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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76화 (7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6화

76화

1420년 5월 초순 모일.

석성목 관아.

"다 끝냈습니다."

붓을 필가에 얹어놓고 양손을 탁자 아래로 내린 최만리가 지쳤지만 뿌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다 끝냈나? 확실히 들어온 물건이 많으니 오래 걸리는군."

최만리가 조금 전 끝낸 것은 전리품 목록 정리였다.

이전에 가장 많았던 전리품은 헐리는 사당이나 저항한 사찰에서 몰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전투가 있을 때마다 쇼니 가문과 키쿠치 가문, 오토모 가문 거점에서 챙겨 온 것들이 추가되었다.

키쿠치와 오키타 지역은 성 주변에 조성되어 있던 시가지의 잔해를 수습하면서 주인 없는 물건들을 챙겨 온 것들도 추가로 있었다.

"그나마 전투가 다 끝난 상태라 여유가 생긴 정동군 병사들이 도와줘서 이 정도로 끝난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계속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으면 일손이 부족해서 몇 달은 더 잡았어야 했겠지요."

전투에서 얻은 것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전리품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의 새 행정구역인 일기부로 편입된, 구 비전 지역 서부의 도서지역과 해안지역 마을들을 전부 비우고 없애면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주민들을 이주시키면서 농기구나 솥 같은 재산은 전부 챙겨 주었고, 너무 민심이 흔들리지 않게 식량도 추가로 챙겨 주어서 군량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사하거나 조선 본토로 끌려가거나 혹은 참수되어 조선인 목으로 위장되어 오우치 가문에 보내지게 된 해적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들은 전부 정동군 소유가 되었다.

"고생 많았네. 조정에 올릴 물건들은 며칠 뒤 대사마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갈 정동군 마지막 복귀부대에 맡기면 되니 조금 쉬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대군께서도 거부가 되셨습니다그려."

일을 한 단락 끝내고 조금 여유를 찾았는지 최만리가 던진 농담에 양녕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도 농담은. 축자국 재산이지 어찌 내 재산이겠나."

금은은 조공무역에, 구리와 유황은 화약과 화포에 필요한 것이라 여전히 획득하는 대로 조정에 보내고 있지만, 그 외에는 사치품이라 하더라도 현지에서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곳에 쓰라는 이방원과 이도의 지시가 있었다.

각 지역 호족들을 포섭하거나, 투항한 이들에게 내려주거나 사찰 등을 회유하거나 병력을 모집하는 데 쓰라는 의도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사용되었었다. 하지만 이제 정동군이 해산되기에 남은 것들은 다른 주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조정에 보내자니 아직 칠주도에서 쓸 곳이 많고, 축자국의 국유재산으로 삼자니 축자국이 조선과는 다른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양녕의 사유재산으로 삼자니 꼭 공금을 사유화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는지라 명확히 새로운 소유자를 정하지 않고 붕 뜬 상태로만 관리하고 있었다.

"쓸 만큼 다 쓰고 남으면 그때는 조정에 보내면 될 테니, 그전까지만 잘 관리해 주게. 그럼 난 일이 있어서 나가 보겠네. 오늘은 별일 없으면 내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일찍 퇴청해서 쉬게나. 고생 많았어."

그 말에 최만리가 요 며칠 본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이 동헌 건물을 나섰다.

* * *

잠시 후.

석성목 외성 모처.

양녕이 간 곳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부지였다. 정동군 병사들이 거의 다 조선 본토로 돌아가면서 주둔지로 쓰이던 땅에 여유가 생겨 외성 안에 지어진 대규모 제철시설이었다.

이곳에서는 정동군 소속이었지만 복귀를 미룬 대장장이들을 중심으로 제철기술에 관한 실험이 한창이었다.

소석탄만 만들어서 조정에 보내고 알아서 제철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양녕의 지히하에 미리 연구를 하고 기술을 확립하는 중이었다. 대장장이들이 조선 본토에 복귀하면서 바로 초기 기술이 정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대군마님, 오셨습니까."

양녕이 온 것을 본 대장장이 하나가 달려와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어찌 되어 가나 잠시 살펴보러 왔네. 총책임자를 불러와 주게."

"예, 알겠습니다."

대장장이가 다시 달려가는 뒷모습을 잠시 보던 양녕이 주위를 살폈다. 제철시설 곳곳에 지어진 오두막 아래에는 고철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전리품으로 얻은 철물 가운데 잘 만들어진 무기나 갑옷, 솥이나 농기구 같은 것들은 그대로 조정에 보내거나 현지에서 썼지만, 왜인들 기준이면 몰라도 조선 기준에서는 못 쓸 물건으로 분류된 철물들은 모두 이곳에 모아온 것이다.

양녕은 이 고철들을 재료로 제철기술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칠주도에서는 좋은 철광석이 나지 않고 사철만 겨우 나는 정도이니, 차라리 적당히 품질이 낮은 고철을 철광석 대신 쓰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리 품질이 낮은 고철이라고 해도 철광석보다는 순도가 높아서 기술 개발 초기의 난이도가 내려간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양녕이 고철을 둘러보는 사이에 조금 전 대장장이가 데려온 총책임자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는 양녕에게 인사했다.

"잘 되어 가는가?"

"예. 큰 사고나 문제없이 진행 중입니다."

석성목 제철시설의 총책임자, 경녕군 이비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정착과 관련된 일이니 원래 하던 일과 아예 관련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래 업무였던 조선인 이주와 동떨어진 일을 맡은 거 같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네."

정동군으로 왔던 이들 가운데 땅을 받고 그대로 정착해 살기로 한 이들도 있었고, 정착할 백성들도 하나둘 오고 있었다.

양녕은 이들 가운데 손재주 있는 이들에게 철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 칠주도 사방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철기술 개발과 정착민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는 일의 양쪽 책임자를 모두 맡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녕군 이비였다.

"아닙니다. 이주하는 이들이 어떤 것을 배우는지 알아 두어야 각 지역으로 보낼 때도 도움이 되고, 조정에 돌아가서도 보고를 잘할 수 있으니 견학 삼아서 제철기술을 조금 배워 두겠다고 말을 꺼낸 건 저였지 않습니까."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견학치고는 좀 오래 잡고 있지 않나 싶은데. 사실 자네가 익힌 정도면 백성들을 정착시키고 조정에 보고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겠나?"

"저도 그리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제철이라는 일에 재미가 붙어서, 기왕에 하는 김에 제대로 하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체질에 맞는 일이라는 게 있나 싶군요."

이비는 그렇게 말하며 양녕을 보았다. 전에 양녕이 이비에게 물의 기운이 강해 보이니 쇠를 가까이하면 좋겠다고 농담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런, 내게 나도 몰랐던 신통력이 있었나 보군."

"저 덕분에 아셨으니 앞으로 제 점은 복채 없이 봐주시는 거지요?"

"하하하! 물론이네!"

다시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잠시 웃은 뒤, 이비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정착할 백성들한테 대장장이 기술을 가르치시는 것은 이주했을 때 농사 외에도 기술이 있는 것이 더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특히 조선에서는 농민들이 농기구 만들 쇠를 얻고자 농한기에 힘을 모아서 제철하는 일이 흔하니, 익숙하기도 하고 금방 배울 수도 있겠지. 게다가 왜인들은 철 다루는 기술을 숭상하는 풍조가 있다네. 새로 대장간을 열거나 사철을 녹이거나, 칼을 벼려내거나 할 때는 항상 신령에게 제사를 지낼 정도지."

"토착 왜인들에게 조선인들은 같은 농민이고 굴러온 돌들이겠지만,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함부로 텃세를 부리지 못하겠군요."

"이해했으니 다행이군. 그럼 온 김에 좀 시설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기술 개발은 어떤지 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 * *

시설 안에서 또 담장으로 한 번 더 둘러 보안을 철저히 한 제철시설 가장 깊은 곳에는 용광로 몇 개가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고, 대장장이와 기술을 배우는 백성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 중이었다.

"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셨던 숯 기운에 얼마나 닿느냐에 따라 철의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저번에 세운 그 가설 말이로군. 어떻게 확인했나?"

"쇠에 숯 기운이 얼마나 있는지 사람 눈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지요. 대신 대장장이들이나 이주해 온 백성들 가운데 제철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저마다 말하는 내용이나 설명하는 방식에 차이는 있었지만, 종합해 보니 결국 형님께서 말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탄소함유량이 철의 성질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은 양녕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탄소라는 원소가 발견되기도 전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양녕은 '숯에서 나오는 기운이 어느 정도 들어있는가에 따라 철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 같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이비에게 검증하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대장장이나 백성마다 특성별 철을 부르는 명칭이 다 달라서 혼란이 오는 탓에, 형님께서 가설을 세우실 때 쓰신 명칭을 쓰기로 했습니다."

"숯 기운이 많이 들어있으면 잘 녹고 주물을 만들기 좋지만 쉽게 깨지는 선철. 숯 기운이 거의 없으면 두들겨서 모양을 만들기 좋지만 쉽게 휘고 녹이기 어려운 연철. 그 중간 정도 숯 기운이 들어있고 잘 휘지도 깨지지도 않는 것이 강철. 이걸로 통일된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숯 기운이 철 성질을 다르게 한다는 게 확실해져서 기술 개발 목표도 확실해졌습니다. 우선 소석탄의 강한 화력으로 숯 기운이 많이 들어간 선철을 만들고, 녹인 선철을 휘저어 숯 기운을 태워 없애 연철이나 강철을 만드는 것이지요."

"잘 되어 가나?"

양녕의 질문에 이비가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생각대로 잘 안 됩니다. 철광석이 아니라 고철을 녹이는 것이다 보니 불순물도 얼마 없어서 선철을 만드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문제는 숯 기운 조절이지요."

"숯 기운 조절이 왜?"

"숯 기운을 적당히 남겨야 강철이 될 텐데, 사람 눈으로는 숯 기운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을 할 수 없으니 계속 젓게 됩니다. 지금까지 녹은 선철을 휘저어 성질을 바꾸는 것은 여러 번 성공했지만 그 결과물은 전부 연철이었고, 강철이 나온 적은 없습니다."

이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양녕이 말했다.

"괜찮네. 무리해서 강철까지 갈 필요는 없어. 어차피 지금은 기술을 만드는 단계 아닌가. 아예 강철은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연철을 확실히 만들어 내는 데에 집중하게. 애초에 두들겨서 다루고 도구를 만드는 데에는 연철이 오히려 더 쓰기 좋지. 나중에 지방의 대장장이들이 원재료로 사가서 도구를 만들기에도 더 좋아."

"하기야 강철로 만들어야만 하는 물건이 시급하지도 않고, 정 필요한 것은 대장간에서 연철을 숯불에 오래 불려가며 숯 기운이 들어가게 해서 강철로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맞아. 그럼 이론이나 개발 방향은 얼추 정리가 되었군. 기술과 시설은 어떤가?"

"용광로는 두껍고 높게 쌓아 올리고 아래에서 풀무질을 하면서 위에서 고철, 소석탄, 구운 조개껍데기를 켜켜이 넣는 것이 가장 괜찮았습니다. 거기서 나온 녹은 선철을 도가니에 담아 모닥불에 올리고 굳기 전까지 최대한 쇠막대로 휘저어서 연철로 만드는데,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이비의 말을 들으며 양녕은 슬슬 다음 지식을 꺼내기로 했다. 이 정도로 기술이 쌓였으면 다음 기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고, 대장장이들도 요령이 생겼으니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구들장도 두꺼운 돌을 써야 열기가 오래가는 것처럼, 용광로도 크기가 클수록 안에 열을 잘 가두어 더 성능이 나아질 것이네. 용광로 크기를 조금 더 키워 보게나."

"알겠습니다. 실패한 용광로들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크게 새로 지으면 될 겁니다."

"그리고 녹인 선철을 도가니에 담아 모닥불에 올리고 휘젓는 방식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아마 충분히 젓기 전에 식어 버려서 그럴 것 같아."

"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가마에 넣어 버리면 잘 식지는 않지만 숯 기운이 들어가 버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지요."

"내가 해결책이 떠올랐으니 그걸 쓰면 될 것 같네. 아마 이 방법이 효과를 보면 기술이 완성될 것이니, 그 내용을 책으로 모아 정리하고 대장장이들하고 같이 조선으로 바로 보내도 될 거야."

신중히 말하던 양녕이 드물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이비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어떤 해결책이길래 그리 확언까지 하실 정도입니까?"

"연료 태우는 칸과 녹인 선철을 넣고 휘젓는 칸을 나란히 놓은 가마야."

"불하고 나란히 두면 숯 기운도 닿지 않고 열기도 오래가겠지만, 불이 아래가 아니라 옆에 있는데 선철 넣은 칸까지 충분히 뜨거워질까요?"

이비의 걱정에 양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연료칸에서 나온 열이나 불길이 가마 벽과 천장에 반사되어서 선철 넣는 칸에 가도록 하면 돼. 그래, 이름은 반사로가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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