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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69화 (6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69화

69화

"다르다니요?"

"큐슈의 슈고가 모두 몰살당하거나 변절해 버려 사라진다면 쇼군에게 큐슈를 잃은 책임을 물어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수 있지. 피해를 본 사람이 일본 땅에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이다."

냉정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타케다테의 모습에 모치타케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쇼군에게 변변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의 생존자들이 있다면 절대로 그 책임은 잊히지 않을 것이야. 지금 쇼군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 책임을 계속 묻기 위해서라도 생존자들을 도와줄 것이다."

"살아남아서 훗날을 도모하고, 치욕을 이기고 살아남아 목표를 완수하는 것 역시 무사의 길이라는 말씀입니까?"

부친인 전대 가독의 마지막 말을 인용하는 그 모습에 타케다테가 끄덕였다.

"그래. 지금 쇼군이 권력을 유지하더라도 실책을 만회하려면 큐슈를 탈환해야 하고. 누군가 지금 쇼군을 몰아내고 자리를 빼앗는다면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큐슈를 되찾아야 한다. 만일 북조가 멸망하고 남조가 드디어 미카도의 자리를 되찾는다면, 남조 충신들인 우리의 땅을 찾아주기 위해 큐슈를 되찾으려 할 것이야."

"언젠가 고향에 돌아올 날을 위해 살아남는 것이 제 목표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백부께서는 가지 않으시겠군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조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타케다테가 말했다.

"가독을 탈출시키고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우다 최후를 맞이한 자가 있어야 쇼군의 잘못이 더 크게 두드러질 것이고, 권력과 정치를 떠나서라도 같은 무사로서 그 최후를 가치 있게 여겨 우리 가문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모치타케는 말을 하려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았는지 가만히 자신의 손만 백부의 손에 올렸다. 그 손을 마주 잡은 타케다테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가문의 증표와 가보, 족보 같은 것들도 챙기라 했으니 잘 간직하거라. 네가 키쿠치 가문의 후계자라는 증명이 될 것이야. 그리고 오우치가 배반한 것이 명확한 탓에 그들의 영지와 바다를 지나가기가 위헙하다. 오지인 시코쿠를 지나서 가야 하니 부디 건강과 들짐승을 조심하거라."

말을 마친 타케다테가 조카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부로서가 아닌 가신으로서 어린 가독에게 절을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저는 먼저 가서 저승 나졸들을 베어버리고 저승 땅에 키쿠치 가문의 기반을 다지고 있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 부디 천천히 오십시오. 그러면 키쿠치 가문 가독 보좌 키쿠치 타케다테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러 가겠습니다."

타케다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주먹을 꽉 쥐고서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대로 다시 저택에 돌아온 그를 본 치카아키가 말했다.

"인사는 잘 하고 왔나 보군. 자네 눈가가 붉은 것을 보니 말이야."

"예. 조선군이 쏜 불화살에서 나는 연기가 엄청 맵더군요."

그 말에 치카아키가 아련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정말로 맵지. 얼마나 매운지 나도 아까 자식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조선군이 불화살을 쏘기도 전부터 눈이 맵더군."

이윽고 강 쪽이 아닌 성 입구 방향에서도 포성이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치카아키가 말없이 투구를 들어 건네고, 받아든 타케다테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끄덕이고는 저택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참 뒤.

사방에 박살 난 시체가 널린 오키타 시가지 속을 양녕이 장수들과 함께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조금 뒤에서 최만리가 수척해진 얼굴로 양녕을 따라오고 있었다.

"멀미가 아직 심하면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되네. 아군이 이미 다 정리를 마쳤다 해서 내가 가는 것이기는 하나,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방금 상륙한 강변에서 기다려도 괜찮아."

"멀미 때문에 속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시체를 처음 봐서, 그것도 온전하지 못한 시체를 잔뜩 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쉬는 게 낫지 않겠나? 성을 점령하는데 엄청난 격전이 벌어졌다 그랬으니, 이 앞에 있을 시체들은 온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일 걸세."

"아닙니다. 상황이 다 끝났다고는 하지만 전쟁터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직접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퀭한 얼굴에서도 빛나는 그 눈빛을 본 양녕이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다시 앞으로 가며 말했다.

"알겠네. 대신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그렇게 걸어가기를 한참.

어느새 성이 있는 구릉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릉 정면 비탈에는 성 입구와 시가지를 잇는 좁은 경사로가 몇 번 꺾어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곳에도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앞서와 달리 조선군의 표식을 한 병사들이 많아 보였다.

아군 시체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들것에 담아 옮기는 병사들 뒤로, 다른 병사가 다리를 잡고 끌고 가던 적 시체의 허리가 뚝 끊어지자 양녕의 뒤에서 최만리가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났다.

"정말 상상 이상의 격전이었나 보오."

호위를 받으며 비탈을 올라가던 양녕의 질문에 최윤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놈들이 방어선을 치밀하게 만들어둔 탓에 성 근처로 오면서부터 격전이 벌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경사로를 다 올라간 성 입구에서 가장 많은 아군이 죽고 다쳤습니다."

"원래 공성전에서는 입구가 가장 치열하긴 하지만, 굳이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더 있었나 보오?"

양녕이 입구에 들어서며 주변을 살폈다. 경사로 끝에서 이어지지 않았다면 문이 있던 위치라고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초토화된 모습이었다.

"저놈 덕분입니다."

최윤덕이 가리킨 입구 조금 안쪽에는 말 묶어두는 기둥에 한쪽 팔이 묶인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무사가 있었다. 그 옆에는 갑옷 위에 덧입은 흰 천에 피칠갑을 한 시마즈 방계 무사 하나가 칼을 뽑아 들고 감시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자기가 키쿠치 타케다테라 하면서 길을 막았습니다. 말을 끌고 와 입구에서 총알을 막고, 말이 쓰러져 죽은 것을 장애물 삼아서 버텼다는군요."

"지독한 놈이로군."

"예. 입구와 그 주변을 모조리 날려 버려 다른 적병들을 다 죽였는데도 용케 혼자 살아남아서는, 좁은 길목에서 칼과 창을 바꿔 들어가며 끈질기게 막았습니다. 결국 시마즈 무사 하나가 자진해서 뛰어들어 맞붙는 끝에 간신히 뚫었는데, 제압당하고서도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길래 혹시 몰라 저리 묶어 두었습니다."

"키쿠치 타케다테라면 키쿠치 성 전투에서 죽은 전 가독의 동생이오. 저번 전투에서 죽지 않고 여기로 기병대를 인솔해 온 자가 이자인 것 같소."

그렇게 말하며 타케다테에게 다가간 양녕이 몰골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투구는 벗겨져 옆에 굴러다니고 있고, 드러난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포박하지 않고 팔 한쪽만 기둥에 매 놓은 이유가 있었군. 아니 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하나. 나머지 팔 한 짝은 어디 버렸느냐?"

부어오른 얼굴을 들어 올린 타케다테가 옆에 서 있던 무사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이놈이랑 싸우다가 잘렸다. 저기 어디 떨어져 있을 테니 필요하면 가져가거라."

피식 웃은 양녕이 옆에 서 있던 무사에게 말했다.

"자네가 바로 자진해서 뛰어들어 이놈을 제압하고 입구를 연 무사 인가 보군."

"예. 그렇습니다. 혼고 토모히사라 합니다."

"까다로운 적이었다고 하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놈 칼솜씨가 제법이긴 했지만 갑옷 위에 천을 두른 덕분인지 빈틈을 제대로 노리지 못해 저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혼고 토모히사라 하였지? 혼고라면 가장 처음으로 시가지에 돌입한 그 무사 가문이로군. 내 이 공로는 기억해 두었다가 조정에 알리겠네."

무사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가득 찼다.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시키실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염라대왕의 목이라도 가져오겠습니다."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던 타케다테가 불쑥 말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네가 바로 조선의 왕자인 모양이군. 배신자 놈하고 논공행상이나 열심히 하거라. 어차피 난 임무를 완수했으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임무를 완수해서 여한이 없다라…….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에서 후계자들을 포함해서 제법 여럿 탈출시킨 모양이구나. 저택이 아주 썰렁해."

"그래. 이 이후의 일이야 신불만이 아시겠지만, 적어도 여기 성에서만은 무사히 탈출했다."

"귀신과 부처까지 찾을 것 없다. 그들은 무사히 미야코까지 갈 것이니 안심하고 죽어라."

비아냥 섞인 양녕의 말에 타케다테가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지?"

"아까 내가 배 위에서 말한 대로 조선군 함대가 분고 해안을 모조리 봉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은 너희가 달아나는 것을 찾아서 붙잡거나 죽이라는 게 아니야. 명백하게 무장한 놈이라면 죽이지만,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도주 중인 놈들은 통과시키라 지시했다."

"우리가 도주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미리 그냥 보내주라 지시를 했다고?"

"보내주는 정도가 아니야. 필요하면 무사히 시코쿠 해안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라 지시했다. 너희가 혹시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수를 더 써서 오우치 영지로 가기로 했어도 똑같아. 그들도 마찬가지로 못 알아본 척하고 도와줄 거다."

타케다테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제정신이냐? 큐슈의 슈고였던 가문이 살아남으면 어떤 형태로건 일본 조정에서는 큐슈를 되찾으려 들 수밖에 없어. 설령 조정에서 포기하더라도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은 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몇백 년이 지나더라도 큐슈를 되찾으려 할 것이다."

"당연히 목적이 있으니 했지. 너희 두 가문의 도주자들을 중간에 잡아 버려도 어차피 이번 일의 책임을 두고 쇼군파와 반쇼군파는 싸울 것이다. 하지만 쇼군파의 세력이 약하니 분쟁이 금방 끝나 버리겠지. 그래서 이미 항복 협상 때 이번 정벌의 원인이 된 해적들은 남조에서 자신들을 따르는 큐슈의 남조 편 슈고들을 시켜 일으킨 것이었다는 내용을 넣어두었다."

"흥, 그걸 순순히 믿는 놈이 있느냐? 애초에 그게 무슨 효과가 있느냐?"

"믿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적어도 쇼군은 그게 사실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고, 북조가 세운 미카도와 귀족들도 찝찝하게 교대 계승을 위반한 채로 있는 것보다는, 조선을 끌어들였다는 책임을 지워 남조를 쓸어버리는 쪽이 깔끔하다 생각하겠지."

남조를 쓸어 낸다는 말에 남조 충신 가문인 타케다테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리고 반쇼군파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여전히 남조에 충성하는 이들과, 역적의 편이라 몰리기 싫거나 몰려서는 안되는 입장인 이들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셋으로는 쪼개져야 분란이 오래가지 않겠느냐?"

"정말로 미쳤구나. 아무리 분란을 오래 끌어도 내전인 이상 언젠가는 합쳐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아니 그렇게 되기 이전에도 기회만 된다면 일본의 권력자는 자신이 고토를 되찾았다는 위신을 세우려 큐슈를 되찾으려 할 것이고, 두 가문이 이어지고 있는 한 그 명분은 계속 이어질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고작 분란을 크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탈출을 도와주기까지 한단 말이냐?"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게 아니야. 그것도 내가 노리고 한 것이다. 오히려 너희가 큐슈를 되찾는 것을 포기하는 게 내 노림수가 어긋난 것이다."

"너희 손에 들어간 큐슈가 위험에 처하는 게 노림수란 말이냐?"

"그래. 너희를 보내지 않으면 큐슈 슈고는 죽은 자와 투항한 자만이 있게 된다. 그러면 훗날에라도 일본이 큐슈를 되찾으려 들 때 과거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했던 것이라 하면서 다시 일본에 붙을 수 있지."

양녕은 자세를 낮추고 앉아 타케다테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희를 보내면 큐슈 슈고는 죽은 자와 배신한 자, 되찾으려는 자 셋이 된다. 그러면 큐슈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려 해도 일본의 권력자는 절대로 받아줄 수 없어. 너희를 명분 삼아서 배신자들을 벌하고 큐슈를 되찾겠다고 권력을 얻은 자가 순순히 받아줄 수 있겠나?"

너무 당당하게 배신자라 말하는 그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최윤덕이 무사의 눈치를 슬쩍 보았지만, 무사는 오히려 지극히 공감한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권력자에게 큐슈는 되찾아야만 하는 땅이면서 그 방법은 정복뿐이니 큐슈는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겠지."

"큐슈가 위협당하는 수를 두어서 너희가 대체 얻는 게 뭐지?"

"큐슈는 살아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조선이 되고자 할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도 큐슈가 위협받는 것을 가만히 둘 수 없으니 적극적으로 조선으로 만들고자 하겠지.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서 큐슈는 땅도 사람도 완전히 조선의 일부가 될 것이다."

타케다테는 양녕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체 그렇게 해서 큐슈를 얻으려는 이유가 뭐지. 조선에서 귀한 금은과 구리가 나기 때문이냐?"

"거기다가 석탄도 더해야지. 설령 자원이 아니더라도 너희가 바다를 통해 교역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길목을 막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밥 짓는 데에나 쓰는 냄새 나는 돌덩어리와, 상인들이 가져오는 사치품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다. 지금 세상에서 그 가치를 아는 이는 얼마 없을 테니까."

"그리고 대체 곧 죽을 나에게 이렇게 다 대답해 주는 이유도 모르겠다."

양녕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적 놈의 후손이자 끝까지 우리 병사들에게 피해를 준 네놈이, 주군을 무사히 대피시키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기쁜 마음으로 죽는 꼴을 어떻게 보겠느냐?"

그 말에 타케다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한 모든 짓은 내가 둔 수를 하나도 망치지 못했고, 탈출시킨 가문 후계자들은 앞으로 대를 이어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내 장기말이 되는 셈이다. 너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에서 탈출했다 생각했겠지만, 그곳은 애초에 내 손바닥 안이라는 더 큰 독 안이었어. 어때, 이제 좀 편히 못 죽을 것 같아졌나?"

분노한 타케다테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흥분한 탓에 몸 상태가 악화되었는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쿨럭거리며 피를 토했다.

"이대로 천천히 죽게 놔두게."

양녕은 무사에게 그 말을 남기고 저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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