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70화
70화
오토모 가문 성의 망루를 겸하는 2층 저택 주변은 불길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저 웅덩이들은 다 무엇이오?"
양녕이 저택 주변 곳곳에 있는 큼직한 물웅덩이들을 가리키며 묻자 최윤덕이 대답했다.
"인화살로 불이 나면 끄려고 물을 담아 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인화살을 쏟아부은 것에 비해서 성안에 화재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구주도 전체에서 우리에게 당한 놈들이 모인 만큼 대비책도 착실하게 마련해 놓았나 보오. 저택에서도 격전이 있었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래층에 병력은 하나도 없었고, 몇몇 식솔들만 남아있어서 전부 다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아무래도 태수인 오토모 치카아키는 위층에 있는 모양입니다."
"여기가 최후 방어선이고, 저 타케다테라는 놈도 성 입구에서 결사항전을 했는데 저택 아래층을 비우고 위에 올라가 있다니 어색하군. 위층에 매복이 있을 가능성은 어찌 생각하시오?"
"위층이 겉보기에도 병력을 많이 둘 수 있을 크기는 아니지만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요. 이미 졌다고 생각하고 저 타케다테라는 놈이 싸우는 동안 배를 가르고 죽어서 조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놈하고 순서대로 시간을 끌고자 무언가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여기서 기다리시는 동안 병사들을 올려보내 끌고 내려오라 할까요?"
최윤덕의 말에 양녕이 잠시 고민했다. 쇼니 저택 공격 때처럼 적장이 할복해 있거나, 키쿠치 성 공격 때처럼 식솔들은 살려 주기를 요청하며 알아서 죽어 주러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최윤덕의 제안대로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것은 뼛속까지 사무라이인 시마즈 방계 무사들이고, 실제로는 무관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다고 하지만 양녕이 구주도에서 쌓은 위신의 대부분은 정동군 도원수로서 쌓아 올린 것이다.
여기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괜찮소. 적장을 만나러 올라가겠소. 대신 호위만 잘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최윤덕의 대답에 토모히사가 잽싸게 나섰다.
"저도 호위하겠습니다. 좁은 건물 안에서는 칼이 낫지요."
"고맙군. 잘 부탁하네."
산탄총을 든 병사들과 환도를 든 살수들이 앞서고, 장수들과 토모히사의 호위를 받으며 양녕은 저택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닫혀 있는 장지문들을 하나씩 열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해 가며 천천히 나아간 끝에 맨 끝 방 장지문을 열자 향냄새가 퍼져 나왔다.
문에서 마주 보이는 반대쪽 벽에는 작은 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앞에 갑옷조차 입지 않은 채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장년의 사내가 있었다.
"네가 오토모 치카아키냐?"
양녕의 물음에 치카아키는 말없이 손을 앞으로 모아 무언가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장하고 염불이라도 외웠나?"
옆에서 토모히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벽에 만들어진 단 위에는 작은 불상이 있었고, 그 앞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와 불붙은 초가 꽂힌 촛대가 있었다.
"그래. 내가 바로 분고의 슈고이자 오토모 가문 가독. 후지와라노 아손 오토모 치카아키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직함, 성, 씨와 이름을 말하는 치카아키는 손이나 머리를 가리는 작은 갑옷도 전혀 없었고, 그저 옷 위에 칼 한 자루만 차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은 어디에다 두고 칼만 차고 있느냐? 너희 부하들은 잘 잘려서 죽어 있던데 넌 살가죽이 쇠로 되어서 잘 안 잘리느냐?"
양녕의 비웃음 섞인 말에 치카아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차피 너희가 쓰는 총이라는 것이 갑옷도 뚫는 물건이라는데, 갑옷을 입어 봤자 몸만 무겁지 않겠느냐? 차라리 벗는 게 낫지."
"갑옷도 뚫는 물건을 든 우리하고 싸우면서 그럼 칼은 무슨 소용이냐? 다가오기도 전에 죽을 텐데."
"다 이유가 있지."
그렇게 말한 치카아키가 천천히 뒤돌아서며 허리춤에 찬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에 주변에 서 있던 포수들이 총을 들어 치카아키를 겨눈 가운데 양녕이 굳은 얼굴로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멈춰라. 아니, 절대로 쏘지 마라."
"왜 그러십니까?"
의아해하는 최윤덕의 질문에 양녕이 치카아키의 몸통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금 옷 안쪽에서부터 불씨 같은 것이 퍼지며 구멍이 났소."
양녕의 지적에 최윤덕이 치카아키의 몸통을 살피다가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군요. 설마……."
"아마 공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모양이오."
양녕의 말에도 치카아키는 옷을 한 번 내려다보고 태연하게 말할 뿐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군."
"불발 난 인화살에서 뜯어 낸 폭발부겠군. 인화살의 구조나 화약의 성질을 잘 모르니 섣불리 폭발부까지 분해하지는 않고 화살만 제거했겠지. 도화선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터지지 않은 화살이 아니라 날아가다 도화선이 꺼진 화살이었을 것이고."
양녕의 말에 주위에서도 상황을 파악했다. 수거해 온 인화살에서 떼어 낸 폭발부를 가지고 있다가, 양녕이 방에 들어왔을 때 합장하는 척하면서 앞에 있던 촛불로 도화선에 불을 붙여 옷 안에 넣은 것이었다. 양녕이 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칫 쏘아져 달궈진 총알에 맞은 화약이 바로 터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맞췄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치카아키는 칼을 뽑아 들며 양녕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다.
"어딜!"
포수들이 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양녕 옆에 있던 토모히사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칼을 뽑으며 튀어 나가 치카아키를 막았다.
"시마즈의 배신자 놈! 끝까지 우리를 방해하는구나!"
"네놈이 끝까지 우리를 방해하는 거겠지! 대군! 여기는 제가 막을 테니 어서 피하십시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조선군이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토모히사와 칼날 밑둥을 맞대고 밀어내며 힘싸움하던 치카아키가 외쳤다.
"어딜 도망가느냐! 지금이다!"
그 순간 조선군 뒤쪽 나무 천장이 무너지면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조선군이 잠시 당황한 틈을 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 사내 역시 치카아키처럼 갑옷 없이 오토모 가문의 문장이 수 놓인 옷만을 입고 있었다.
"쏘지 마라!"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바닥을 가리키며 외쳤다. 거기에는 방금 사내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진 촛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충격으로 꺼진 초에서는 가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천장 위에 불 켜진 초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어두워서만은 아니었음을 다들 순식간에 파악했다.
"이놈도 몸에 폭탄이 있을 거다!"
그 외침에 재빠르게 주변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양녕에게 밀착해 둘러싸고, 장수 몇몇이 칼을 뽑아 들고 사내를 제압하려 시도했다. 1층으로 향하는 방향에서도 소란이 벌어진 것을 흘끗 본 토모히사가 칼을 더 세게 밀어내며 치카아키에게 말했다.
"자폭할 놈을 하나 더 준비해 퇴로를 틀어막은 걸 보니 제법 머리를 썼군. 화약 위력이 줄어들까 봐 갑옷도 입지 않은 기개도 칭찬해 주마. 하지만 중무장한 우리에게 맨몸으로 덤벼서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붙어 봐야 아는 일이지."
그 말과 동시에 치카아키와 토모히사가 서로 마주 댄 칼날을 힘껏 밀치며 거리를 벌리고, 두 사람의 칼이 이리저리 오가며 빛이 번뜩였다.
두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며 토모히사의 몸통 갑옷에서 불꽃을 튀기기도 하고, 치카아키의 옷자락을 베어 내며 핏방울을 흩뿌리기도 했다.
치카아키의 검술이 예사롭지 않다고는 하지만 갑옷을 갖춰 입은 토모히사를 상대로는 피해만 쌓여 가는 것처럼 보였다.
"흡!"
하지만 다음 순간, 목 보호 갑옷과 턱 사이의 틈을 뚫고, 토모히사의 목에 치카아키의 칼이 박혔다. 죽음을 직감한 토모히사가 마지막 힘을 짜내 칼을 휘둘렀지만, 치카아키가 잽싸게 자기 칼을 밀치며 놓고 뒤로 물러난 탓에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목에서 피를 쏟아내며 뒤로 쓰러진 토모히사의 눈이 감겼다.
"덕분에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이제 끝이다!"
비릿하게 웃으며 치카아키가 달려드는 그때, 양녕의 옆에 있던 이종무가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갔다.
"끝은 무슨!"
순식간에 몸통을 붙잡힌 치카아키가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이종무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환갑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소 같은 힘에 버티지 못하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을 밀어 떨어뜨리고 나면 방 안으로 들어와 피하십시오! 거기 있다가 퇴로를 막은 놈이 터지는 것보다 안전할 것입니다!"
양녕에게 그렇게 외치며 창문까지 밀고 간 이종무가 치카아키를 창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했다.
"내가 순순히 떨어져 줄 것 같으냐?"
상반신이 거의 다 창틀 밖으로 밀려났으면서도 양손으로 좌우 창틀을 잡고 버티며 치카아키가 소리쳤다. 양쪽 다 엄청난 힘으로 밀고 버티는 통에, 창틀에서 우지직 소리가 났다.
"이미 늦었다. 내 살에 도화선이 닿아 지져지는 감촉으로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폭탄에 문제가 있어 터지지 않기를 기대해라."
다들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최윤덕이 환도를 뽑아 들며 뛰쳐나갔다.
"장군! 그대로 조금만 버티십시오!"
"안 돼! 오지 마!"
이종무의 만류에도 뛰어간 최윤덕이 창틀을 붙잡은 치카아키의 팔을 환도로 내리긋고 그대로 칼끝으로 치카아키를 찌르려는 순간, 팔을 베인 치카아키가 창틀을 놓침과 동시에 이종무 쪽에서 치카아키 쪽으로 힘이 쏠리며 균형이 무너졌다.
"장군!"
다음 순간, 폭음이 울렸다.
* * *
이종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아직도 어질해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드셨소? 조금 더 누워 계시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종무는 양녕의 목소리에 다시 누우며 말했다.
"충격 때문인지 아직 시야가 흐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승은 아닌 것 같군요."
기절에서 깨어나자마자 농을 하는 이종무의 모습에 양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 덕분에 저승은 아니오. 아까 오토모 저택 아래층이오."
양녕의 말을 들은 이종무가 흐린 눈으로 주변을 대강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이리저리 오가면서 무언가 정리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환도로 놈의 팔을 내리긋고 몸통을 찔렀습니다. 몸통이 밖으로 나가 있으니 옷을 자르면 폭약이 밖으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한 것이었는데, 조금 빗나가기는 했으나 옷을 자르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최윤덕의 목소리를 들은 이종무가 안도감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화 자네도 무사했군. 정말 다행이야.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나?"
"순간 균형이 무너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는 저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폭약이 옷에 걸려 제대로 안 떨어졌거나, 떨어지려던 순간 터진 것 같습니다. 장군하고 왜장은 창밖으로, 저는 방 안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내가 창밖으로 튕겨 나갔다고? 2층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몸이 멀쩡한 것 같은데?"
"적들이 화공에 대비해서 만들어 두었던 큰 물웅덩이들을 기억하십니까? 다행히 거기 떨어지셨습니다. 옷이 젖기는 했으나 저택에서 찾은 왜인들 옷으로 갈아입혀 드렸으니 감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네. 그러면 나는 살았다 치고, 적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저희가 내려갔을 때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시체를 살펴보니 터지고 그을린 상처가 가득했습니다. 아무래도 놈이 폭발을 거의 다 맞은 데다가 남은 폭발도 갑옷이 막은 덕분에 장군께서 크게 다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찰한 군승이 말하기를 뼈가 부러진 곳도 없다 하니 금방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참, 천장에서 떨어져 퇴로를 막았던 놈은 어떻게 되었나? 건물이 멀쩡한 걸 보니 터지진 않은 것 같은데, 폭탄이 불발이었나?"
"폭탄은 터졌습니다."
"터졌다고?"
"예. 대신 터지기 직전에 붙잡은 중기병연대장이 창밖으로 힘껏 집어던진 덕분에 공중에서 혼자 터져 죽었습니다."
"으허허! 이징옥인가 하는 그 신임 군관 말이지?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힘이 아주 장사……."
시력이 좀 돌아왔는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웃던 이종무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