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4화
74화
1420년 4월 중순 모일.
석성목 관아.
"오해를 부를지도 모르는 내용이라 이번 건의에는 빼고 보냈는데 그걸 또 파악해서 종친들을, 그것도 가장 먼저 이렇게 많이 보내게 하다니. 역시 대종백은 대단한 사람이야."
양녕은 동헌 마루 위에 서서 동헌 앞마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은 옷을 차려입고 어딘가 서로 닮은 사내들과 그 가족들, 딸려온 종들은 물론이고 짐을 나르는 일꾼들까지 더해진 덕분에 동헌 앞마당만이 아니라 관아 전체가 여러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정동군 장수들이 모두 떠나고 한동안 쓸쓸했는데 그래도 아는 얼굴들이 많이 와서 좋긴 하군. 그런데 설마 자네도 구주도로 거처를 옮기는 겐가?"
양녕이 옆을 보며 물었다. 양녕 옆에 서 있던 사내는 경녕군 이비. 이방원의 서자 중 가장 맏이로, 양녕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왕실 방계들만 잔뜩 가다 보니 누가 대표를 할 것인가를 두고 조정에서 약간 혼란이 있어서, 아바마마께서 중신들과 한참 논하신 끝에 저를 대표로 보내셨습니다."
지금 온 종친들은 왕실의 방계라는 점은 일치했지만, 이성계 형제들의 손자, 이방원 형제들의 아들 등등 항렬만 같을 뿐이지 나이와 촌수가 모두 달랐다.
게다가 건국 시조인 이성계를 기준으로 왕실 혈통의 직계와 방계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지도 문제였다. 아무나 대표로 정했다가는 일종의 서열을 정하는 전례가 생겨 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현시점에서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상왕 이방원의 서장자 이비를 대표로 삼아 그들을 구주도에 데려다주고 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희는 어디 어디로 보내지게 됩니까? 제가 맡은 일이 구주도로 이주하는 종친들의 대표를 맡는 것도 있지만, 한동안 머물면서 종친 누구가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정리해서 조정에 올리는 것도 있어서 말입니다."
이비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조정에서 방계 왕족들이 어디에 거주하게 되는지 정리하려는 모양이군. 하긴 왕실에서 멀어진 왕족이 쇠락해서 초라하게 살면 왕실의 위신에 문제가 생기니 말이야."
"그렇지요. 반대로 자리 잡은 지역에서 토호 노릇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세력을 모아도 다른 쪽으로 문제가 되니 잘 파악해 두어야지요."
"그럼 기왕에 이렇게 종친들까지 바로 이주해 오게 되었으니, 종친들은 물론이고 적자로 인정받은 반가 서얼들, 그러니까 입적서얼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고려해서 각 지역으로 보내야겠군."
양녕은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하나 부탁할 게 있네. 아직 입적서얼들과 백성들은 오기 전이니 그들이 다 오고 각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끝날 때까지만 잠시 머물면서 도와줄 수 있겠나?"
이비는 별다르게 고민하지도 않고 흔쾌히 대답했다.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나라와 왕실의 번성을 위한 것이고, 제 일하고 겹치는 것이기도 하니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시간이 남는 김에 지금 바로 어떤 일을 도와주면 좋을지 알려주겠네. 우선 자리를 옮기지."
* * *
잠시 후.
석성목 중성 동남쪽 외곽.
웅장한 누문 앞에 도착한 이비가 문루에 내걸린 현판을 올려다보며 양녕에게 물었다.
"여기는 사찰 아닙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
양녕과 이비가 도착한 곳은 옛 시가지였던 중성과 내성의 재건을 위한 부두시설로 쓰였던 승천사였다.
앞서 양녕은 석휴에게 승천사를 성복사에 합쳐 없애라고 지시하면서, 도군승이 사찰에서 업무를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이유를 대어 석휴의 집무실을 성복사 안에 두었다.
이어서 승천사의 부두시설은 정동군 소속인 이가 관리하는 것이 맞는데, 마침 바로 옆 성복사에 도군승인 석휴가 일하고 있으니 같이 관리하면 될 것이라 넘긴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라시면 지금은 사찰이 아닙니까?"
"지금은 승상이 일하는 곳이 되었네. 더 정확하게는 승상과 문관들이 일하는 곳이지."
승천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중성과 내성 재건이 끝나가자, 양녕은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이 맡는 것이 낫겠다며 외성 성벽 건축과 비혜강 물길을 돌리는 일도 석휴를 통해 승천사에 맡겨 버렸다.
최만리가 온 다음에는 아예 접근성이 좋은 입지조건이라는 이유로 최만리의 집무실도 겸하게 되었다.
결국 승천사는 부두시설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점점 관청이 되어갔다.
승천사라는 이름도 마침 관청으로 적절했다.
승이라는 글자가 승지나 승정원이라는 명칭에 쓰이는 받든다는 뜻인 덕분에 하늘의 뜻을 받드는, 즉 임금이 임명해서 보낸 승상이 일하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데다가, 절 사라는 글자에는 관청 시라는 뜻과 음도 있었다.
결국 한때 죠텐지였던 사찰은 어느샌가 축자국 관청 승천시가 되어 버렸다.
"사찰이 관청이 된 거면 이전에 있던 승려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경내에 석등이며 석불은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승려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 어색했는지, 이비는 누문을 지나서면서부터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물어보았다.
"여기서 담장이 이어진 성복사라는 절이 있네. 도군승이 일하는 곳이지. 불상이나 법구들은 물론이고 승려들도 전부 거기로 옮겼네."
같은 종파 소속이고 오랜 기간 이웃으로 있던 승천사가 승천시가 되어 사라지는 동안, 성복사 주지 양예는 침묵하고 있었다. 양녕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조하는 것에 가까운 묵인이었다.
승천사가 없어지면 성복사는 석성목 성내의 유일한 사찰로 입지를 다질 수 있고, 정동군과 도군승, 나아가 조선과 양녕을 통해 얻던 이득이 승천사로 나눠질 걱정도 없었다.
게다가 승천사가 성복사 밑으로 들어온 덕분에 거느리는 승려와 사찰 재산도 늘어 버렸으니 주지로서는 오히려 도와줄 것이 없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다 왔네."
양녕이 한때 대웅전이었던 건물을 열고 들어가자 이비가 따라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대군."
"경녕군께서도 오셨군요. 어쩐 일이십니까?"
퀭한 얼굴을 한 최만리와, 최만리 못지않게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정동군 복귀 업무를 보던 조말생이 일어나서 인사하는 것을 받으며, 이비는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잠시 후.
안에 있던 불상은 먼저 성복사로 옮겼지만, 크기가 큰 탓에 아직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해체하지도 못한 화려한 수미단 앞에서, 탁자에 마주 앉은 양녕과 이비가 구주도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입적서얼들과 백성들이 안 와서 그 수효와 출신을 모르는 탓에 지금은 어떻게 이주시킬지는 정할 수 없겠지만, 대신 구주도의 지금 상황을 알려 주겠네. 새롭게 나눈 군현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네. 미리 알아두면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야."
맨 먼저 구주도 남쪽을 짚으며 양녕이 설명을 시작했다.
"녹아 심씨가 백작이 된 녹아부는 이미 알겠지. 여기는 이미 호족들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탓에 조선인을 보내도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야. 대신 그들과 혼사를 맺어 왕실이나 반가와 이어지게 만드는 게 확실히 조선 편으로 만드는 방법일 거야. 그들도 적잖이 바라고 있는 눈치니 혼기가 찬 적합한 이들이 있으면 주선해 보게."
이어서 동사부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가 동사부일세. 조정에서도 많이들 관심을 가졌다는 그 백제 유민들의 땅이지. 여기는 종친과 입적서얼, 백성을 고르게 보내되 조선의 풍습과 말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이들이면 더 좋겠군."
가만히 양녕의 말을 듣던 이비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형님. 어째 종친들을 어디로 어떻게 보내는지 정리하고 파악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 어떻게 조선인들을 보낼지까지 방향을 잡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양녕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맞네. 자네도 참 뜬금없군. 조금 전에 각 지역으로 조선인들을 보내는 것이 끝날 때까지 머물면서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직접 조선인들의 이주를 맡아서 하다 보면 종친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동시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조정에 돌아가서 설명하기도 좋을 걸세. 뭐 좀 늦어져도 괜찮아. 일하느라 늦어진다고 하면 아바마마나 주상께서도 괜찮다 하실 테니까 말이야."
옆에서 최만리와 조말생이 측은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느끼면서, 이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수락해 버린 조금 전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녕의 말은 계속되었다.
"마저 설명하지. 풍후 지역은 중심부였던 대분군(오키타)를 그대로 대분목으로 삼았네. 이름도 대분부가 되었지. 비후 지역은 이전 중심지였던 국지군(키쿠치)이 너무 구석에 있는 곳이라, 포전군(현 쿠마모토시)을 새 중심지로 만들기로 했네. 당연히 이름도 각각 포전목, 포전부가 되었지."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인 이비는 차라리 일을 확실하게 빨리 끝내고 한성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며 양녕에게 물었다.
"비후의 국지면 키쿠치 가문이 다스리던 곳일 것이고, 풍후면 오토모 가문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다는 곳 아닙니까?"
"맞네. 풍후는 오토모 가문이 대를 이어 몇 백 년간 다스리기도 했고, 지난번 전투에서 시가지에도 많은 피해가 있던 탓에 거기 백성들은 우리가 새 주인이 된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어. 거기다가 동쪽으로 왜경까지 바로 이어지는 내해를 면한 요충지이면서 비옥한 농경지이기까지 하니, 다른 곳보다도 엄정을 기해서 조선 땅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야."
양녕의 말을 들은 이비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 안 되면 거기 살던 왜인들은 구주도 다른 지역으로 모두 분산시켜 버리고 조선 백성들로 아예 새로 채워야 할 수도 있겠군요."
지극히 정복자 같은 발상을 태연하게 말하는 이비가 마음에 들었는지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자네 일하는 방식이 나하고 잘 맞는군.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포전부 역시 포전목에 새로 고을을 쌓아 올려야 하니 백성들을 충분히 보내야 한다는 점은 기억해 두게."
양녕은 이어서 천년강 서쪽을 짚었다.
"비전 지역이로군요."
"그렇네. 여기는 동서로 나누어 둘로 만들었네."
"이미 있는 고을을 굳이 반으로 나눌 이유가 있습니까?"
비후나 풍후는 그대로 이름만 바꾸다시피 했으면서, 그 둘과 비슷한 크기인 비전을 반으로 나눈다는 말이 이상했는지 이비가 물었다.
"있지. 비전 서쪽은 해적들이 들끓던 지역이야. 치하도니 평호도니 하는 섬들이 많이 있고, 육지도 험준한 산이 해안까지 들어차 있지."
"여기가 이번 구주도 정벌 발단이 된 해적 놈들 소굴이었군요. 그럼 아직도 해적들이 있어서 고을을 나누신 겁니까?"
"그렇지는 않네. 오토모 가문을 끝장내고 구주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다음, 여유가 생긴 정동군 병력을 총동원해서 전부 쓸어냈으니까 말이야."
"해적들을 쓸어냈다는 말씀이지요?"
"아니. 해적들은 물론이고 모든 주민들을 다 끌어내서 구주도 여기저기로 분산시켰네. 자네 일하는 방식이 나하고 비슷하다는 게 그거 때문이었어. 동쪽으로 산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치하도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을의 사당과 민가를 헐어 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없네. 조정에도 보고한 일인데 자네는 못 들었나 보군."
마당을 쓸었다는 얘기를 하듯 태연한 양녕의 말에 이비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