 년 사이에 백성들이 목화를 많이 키워서 그렇게 엄청 진귀한 물건도 아니오. 그저 나는 족족 조선 땅 안에서 다 써서 밖으로 잘 안 나올 뿐이오."
"그렇군요. 그런데 사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고 대군께서도 들어서 아신다고 하셨던 것처럼 일본에서 조선 면포는 이미 유명합니다. 생소한 것이라야 우선 써 보라고 퍼뜨려 유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인데, 면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지금 당장도 잘 팔릴 것입니다."
넙죽 공짜로 받아도 되는 상황에서 정직하게 말한 모리하루가 마음에 들었는지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조선에서 나는 물품을 공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면 공이 이 물건들을 퍼뜨리는 과정이 필요하오. 그리고 값을 받지 않는 것은 공이 이것으로 이익을 온전히 얻어 이 뒤에 교역할 종잣돈으로 삼으시라 하는 것이오."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군.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 부담 가질 것 없소. 대신 이걸 널리 알려주시오. 면포는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건 생소한 물건일 것이오."
그렇게 말하며 양녕은 옆에 있던 긴 꾸러미 하나를 펼쳐 안에 들어있던 왜도 한 자루를 모리하루에게 건넸다. 지금 널리 쓰이는 왜도와 달리 칼집에도 손잡이에도 장식이 없이 검은 칠만 되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땀을 흡수하기 위한 면끈이 감겨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우치가타나라 불리게 될, 후대에 일본도라고 하면 바로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양식의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