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1화
71화
이종무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윤덕에게 말했다.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왼쪽 얼굴을 거의 다 붕대로 감싼 최윤덕이 멋쩍게 말했다.
"건물 안으로 튕긴 덕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얼굴로 폭발을 좀 맞았습니다."
"괜찮은가? 많이 다친 건 아니고?"
손을 뻗으며 걱정스럽게 묻는 이종무의 말에 최윤덕이 얼굴의 붕대를 슬쩍 만지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눈도 멀쩡하게 잘 보이고, 치료해 준 군승이 말하기를 흉터는 조금 남겠지만 심한 화상은 아니라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 다행이군."
"왜 그러시오?"
갑자기 말을 흐린 이종무는 양녕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뻗었던 왼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서 쥐었다 펴보고, 오른손으로 만져 보기도 하더니 말했다.
"왼손에 감각이 없습니다. 잘 움직여지지도 않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아마 떨어진 충격 때문에 그럴 것이니, 푹 쉬면 나을 것이오."
위로하는 양녕의 말에 이종무는 괜찮다는 듯 왼손을 편히 내려놓고 말했다.
"왼손을 못 쓰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대군께서 무사하시고, 이미 구주도 정벌이 다 끝났으니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종무는 홀가분하다는 듯 미소지었다.
* * *
1420년 2월 중순 모일.
석성목 관아.
구주도 정벌 최후의 전투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 날, 석성목 관아 동헌에는 양녕을 만나러 멀리서부터 온 이가 있었다.
"대사마께서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양녕과 탁자에 마주 앉은 조말생이 대답했다.
"바닷길이 잔잔해서 괜찮았습니다. 대군께서도 그간 다친 곳 없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귀걸이를 다시 하셨군요."
조말생의 말대로 양녕의 귓불에는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폐세자가 되고 양녕이라는 군호를 받은 이후로 사치를 멀리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귀걸이를 하지 않고 다닌 이후 처음이었다.
"이제 전장에 나갈 일이 없어서 다시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구주도 백성들을 다 조선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조선말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조선옷을 입고 귀걸이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면서 본 왜인 출신 무사들도 조선옷을 차려입은 이는 많지 않았어도 하나같이 귀는 뚫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좀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올 걸 그랬나 봅니다."
조말생이 자기 귀걸이를 만지며 말하는 동안, 등자사가 들어와 찻잔을 내려놓고는 나갔다.
"아바마마께서는 정동군 복귀를 어떤 식으로 하시려 합니까?"
대화가 잠시 끊긴 김에 양녕이 본론으로 넘어갔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직접 온 이유인 정동군의 조선 본토 복귀와 해산에 관한 내용이었다.
"두 분 전하께서는 그냥 빨리 한 번에 귀환시키고 해산한 다음 대군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모양이셨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반대하는 것도 그렇고, 선례가 생겨 버리면 안 되니까요."
"어쩔 수 없지요. 폐세자면서 군대를 이끌고 있다는 지금 제 상황상 가뜩이나 경계하는 이가 많은데, 군대와 함께 돌아간다면 오히려 제가 더 위험해질 것이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결국 상왕 전하께서 내리신 결정도 그 점을 고려하셨지요. 우선 기존 장수들이 다 돌아가고 이번에 저와 같이 온 장수들이 교대해 각 부대를 맡습니다. 그 장수들 통제하에 꼭 필요한 주둔 병력들만 남기고 차례대로 귀국하고, 귀국하는 대로 해산해서 각자 원래 소속되어있는 곳으로 돌아가 정동군 해산이 완료되면 그때 대군께서 귀환하시는 순서입니다."
양녕이 조말생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휘체계를 먼저 회수하고 그다음 병력을 회수하는 것이로군요. 이러면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겠습니다."
"예.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괜한 소리가 나오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대사마께서 직접 오셔야 할 정도로 대병력이니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사실 시간이 걸리는 건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가 여기서 처리해야할 일이 많은지라, 지금 당장 정동군을 단번에 해산한다 하더라도 바로 한성에 돌아가기도 어렵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셔야 정동군이 해산하는 대로 바로 오실 수 있으실 테니 다음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조말생이 옆에 쌓여있던 서류함 하나를 통째로 양녕에게 내밀었다.
"주상 전하께서 축후 호족들과 시마즈 방계 가문들에 본관과 성을 내리시는 왕지입니다."
양녕이 서류함을 열고 내용물을 하나씩 넘기며 말했다.
"축후 호족들은 그냥 지금 영지를 본관으로 삼고 성을 내리고, 다른 시마즈 방계 가문들은 거기에 더해서 조선 본토로 이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조정에서 돕겠다는 내용이로군요."
몇 장 더 넘기던 양녕의 손이 멈추었다.
"혼고 가문만 뭔가 다르군요. 아예 도성에서 가까운 양천현에 땅까지 주어서 이주하게 하고, 그 가문 사내들은 조선말에 익숙해지는 대로 특별히 군에서 데려다 쓸 것이라니, 다른 가문들에 비하면 엄청난 우대입니다."
"그럴 만하지요. 가문 가독이 대군을 지키기 위해서 옷 속에 폭탄을 넣은 적을 용감히 막아서다 죽었으니, 그만한 대우를 해야 마땅하다며 조정 중신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두 분 전하께서도 바로 윤허하셨습니다."
양녕이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일전에 여기서 시마즈 방계 무사들을 가리켜 싸우면 영광, 싸우다 죽으면 더 영광이라 말했던 적이 있는데 정말로 그리되었습니다."
"그렇지요. 이제 이런 사례가 생겼으니 구주도의 다른 왜인들도 더 많은 영광을 얻기 위해 조선에 경쟁적으로 충성하려 들 것입니다."
"이해득실에서 나온 충성인 점이 씁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이해득실을 따져 행동한다면 이득이 있는 한 변심할 일은 없으니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요. 자, 다음은 동사부 호족들에게 내리는 성입니다."
다음 서류함을 받아든 양녕이 내용물을 살피며 말했다.
"제가 건의한 대로 백제 옛 귀족들의 성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아직도 백제 왕족의 제사를 지내고, 삼한의 말을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에 조정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충심을 치하하여야 하니 구주도에서 널리 쓸 뿐만 아니라 재주 있는 자는 조정에서도 뽑아 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양녕은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조선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이 삼한을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점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입니다."
조말생이 이번에 탁자에 올린 것은 큼직한 상자였다. 양녕이 이전에 심구풍의 서신을 보낼 때 했던 것을 참고했는지, 종이와 밀랍으로 철저히 봉인된 상자를 양녕 쪽으로 밀어놓은 조말생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우치 모리하루를 제후로 책봉하는 왕지와 제후의 도장이 들어있습니다. 대군께서 건의하셨고 조정에서도 동의해서 주상 전하께서 내리신 것이지만, 오우치 가문이 조선과 일본 양쪽의 신하를 동시에 한다는 게 좀 걱정되긴 합니다. 조선에서야 알고서 내린 것이니 상관없지만, 일본 조정이 알면 오우치 가문을 역적으로 몰지 않겠습니까?"
양녕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나중에 그들의 땅을 일본에서 떼어 조선의 제후국으로 삼으려면 미리 그들을 조선의 봉신으로 삼아두어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우치 가문도 바보는 아닐 테니 일본 조정이 모르게 하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재미난 일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사신을 보내어 충청도의 옛 백제 땅을 자신들의 영지로 달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들이 일본 땅을 들고 와서 제후로 삼아 달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면 조정에서 온 것은 이게 전부입니까?"
"예. 나머지는 어차피 병력 귀환에 관한 것이라 제가 알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대신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대군께도 수시로 보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마께서 도와주시니 일을 빨리 끝내고 속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군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대답하려던 조말생이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떠나시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구주도가 다 정리되면 주상께 구주도 땅과 축자후의 자리를 모두 드리고 한성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당황해 뭐라 말하지 못하는 조말생을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오 태백처럼 여기를 정복하고 제후가 되어 계속 다스릴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조정 신료, 아니 어지간한 선비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군을 오 태백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 모함을 받지 않으시려면 멀리 있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전부 내려놓고 한성으로 가는 것이 두 가지로 낫습니다. 첫째로는 여기 있는 게 오히려 오해를 사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까?"
"여기가 탐라 정도의 섬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구주도는 크기도 클 뿐만 아니라 금과 은이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리와 황도 얻을 수 있지요. 모두 조선에 꼭 필요한 것이면서 잘 나지 않는데, 제가 이 섬을 통치하고 있으면 전부 틀어쥐고 있는 꼴이 됩니다."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조말생이 말했다.
"게다가 대군께서는 염초밭을 만드는 방법도 알고 있으니 구리와 유황을 더해 화포를 만드실 수도 있지요."
"예. 게다가 동사부의 옛 시마즈 방계 가문들이 조선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녹아 심씨 가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무사로 이름난 이들이지요."
"과연. 구주도를 가지고 계신 것만으로도 군사력도 가지신 셈이 되어버리는군요."
"그렇습니다. 둘째 이유로는 여기를 완전히 조선 땅으로 만들려면 제가 없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를 다스리는 한 여기 사람들을 스스로를 조선국 백성이 아니라 축자국 백성으로, 주상의 백성이 아니라 저의 백성으로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땅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바다를 두고 떨어진 섬에서 그렇게 되면 이들이 떨어져 나가려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역시 대군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세자의 자리를 양보하신 데다가 일국의 군주 자리마저 내려놓으려 하시다니, 저 같은 필부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입니다."
조말생의 칭찬에 허허 웃던 양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조선의 백성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를 완전히 조선으로 만들기 위해 건의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 * *
며칠 뒤.
한성부. 창덕궁 조계청.
이도와 이방원, 삼정승은 물론이고 구주도에 간 조말생을 제외한 다섯 판서가 모두 조계청에 모여 있었다. 옥좌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이도와 나란히 앉아 있던 이방원이 입을 열었다.
"오늘 경들을 모이라 한 것은 양녕이 병조판서를 통해서 보낸 건의의 내용에 대해 토의하고자 함이오."
"신 예조판서 허조 아뢰옵니다. 저희가 양녕대군이 건의를 올렸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게 된 탓에 내용을 아는 것이 없으니 알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허조의 말에 이도가 대답했다.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병조판서가 바로 상왕 전하와 나에게 올린 것이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소."
모인 신하들이 모두 귀를 기울인 가운데, 이도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말했다.
"서얼의 과거 응시 제한을 없애자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