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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77화 (7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7화

77화

1420년 5월 하순 모일.

석성목 외성. 제철시설.

양녕이 의자를 놓고 앉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제철시설에서는 오전부터 연철 제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쇳물 지나간다! 조심해!"

작업자 둘이 쇳물이 가득 담긴 큼직한 도가니를 양쪽에서 집게로 붙잡고 옮기며 소리 질렀다.

용광로에서 조금 떨어진 반사로에서는 작업자들이 연소칸에 소석탄을 집어넣으며 열심히 풀무질을 해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윽고 반사로에 도가니가 도착하고, 반사로 위로 이어지게 설치된 나무 발판을 올라간 도가니 작업자가 크게 소리쳤다.

"쇳물 들어간다!"

풀무질하던 작업자들이 잠시 자리를 피하고, 도가니 작업자들이 도가니를 기울여 반사로 작업칸 천장부에 뚫린 구멍으로 펄펄 끓는 쇳물을 부어 넣었다.

쇳물이 다 작업칸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확인한 도가니 작업자가 옆에 있던 기왓장을 발로 밀어 반사로 위의 구멍을 막고 내려가자, 이번에는 옆에서 이 상황을 총감독하던 경녕군 이비가 외쳤다.

"작업 개시! 온도가 너무 떨어지지 않게 하고, 휘저을 때 고루 섞이게 해라!"

"예!"

다시 달려간 작업자들이 연료칸에 이어진 풀무를 밟고, 새로 투입된 작업자 하나가 긴 쇠막대를 작업칸 옆에 난 큼직한 구멍으로 밀어 넣어 작업칸 바닥에 고인 쇳물을 반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이비가 양녕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도 성공하면 좋겠습니다."

양녕이 용광로를 키우고 반사로를 만들기로 한 날부터 거의 한 달가량이 지났다.

용광로를 크게 만드는 것은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되었지만, 반사로는 크기, 형태, 재료, 작업방법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다행히 시행착오 끝에 제대로 연철이 만들어지는 반사로 하나가 완성되었다. 지금은 그 반사로를 똑같이 새로 지었을 때 거기서도 연철이 제대로 만들어지는지를 반복해서 시험 중이었고, 연이은 네 번의 성공에 이어 다섯 번째 시도가 진행 중이었다.

"잘 될 걸세.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섯 번 가운데 이미 네 번을 성공했으니 검증되었다고 못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대로 기술을 정리해서 조정에 보내도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게 말하는 양녕도 긴장된 얼굴로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광로에서 막 나온, 탄소를 많이 함유한 녹은 선철을 반사로 작업칸에 부어 넣고 연소칸에서 소석탄을 태워 작업칸을 고온으로 유지하면서 계속 쇠막대로 휘젓는다. 휘저어지면서 고루 공기와 닿게 되면 선철에 포함된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해 이산화탄소가 되어 날아가면서 탄소함유량이 감소해 강철을 거쳐 연철이 된다.

"힘 빠졌으면 교대해라! 젓기 힘들어지면 잘되고 있는 거니 조금만 더 힘내라!"

이비의 지시에 다른 작업자가 지친 이전 작업자에게서 쇠막대를 건네받아 이어서 쇳물을 젓기 시작했다.

탄소함유량이 줄어들면 철의 녹는점은 높아진다. 녹은 철의 온도는 그대로라도 점점 잘 녹지 않는 철로 변해 가는 탓에 찐득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업칸을 고온으로 유지하더라도 용광로만큼 온도를 높일 수는 없으니 철이 점점 식어서 찐득해지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지금 기술력으로는 녹은 철과 작업칸의 온도를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 작업자의 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경녕군 마님! 이제 더 해도 안 저어질 것 같습니다!"

한참을 더 휘젓다 외친 작업자의 말에 이비가 양녕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꺼내야지. 괜히 더 저어 보겠다고 하다가 안에서 식어서 작업칸 벽이나 바닥에 붙어 버리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좋아! 꺼내라! 망치를 맡은 작업자들은 준비해라!"

작업자가 쇠막대 끝에 들러붙어 걸쭉해진 쇳물을 이리저리 움직여 적당히 모양을 잡고 그대로 작업칸에서 꺼냈다. 쇠막대 끝에 엉겨서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 덩어리는 제 무게를 못 이겨 천천히 늘어지고 있었다. 그걸 옆에 준비된 넓고 큰 모루 위에 올려놓자 망치를 든 작업자들이 번갈아 가며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잘 된 것 같군."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며 점점 납작해지고, 점점 식어서 쇠 색깔이 나기 시작하는 철 덩어리를 보던 양녕이 문득 꺼낸 그 말에 이비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아직 다 식은 다음 연철이 맞나 시험하기도 전이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달궈진 쇠만 보고 그 성질을 알겠나. 다만 작업하는 이들의 표정을 보았을 뿐이네."

그 말에 이비가 작업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힘쓰는 일을 하는 도중이라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눈은 성취감과 성공했다는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과연 그렇군요. 하긴 반사로를 만들기 이전부터 쇳물 젓는 작업을 해오던 이들이니 저들의 감이 가장 정확하겠지요. 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이번에도 연철이 제대로 만들어졌겠습니다. 다섯 번 모두 성공이로군요."

"그러게 말일세. 이제 백성들의 이주만 끝나면 자네도 바로 조선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겠군."

"예. 그때 바로 돌아갈 수 있게 이제 지금까지 정리된 제철기술 이론이나 용광로나 반사로 구조, 각종 요령 같은 것들을 책으로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힘써 주게나. 그리고 이제 연철 생산 기술이 확실해졌으니 나는 그자들을 만나봐야겠군. 먼저 일어나 보겠네."

작업자들의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양녕은 이비의 인사를 뒤로하고 관아로 향했다.

* * *

잠시 후.

석성목 관아.

마루 위에 의자를 놓고 앉은 양녕과 옆에 서 있는 최만리가 동헌 앞마당에 모여 앉아 있는 사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 다섯 번 시도하기로 한 제철 시험이 세 번 연속으로 성공한 시점에서 양녕이 칠주도 각지에서 불러모아 석성목에 머무르게 했던 왜인 도검장들이었다.

"너희를 모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다."

양녕이 말을 시작하자 도검장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이제 칠주도는 완전히 조선의 땅이 되었다. 통치하는 이들도 무사에서 문관들로 바뀔 것이야. 조선이라고 해서 무예를 천시하는 것도 아니고, 사내가 외출할 때에는 옆에 환도를 차는 것을 격식으로 여기긴 하지만 무사들처럼 칼을 목숨처럼 여기지는 않으니, 너희가 칼을 만들어 팔 길은 좁아진 것이지. 조선에서는 화포와 궁시를 무기의 으뜸으로 삼으니 다른 냉병기를 만들어서 팔기도 어려울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말한 양녕이 분위기를 바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가진 칼 만드는 뛰어난 재주가 이렇게 사라지게 두는 것 또한 아까운 일인지라, 내 특별히 너희에게 살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너희 중에서 원하는 자가 있으면 조선 땅으로 옮겨서 칼을 만들게 할 것이다."

양녕의 제안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 말 몽골, 홍건적, 왜구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진 혼란상 탓에 조선 초기까지도 실전된 기술도 많고 기술자도 부족했다. 조정에서도 그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서 장인을 중국에 보내 기술을 배워 오게 하거나, 유구국에서 배 만드는 장인을 초빙하려고도 했고, 왜도 만드는 법을 배워 온 장인에게 상까지 내렸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명검으로 여겨지던 일본도 만드는 장인들을 대거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조정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조선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래. 내 특별히 살 집과 조선옷도 마련해 주고, 조선말을 배우기 전이라 해도 조선인으로 대우해 달라 조정에 요청할 것이다. 너희가 만드는 칼 값을 제대로 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조선에서 나는 좋은 철도 너희에게 먼저 팔아 주마."

집과 옷을 준다는 제안에도 망설이는 왜인들에게 양녕이 추가로 회유책을 꺼냈다.

"너희가 조선의 양인이 되는 것이니 자식들 가운데 재주 있는 자가 있으면 과거를 보아 벼슬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장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제도가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조선인이 되면 왜인보다는 적게 내게 될 것이다."

그 말에 도검장들이 슬금슬금 옆 사람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왕자님. 아예 일가를 이끌고 고향을 떠나는 것이라 바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이다. 보통 큰일이 아니지. 그래서 나도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원하는 이들만 데려가려는 것이고 말이야.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들 가서 생각해 보고, 가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나에게 와서 말하거라."

"예, 왕자님."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도검장들이 양녕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줄지어 관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최만리가 양녕에게 물었다.

"저 중에서 몇 명이나 조선 본토로 이사할 거라 보십니까?"

"아마 거의 다일걸세."

"거의 다 갈 거란 말씀입니까?"

"그래. 저들은 무사들 밑에서 조아리고 살던 이들이라 위에서 시키면 고분고분 따르는 것에 익숙해. 게다가 왜인들이 늘 그렇듯 남들이 다 하면 자기 생각이야 어떻건 따라서 하는 습성이 있지. 아마 내가 우대조건 없이 이주만 명했더라도 군말 없이 따랐을 걸세."

양녕의 말에 의문을 품은 최만리가 질문했다.

"그럼 집이나 옷 정도만 주고 전부 이주시켰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장인들을 도성 근처로 옮겨와 조정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게 하는 사례가 없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되겠지만, 그러면 놓치는 게 생기네."

"놓치다니요?"

"전쟁 때문에 적국에 넘어간 기술자들이 이전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 거기 눌러앉게 되고, 결국 나라의 중요한 기술이 넘어가 버렸다는 상황을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려면 가길 원하는 이들만 데려가고 대우도 잘 해줘야 하지 않겠나."

말을 마친 양녕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을 비롯한 각종 기술자들을 두고 한 말이었으니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 최만리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도검장입니까? 대군께서 조금 전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은 화포와 궁시를 무기의 으뜸으로 삼는 탓에, 환도는 군관이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차거나 살수나 기병들만 실전에서 쓰는 정도지 않습니까. 이제 대군께서 화포를 더 발달시켰으니 앞으로는 더더욱 쓸모가 없어질 것입니다."

"자네 말이 맞아. 왜인들이 나무 다루고 세공하는 것이나, 옻칠하고 금은으로 꾸미는 재주가 뛰어난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데려가 조선에서 나무로 집을 짓게 하거나, 옻 제품을 만들어 조공으로 보내 이득을 얻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이유가 있겠군요."

"그래. 애초에 이들이 건축이나 목공에 주로 쓰는 삼나무나 편백은 이제 조선에서는 묘목이 심기고 씨가 뿌려졌을 뿐이야. 그들을 조선에 보내 봤자 익숙한 재료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이점이 사라져 버리네. 옻칠도 마찬가지야. 여기 칠장들은 이 지역에서 자라는 옻나무 진액의 성질에 익숙할 것이야. 정 조공에 쓸 필요가 있으면 여기서 사서 조정으로 보내면 되네. 어차피 여기도 이제 조선 땅 아닌가."

양녕의 설명에 최만리가 이해한 듯 끄덕였다.

"하지만 도검은 사치품인 옻 제품과 달리 아직 군문에서 중요하게 쓰이기도 하고, 나무들과 달리 조선 남부에서 나는 좋은 철로 만들어야 좋은 물건이 나올 테니 이주시키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하지만 여전히 저렇게 많이 데려가시려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칼이 화살처럼 쓰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미 환도도 충분히 보급되어있어 급하지도 않으니 재주가 특출난 몇 명만 데려가서 천천히 조금씩 만들게 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다 팔 생각이니 많이 데려가 많이 만들어야 좋지."

"파신다니……. 명나라에 조공으로 계속 보내면 생산품을 노획품으로 위장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민간에 팔자니 조선 백성들은 활을 쏘고 놀지언정 칼을 가지고 놀지는 않지 않습니까."

당황한 최만리의 질문에 양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굳이 팔 곳을 명나라나 조선에서 찾을 필요가 뭐 있나. 저 동쪽에 이미 살 사람이 많지 않은가."

양녕의 말을 듣고 멍하니 잠시 생각하던 최만리가 화들짝 놀랐다.

"왜인들에게 왜도를 만들어서 파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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