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66화
66화
타케다테는 말을 몰아 연기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으며 연기를 뚫고 들어갔다. 곧 적과 싸운다는 생각에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고, 백린 연기를 뚫고 나오며 다시 제대로 숨쉬기 시작한 타케다테의 눈앞에 조선군 함선들이 보였다.
"이게 무슨!"
정확하게는 함선들만 보였다. 해안에는 배들이 접안해 있고, 상륙용 널빤지들도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해안에는 조선군 병사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함선 위에 쭉 늘어선 조선군 병사들이 조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타케다테와 눈이 마주친 조선군 장수가 망루 위에서 씨익 웃으며 외쳤다.
"방포!"
예상 못 한 상황에 무심코 속도를 줄이던 키쿠치 기병대를 향해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옆을 따라오던 무사가 타고 있던 말이 총을 맞아 나뒹굴고, 낙마한 무사는 말 몸통에 깔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는 상황에서 타케다테가 외쳤다.
"속도를 줄이지 마라! 적이 없으니 가까이 붙지도 마라! 연기가 남아있는 동안에 몸을 숨겨야 한다!"
그렇게 외치며 말머리를 돌려 다시 연기 쪽으로 향했다. 숨을 참을 새도 없이 연기 속으로 들어가 콜록거리며 사라지는 키쿠치 기병대의 등 뒤로 여전히 총알이 날아들었다.
"사격 중지! 방포한 포수들은 재장전한다! 재장전이 완료되면 상륙을 개시할 테니 너희는 먼저 내리는 부대를 엄호한 다음 내리도록!"
"예!"
지시를 내린 수군여단장 박초는 키쿠치 기병대가 허겁지겁 달아난 자리에 남겨진 무사들의 시체를 보고 코웃음을 치며 작게 말했다.
"우리가 근접전에 약하다고 해서 배만 댔다 하면 냅다 달려들어 오는 네놈들 습성에는 비전 지역에서 마츠라 가문 해적 놈들을 도륙 내면서 이골이 났다. 같은 전술을 계속 쓰는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이제 좀 알겠느냐?"
* * *
한편, 시천(이치카와)에 진입한 조선군 함대는 쉽게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겹겹이도 해 놨구만."
망루에서 선두 함선 너머를 보던 양녕이 툭 뱉듯 던졌다.
오키타 시가지와 오토모 저택이 있는 상류로 올라가던 조선군 함대를 반겨준 것은 하구에 있던 것처럼 서로 엮여 설치된 통나무 장애물이었다. 선두 함선이 조금 전처럼 오키타 쪽으로 연결된 부분을 끊어 내려 포격 중이었지만, 하류보다 성글게 엮어서 만든 탓에 오히려 포탄에 맞아도 출렁거리기만 할 뿐 잘 끊어지지 않아 시간이 좀 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화살을 쓸 수도 없으니 답답합니다."
"밧줄이 타 버리면 활활 타는 통나무가 물살을 타고 아군 함선에 돌격하는 상황은 피해야만 하니 말이오."
양녕이 대답하며 오키타 방향 강안을 보았다. 강안에는 제방 겸 석축과 그 위에 올라간 견고한 목책이 상류까지 쭉 이어져 있어서 병사들을 내려 통나무를 끊게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대군! 조심하십시오!"
"무슨……. 이런!"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양녕이 혀를 차면서 자세를 낮췄다. 오키타 쪽에 이어져 있던 밧줄이 끊어지자마자 묶여 있던 통나무들이 전부 풀어져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자네도 몸을 낮추게!"
양녕의 외침에 뒤이어 선두 함선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최만리가 다급하게 바닥에 몸을 낮추었다. 곧이어 대장선에도 통나무가 부딪히며 쿵 소리를 내고, 묵직한 진동과 함께 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최만리의 입에서, 입에 생강을 물고 있어서 제대로 발음이 되지는 않았지만, 선비가 할 말이 아닌 말들이 튀어나왔다.
"제법 머리를 썼습니다. 하구에 설치했던 건 튼튼하게 엮어 놔서 통나무가 거의 흩어지지 않았던 것도 이걸 노린 모양입니다."
흔들림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양녕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최만리를 흘끗 보고는 이종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것 같소. 하구 장애물을 철거한 다음 앞으로도 한쪽 끝만 끊어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강에 진입하는 순간, 뒤로 물러나기도 모호한 상황에서 장애물 하나를 끊을 때마다 물살을 탄 통나무들에 공격받는 구조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대로 상류로 계속 가다간 자신이 탄 대장선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양녕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여기서 느리게 가면 적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오. 이대로 계속 가겠소. 대신 가장 통나무에 많이 맞을 선두 함선은 적당히 교체를 해 피해를 분산시키고, 뒤따르는 함대는 강 중앙에서 일직선으로 가면 통나무에 잘 부딪히지 않을 테니 괜찮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충격을 대비해서 자세를 낮추시거나 난간을 붙잡고 계십시오."
"알겠소."
양녕이 대답하자 이종무가 망루에서 내려갔다. 그 뒤로 통나무 장애물 네댓 개를 끊고, 선두 함선을 두 번 바꾸고, 가끔 통나무가 대장선에 와 들이받아도 최만리가 적응된 것인지 지친 것인지 더 이상 적들 족보를 대신 읊어주지 않게 되었을 무렵, 오키타 쪽 강안에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 치밀하게 막아놨습니다. 지금까지 구주도에서 생긴 모든 패잔병들이 다 모인 곳이라 대책도 많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요."
새 생강 하나를 씹으며 비틀거리고 걸어온 최만리가 난간을 붙잡고 말했다.
최만리의 말대로 강을 면한 시가지의 방비는 치밀했다. 제방처럼 쌓인 석벽이 있고, 그 위에 목책이 있고, 그 뒤에 토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시가지는 지붕만 보일 정도였다.
"그런 것 같네. 특히나 토벽을 쌓은 걸 보면 확실하지. 아마 화포를 쏴 봤자 토벽에 막혀서 건물까지 닿지 않을 거야. 적들이 굳이 지붕에 궁수를 올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지. 지붕에서 활을 쏘려 해 봤자 닿지도 않고 아군 조총에 죽어 나갈 뿐이니 그냥 상륙하는 것만 막으려는 것 같아."
"제법 머리를 썼습니다. 구주도 상륙 첫날 식빈도 시가지가 대포에 쓸려나갔던 교훈이 반영되었으니, 아마 키쿠치 패잔병들에게 들은 것도 반영했으면 저택과 성은 물론이고 시가지에도 방화 대책을 해뒀겠지요."
망루로 올라오며 이종무가 말한 것을 들은 양녕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뿐이오. 패잔병들이 겪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오. 시작해야 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시작하라!"
이종무가 망루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우렁차게 울리는 태평소 소리를 신호로 배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갑판의 병사들이 함포 각도를 올리고, 판옥선 중앙에 설치된 화차를 돌려 시가지 방향으로 향했다. 병사 둘이 인화살이 장전된 발사대를 조심스럽게 들고 와 화차 위에 결합하고 제대로 조준한 다음, 화재 방지를 위해 적신 거적까지 주변에 깔고 외쳤다.
"화차 준비 완료!"
대포를 맡은 병사들 역시 화약 자루와 포탄을 포구에 밀어 넣고, 점화공에 점화약까지 다 채우고 외쳤다.
"대포 준비 완료!"
화차와 대포 모두 준비된 것을 확인한 이종무가 양녕을 돌아보았다. 양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최만리는 긴장한 얼굴로 난간을 꽉 붙잡았다.
"방포!"
"방포하라!"
이종무의 외침을 군교들이 복창했다. 순간 강 전체를 흔드는 굉음이 울리며 포탄들이 하늘을 날았다.
포탄들이 시가지 곳곳에 둔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멀리서 봐도 어디 포탄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기왓장과 나뭇조각들을 솟구쳐 올렸다.
"발사!"
"발사하라!"
이번에는 화차에서 심지가 다 타들어 간 인화살들이 연기를 길게 꼬리처럼 남기며 날아갔다. 시가지 지붕만 보이는 상황에서 거리를 재기 어려웠지만, 대신 심지를 불규칙하게 조절한 인화살들은 공중에서 터져서 사방으로 불덩어리를 흩뿌리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떨어진 다음 연기가 올라오는 것만 보이기도 했다.
"문제없나 살피고 불발된 포탄이나 인화살이 있으면 조심해서 처리해라!"
이종무가 지시를 내리고 병사들이 분주하게 다시 움직이는 동안, 난간을 붙잡은 최만리는 대포 발사의 진동이나 메케한 화약 연기에도 불구하고 멀미마저 잊은 듯 멍하니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포 사격은 처음 보는 것이겠군. 어떤가?"
"어마어마합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 최만리의 모습에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그래. 그 어마어마한 공격을 적이 접근하지 못하는 강 위에서 퍼부으려고 여기 들어온 걸세. 아무리 무겁고 큰 대포라도 배에 싣고 있으니 쉽게 옮겨가며 쏠 수 있지."
뒤따라오던 판옥선에서도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포성과 함께 시가지에서 잔해가 솟구쳤다. 뒤이어 날아가는 인화살들을 보던 최만리의 입에서 씹던 생강 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조금 전에 패잔병들이 겪지 못한 것은 대비하지 못했을 것이라 하신 것이 이것이었군요. 이렇게 천천히 상류로 가면서 함선들이 순서대로 발사와 재장전을 반복하면 쉼 없이 공격을 쏟아부을 수 있으니, 방화 대책을 해놓았더라도 무의미하니 말입니다."
"그렇네. 물과 거적, 불 끌 사람을 마련해 두었어도 포탄에 날아가 버리고, 인화살이 불을 내고, 불을 끄려고 하면 다시 포탄이 날아오니 말이야. 게다가 정확히 다음에 어디에 포탄과 인화살이 떨어질지도 알 수 없으니 대비도 못 하고 사기만 떨어지겠지."
망루 아래를 지켜보던 이종무가 다가와 양녕에게 보고했다.
"불발된 포탄은 없고, 제대로 안 날아간 인화살도 없습니다. 다시 장전해두고 기다리다가 맨 뒤 함선에서 발사를 마치고 신호를 보내면 그때 발사하겠습니다."
"좋소. 그렇게 쭉 가시오. 대신 여기서 시가지에 포탄과 인화살을 너무 많이 써서 정작 오토모 가문 저택과 성을 공격할 때 부족하지는 않게 하고, 시가지에 붉은 깃발이 올라오면 그 방향으로는 절대로 포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만 확실하게 해주시오."
"물론입니다. 슬슬 깃발이 올라올 것 같으니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종무가 저 멀리 해안 쪽 시가지를 보았다. 거리가 멀어 화살이 날아다니는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어오르던 화약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 * *
오키타 시가지 외곽.
시가지 외곽은 키쿠치 성 전투의 교훈을 반영해 토벽과 목책으로 보강되어있었다. 하지만 강과 강을 잇는 물길을 내는 것만으로 해자와 토벽을 동시에 만들 수 있었던 키쿠치 성과 다르게, 오키타 시가지는 해자는 고사하고 토벽으로 전부 두를 엄두도 나지 않는 크기였다. 대신 외곽 건물과 건물 사이에 토벽과 목책을 쌓아 장벽을 만들었다.
"방포!"
굉음을 내며 날아간 포탄이 건물 외벽을 뚫고 들어가자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보던 최윤덕이 비웃듯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이런 방법은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목이 전부 두꺼운 토벽으로 막혀 대포로 뚫을 수 없는 것을 확인한 최윤덕이 선택한 방법은 단순했다. 토벽이 아닌 건물 외벽을 뚫어서 시가지로 가는 길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적 기병대는 어찌 되었는가? 여전히 아군을 유인하듯 치고 빠지기만 하나?"
최윤덕의 질문에 옆에 있던 군관이 대답했다.
"아군이 아무리 유인해도 따라올 것 같지 않았는지 몇 번 공격을 시도하다 지금은 물러갔습니다. 아군 피해가 제법 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흥. 기병들이 시가지로 드나드는 입구를 찾아 우리가 멀리까지 기동하면 보급선과 후방을 교란할 작정이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 들이받아 봤나 보군."
우렁찬 대포소리가 다시 울리고, 포격 당하던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보강용 나무판자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본 최윤덕이 말했다.
"이제 곧 진입해야겠군. 그자들에게 알리게."
"예."
대답한 군관이 향한 곳은 최전열 약간 뒤쪽이었다. 거기서 포격을 구경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이에게 말을 걸었다.
"진입 준비를 하시오."
"드디어 때가 되었나 보오. 자! 다들 준비해라!"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주위에 서 있던 이들에게 외쳤다. 하나같이 일본식 갑옷에 조선식 투구를 쓴 부하들이 준비를 마치고 끄덕거리자 사내가 군관에게 말했다.
"대군께서 마련해 주신 죽을 자리에 뛰어들 준비가 다 되었소. 언제든 말씀하시오."
투구 아래에서 시마즈 방계 무사들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