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2화
72화
"서얼이 무과뿐만 아니라 문과도 볼 수 있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모여 있던 중신들이 놀라는 가운데, 허조 혼자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삼봉과 소도군도 죽은 지 오래됐으니 슬슬 그럴 때도 되었다 생각합니다."
허조의 말에 오히려 옆에서 듣던 호조판서 김점이 화들짝 놀랐다. 이방원의 정적이었던 삼봉 정도전과 소도군 이방석이 모두 서자 출신이어서 적자와 서얼을 차별하는 제도를 만든 것 아니냐는 말을 이방원 본인에게 직설적으로 던진 것이다.
"아니…… 이보게 대종백……."
영의정 류정현은 백발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허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허조의 이런 강직한 점은 이방원이 허조를 중용하고, 아들 이도에게도 추천한 이유였지만, 이렇게 너무 직설적으로 할 말을 하는 탓에 주변을 기겁하게 하는 상황도 자주 있었다. 다행히 이방원도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달관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보고 김점이 허조에게 해명인지 설명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시작했다.
"대종백, 어찌 종묘사직을 어지럽힌 그 두 사람 때문에 상왕 전하께서 그 제도를 만드셨겠습니까? 전조 고려 말 혼란기에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한 쌍으로 백년가약을 맺는 전통이 무너지고 권세가들이 저마다 본처 외의 여인을 들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처를 둘 둔 것은 이성계도 해당하는 일인지라 말하면서도 슬쩍 눈치를 봤지만, 이방원은 계속하라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권세가들이 첩을 들이는 풍조가 이어져 버렸는데, 이는 많은 폐해가 있습니다. 권세가들이 첩을 들이면 들일수록 다른 사내들이 혼인할 여인이 줄어드는 것이 첫째요, 권세가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다 한 자리씩 챙겨 주다 보면 그들이 큰 족벌을 이루는 것이 둘째요, 그렇게 자식들에게 챙겨 주기 위해 더 악착같이 권력과 재화를 긁어모으려 드는 것이 셋째입니다."
이번에는 이도가 직접 나서서 이야기를 이었다.
"대사도(호조판서)의 말이 맞소. 그래서 서얼의 문과 응시를 막은 것이오. 문관이 되지 못하면 조정에서 일하면서 파벌을 만들기도 어렵고, 자식들을 챙겨 준다 한들 문과 자체를 보지 못하니 권력과 재화를 긁어모아도 의미가 없소. 또 평생 벼슬길에 오를 수 없어 괴로워할 것임을 알면서도 첩을 들여 서얼 자식을 낳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오. 반대로 왕실의 자손은 서얼이라 한들 차등을 두지 않는 것은, 왕실의 세를 크게 하여 번창케 하기 위함인 것 아니겠소."
임금인 이도까지 직접 나서서 설득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듣기에도 맞는 말인 것 같았는지 허조도 인정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애초에 첩을 두는 것이 문제인 것이니 금지하는 것도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녕대군께서도 서얼의 문과 응시를 금지한 데에 이유가 있음을 아시지 않겠습니까? 대군께서 왜 그걸 갑자기 폐지하자 건의하신 것입니까?"
다른 중신들도 같은 의문인지 끄덕거리는 것을 보고, 달관한 표정에서 돌아온 이방원이 대답했다.
"경들에게 간단히 설명하고자 응시 제한을 없앤다 말한 것이지, 제도를 폐지하자 한 것은 아니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얼로서 나라에 공을 세운 자는 적자로 간주해 주자는 것이오."
"신 영의정 류정현 아뢰옵니다. 그리되면 서얼이면서 문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적자가 되어 적자로서 문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서얼의 응시를 막아 축첩을 제한하는 기존 제도를 흐트러뜨리는 문제도 없다 생각합니다. 또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보상을 내리는 것이 맞으며, 서얼로 태어난 것이 당사자의 잘못은 아니니 길을 터주는 것도 마땅히 군왕의 덕이라 생각합니다. 헌데 여전히 신은 왜 그것을 저 멀리 축자국의 후작이신 대군께서 건의하셨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구주도를 조선 땅으로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 하더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얼이 공을 세우면 적자로 간주해 준다고 하지만, 공을 세우려면 우선 무과나 잡과에 붙어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나라나 고을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서거나 해야 기회가 있지 않겠소. 어느 쪽이건 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구주도와 큰 상관도 없으니, 경들이 그것을 왜 양녕이 건의했나 의문을 갖는 것도 당연하오."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구주도를 새로 얻어 조선의 땅으로 만들어야 하니, 거기 가서 정착해 살며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도 일종의 공으로 취급하여 주자는 것이오. 대신 사사롭게 가는 자는 해당이 없고, 나라에서 자원자를 받아 몇 명씩 보내면서 적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허조가 날카로운 눈매를 한층 더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전하. 왜인들을 조선인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겠군요. 아마 대군께서는 반가의 서얼들 말고도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도 가고자 하는 이들을 보내 달라 하셨겠지요."
양녕이 보낸 건의 내용 가운데 아직 말하지 않았던 부분을 허조가 정확히 말하자 이방원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셨소?"
"역시 그렇군요. 구주도가 조선의 땅이 되었다 하나, 그 땅의 백성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왜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대로 둔다면 그 후대 또한 왜인으로 자랄 테니, 아무리 조선에서 구주도를 오래 다스린다 해도 소수의 조선인 지배층이 다수의 왜인들을 지배하는 형세를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동사부의 백제 유민 후손들이나, 녹아부의 심씨 가문을 비롯해 조선에 귀화한 왜인들이 있지 않소. 그들의 자손은 조선인으로 자랄 것이고 수도 적지 않을 것이오."
영의정 류정현의 말에 허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숫자가 적지 않다고 하니 구주도 백성에 비하면 일부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백성들과 섞인다고 하더라도 잘해봐야 그 후손들이 스스로를 조선인도 아니고 왜인도 아닌 구주인이라 여기는 게 고작이겠지요. 하지만 대군께서 건의하신 것처럼 조선 백성들과 반가의 서얼들을 보내면 조선인이 더 많이 섞이니 그들이 스스로 조선인이라 여기는 정도도 커지겠지요."
"조선인을 많이 섞는 것이 목적이라면 백성들만 많이 보내도 괜찮지 않소?"
"하루하루 사는 데에 바쁜 백성들은 자신의 뿌리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설령 조선 백성이라도 왜인들 틈에서 대를 이어 살다 보면 그 후손들은 선조를 잊고 스스로 왜인이라 여기고 말겠지요. 하지만 서얼들은 반가 출신이니 성과 본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혼인하여 낳는 자손들은 조선의 성과 본관을 가지고 있으니, 설령 대를 이어 내려가며 왜인 여인들만을 처로 맞이한다 한들 그 자손들은 스스로 조선인이라 여길 것입니다."
이번에는 김점이 허조에게 질문했다.
"그리하면 백제 유민들이나 귀화한 호족들만이 아닌 조선 출신으로도 상류층을 채울 수 있고, 반가 서얼들이면 혼인하는 격이 맞을 테니 유민이나 호족들과도 결혼해 그들도 더 확실히 조선인으로 만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서얼들의 혼인에만 의존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지 않겠습니까?"
"가는 백성들에게 개척하러 가는 공로가 있음을 인정해 본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성씨를 주면 됩니다. 같이 가는 서얼들에게 그 백성들이 족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돕게 하면 대를 이어 가면서 잊지도 않겠지요. 그리하면 그 백성들의 자손 역시 조선의 성씨를 가질 테니 스스로 조선인이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맞소. 양녕대군이 보낸 내용에 방금 경께서 말한 것도 있었소."
이도의 감탄하는 표정에 은근히 흡족한 표정을 지은 허조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기왕에 보내는 김에 왕실 방계에서도 정실 소생이 아닌 이들을 보내심이 어떨까 합니다."
허조의 뜻밖의 제안에 이방원이 살짝 머뭇거리며 말했다.
"양녕이 보낸 건의에 그런 것까지는 없었소. 그리고 양녕은 어찌 되건 폐세자의 신분이오. 보내는 이들이 방계에다가 정실 소생도 아니라고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양녕 주변에 왕족들이 모이게 하면 그들과 양녕이 결탁할 우려가 있다며 경계할 이들이 있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대군께서도 건의하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왕실에서도 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첩을 두는 일이 거의 없고, 반가의 서얼들이 적자로 인정받은 뒤 자식을 낳더라도 당연히 그들이 본처에게서 얻은 이들만 적자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왕실의 자손은 서얼의 구분 없이 모두 사대부 자손으로 인정받지요. 그들이 구주도에서 왜인 처를 많이 들이면 들일수록 그 자식 모두 조선인이 될 뿐만 아니라 왕실의 자손이 됩니다. 조선인을 늘리고 지배층까지 확고히 다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사실 양녕이 축자후로서 구주도를 잘 지배하게 하려면 양녕의 자녀들을 보내서 그들이 번성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이지만 그럴 수는 없소. 양녕의 가족들이 다 한성에 있는 것을 양녕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볼모라 생각해 양녕의 원정에 토 달지 않았던 신하들도 있었다 하니 말이오."
이방원이 납득하는 것을 보고 김점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신 호조판서 김점 아뢰옵니다. 또한 반가의 서얼들만을 보내 개척한다면 분명히 구주도를 서얼들의 섬이라 폄훼하는 이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차별이 퍼지면 국론이 갈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구주도에 왕실의 후손들도 많이 있다면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이방원이 몇 번 끄덕이더니 이도를 보며 말했다.
"일리가 있소. 그러면 양녕이 건의한 것은 그대로 양녕의 건의라 하여 주상이 윤허하여 공표하고, 왕족들 가운데서 보내는 것은 나하고 주상께서 별도로 결정하시어 보내는 것이라 하면 어떻겠소?"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바마마와 제가 결정한 것이라 하면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토론이 정리되고 다들 조금씩 긴장이 풀린 가운데,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졌음에도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허조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건의 하나를 올리는 데에도 양녕대군께서 반대 의견을 신경 쓰시느라 왕실에서도 보내 달라는 중요한 내용을 빼고 보내실 정도라니, 아직도 대군께서 해동의 오 태백이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소. 그래도 대종백께서는 받아들이시지 않았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렇게 말한 이방원이 허허 웃자 이도와 다른 신하들도 따라서 허허 웃었다.
원리원칙에 까다롭고 깐깐하기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허조가 양녕을 오 태백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아마 허조 본인이 양녕과 관련된 일마다 나서서 결사반대했을 것이라는 뜻을 담은 농담임을 다들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정작 허조는 반대하는 이들이 아무리 있더라도 예조판서가 믿어주니 든든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만족한 얼굴로 따라서 허허 웃을 뿐이었다.
* * *
며칠 뒤 오전.
스오노쿠니, 오우치 저택.
오우치 모리하루는 종이 하나를 소중하게 들고 읽고 있었다.
며칠 전 일본 조정에다가는 이제 오우치 가문 영지가 조선을 마주한 최전선이 되었으니 방비도 해야 하고, 양녕과 협상 결과를 다시 확인할 겸 한 번 직접 가봐야겠다는 이유를 대고 영지에 내려와 양녕을 만나 받아온 책봉 왕지였다.
"또 읽으셔도 기쁘신 모양입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조카 모치요가 스스로도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다. 기껏해야 태수급인 슈고보다 훨씬 높은 작위를, 그것도 주상 전하께 직접 받았는데 기쁘고말고."
모리하루는 왕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서류함에 다시 넣고, 이번에는 도장함에서 도장을 꺼내서 두 손으로 들고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은으로 제작되어 있고, 인뉴는 거북이 모양을 한 도장의 인면에는 '계응국후지인'이라 새겨져 있었다.
"이제 오우치, 아니 계응 고씨 가문이 후작가가 되었군요."
계응국은 조정에서 오우치 가문을 제후로 책봉하며 내린 나라 이름이었다. 백제의 왕손이니 백제를 이었다 하여 계응이라 한 것이었다.
실제 국명이었던 백제나 부여에서 글자를 따오지 않고 응준이라는 백제의 별칭에서 따온 것은 백제나 부여를 바로 국명에 넣어줄 경우 그 권위가 너무 강해질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모리하루와 모치요는 미칭을 써 주었다 생각하여 그저 기뻐할 뿐이었다.
"그런데 계응부가 아니라 계응국이면서 후작이라면 대군께서 가지신 축자후의 작위와 같은 급이 되는 것 아닙니까? 조정에서 어찌 이렇게 큰 작위를 덜컥 내려줬나 싶습니다."
모치요의 질문에 모리하루는 도장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대군께서 가지신 봉토가 후작급이라는 것일 뿐이지, 상왕 전하의 적자로서 받으신 대군이라는 작위는 그 자체로 종친인 공작에 해당하는 것이야. 설령 내가 제후로서 공작위를 받더라도 그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었군요."
대답하고 끄덕거리던 모치요가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그런데 백부님께서 책봉 받으시고 돌아오신 뒤로 이렇다 할 축하를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일본 조정에 책봉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는 데다가 영지가 최전방이 되어 방비하러 가본다 하고 오신 것이니 크게 잔치를 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몇몇 충신 가문 가독들을 모아 축배라도 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좋은 일이 있었으니 축하는 해야지. 그러면 아직 오전이니 지금 바로 모으거라. 오늘 저녁에 바로 해야겠다.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마라. 내일 바로 미야코로 가야 하니 말이다."
모리하루의 말에 모치요가 아쉬운 듯 물었다.
"벌써 가십니까?"
"서둘러 가서 불씨를 댕겨야지. 책봉 왕지를 주시며 대군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일본에 곧 일어날 기나긴 내전의 시작을 더 앞당길 불씨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