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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63화 (6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63화

63화

"저희 전부가 조선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호족 대표의 질문에 양녕이 덤덤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백제 유민의 핏줄이 섞였고, 백제 임금의 제사를 지내고, 백제의 말을 아직도 쓰고 있다. 이역만리 땅에서도 몇 백 년간 백제인으로 살아왔던 너희가 어찌 삼한인이 아니고, 삼한을 계승한 조선의 백성이 아닐 수 있겠느냐?"

이어서 동사부 백성들에게 와닿을 이야기를 꺼냈다.

"동사부 백성들은 조선인이니 당연히 조선인의 세율을 적용할 것이다. 왜인들은 소출의 3할이 세금이고 정동군을 위해 일해야 조금씩 내려가지만, 너희는 다른 조선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소출의 1할이 세금이다. 대신 군역과 같은 다른 의무 역시 조선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져야 하겠지."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삼한 백성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무사보다 토호에 가까운 이들이라지만, 세금을 내기보다는 거두는 쪽이었을 호족들이다. 그런 그들이 세금에 기뻐하고 군역을 충분하다 하는 모습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이번에는 호족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이야기를 꺼냈다.

"또 주상 전하께 이 고을을 오랫동안 지켜온 너희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내려 달라 요청드리겠다."

"본관과 성씨를 말씀이십니까?"

한미한 성이거나, 그나마도 성 없이 씨만 있기가 부지기수였던 이 지역 호족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래. 한때 백제에는 큰 무리를 이룬 여덟 가문과 거기에 들지는 못했지만 사서로 전해지는 여러 가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대가 끊어지고 없다. 주상께 말씀드려서 그 성씨를 너희에게 새롭게 내려달라 할 테니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제사를 지내주며 너희가 새롭게 이어가거라."

"그러면 그 성씨는 귀족들이 쓰던 것 아닙니까?"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호족에게 양녕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제 임금을 보필하던 가문들의 성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백제 임금의 제사를 몇백 년간 지내온 너희가 잇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어서 가장 중요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제 너희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말을 가르쳐주고 조선옷을 지어 입는 법도 가르칠 것이다. 조상의 말과 의복을 온전히 되찾아 명실상부한 조선인이 되어라. 또한 너희가 삼한의 백성이면서도 구주도에 오래 살아 왜인들의 말과 풍습에도 능숙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재주 있는 자를 중용할 것이니 장차 구주도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만드는 데에 조선의 백성으로서 충성을 다하거라."

"감사합니다, 왕자님!"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족들이 바닥에 엎드려 양녕에게 절했다. 그것에는 조선인으로 인정받은 감격보다도, 귀족으로 인정받고 빠른 벼슬길도 열린 데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는 게 뻔히 보였지만 양녕은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절을 받았다.

* * *

한참 뒤.

동사부 중부지역.

북부 호족들이 지금 바로 잔치를 열 테니 더 있다 가시라며 잡는 것을 겨우겨우 거절하고 나온 양녕 일행은 바로 남부 호족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남쪽이라고는 하지만 겨울철 추운 날씨에 아침부터 일어나 움직인 탓에, 다들 조금씩 지쳐서 말없이 앞만 보고 말을 타고 가던 도중 최윤덕이 침묵을 깨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신기한 일이 다 있습니다. 꿈에 찾아온 신인을 만나시는 것을 보면 역시 대군께서는 비범한 분이십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소."

"계책으로 단숨에 그들을 포섭한 것이야 사람의 힘으로 하신 것이지만, 인도를 받은 것은 신령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너무 겸손해하시지 않으셔도 될 일입니다."

이번에는 옆에서 이종무가 말했다. 그 둘뿐만 아니라 동행한 이들 모두가 양녕의 꿈을 신비로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애초에 꿈과 그 내용 모두가 양녕이 꾸민 일이었다.

'15세기에 이런 신비담을 써먹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내 지식을 쓰기 위해서는 이전과 조금 다른 방식을 써야만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구주도에서도 조선과 정반대 편에 있고 험난한 산 너머에 고립되어 백제어가 800여 년간 흔적을 남길 수 있을 정도인 휴우가 지역이다. 그나마 어떻게든 사람을 통해 듣거나 소식을 접했다 칠 수 있는 슈고급 가문들의 일이나 구주도 북부 호족들의 상황과는 달리, 휴우가 지역의 언어나 사당에 대해서 양녕이 잘 아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로 기록에 남을 수 있어서 차라리 신비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덕분에 이제 녹아 심씨 가문을 견제하기도 좋아졌습니다. 사실 조선에서 대군과 함께 둘뿐인 제후인 그들이 녹아부 일대를 고스란히 가지게 된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접한 동사부 주민들이 삼한인이자 곧 조선인이 되었으니 그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고, 왜인에 가깝지만 적극적으로 조선인이 되려는 그들을 구주도 경영에 쓰신다 하니 구주도 전체를 동화시키는 데에도 좋을 것입니다."

안심한 듯 말하는 최윤덕과 달리, 이종무는 약간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옛 백제 귀족의 성까지 주신다는 건 좀 과분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차라리 백제왕손인 오우치 가문 밑에 있는 세력이 큰 호족들에게 주어 그들도 스스로 삼한인이 되게 하면, 오우치 가문도 하나로 뭉칠 수 있고 오우치 세력 전체를 조선편으로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과분하기에 준 것이고, 세력이 크기에 주지 않은 것이오."

선문답 같은 양녕의 대답에 이종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오우치 가문은 이미 백제왕손의 권위를 가지고 있소. 수하 호족들에게도 백제 귀족으로서의 위엄을 줘 버리면 조선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권위를 세워 버릴 수 있소.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교역해서 힘을 키워서 왜경(교토)을 점령한 다음 백제를 계승했다 자처하며 자기 나라를 세워버릴 수도 있지 않겠소?"

"말씀대로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세우는 데에 모자라지 않은 명분인 것은 맞는군요."

"하지만 좀 전의 호족들은 백제 유민의 후손일 뿐 별다른 배경이 없소. 이들에게 옛 귀족에게서 이어지는 위엄이라도 주지 않으면 구주도 경영에 쓸 때 토착민들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래서 오우치가 아닌 저들에게 준 것이오."

"과연. 오우치 가문은 백제왕손이라는 것만으로는 위엄이 부족하니 조선에 의지해야 하고, 호족들은 가진 위엄이 조선에서 받은 옛 성씨뿐이니 조선에 의지해야 하는군요. 절묘한 균형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러 가는 동사부 남부 호족들은 어떤 꿈을 꾸셔서 모으신 것입니까?"

갑자기 치고 들어온 최윤덕의 뜬금없는 질문에 터지려던 웃음을 참은 양녕이 대답했다.

"꿈을 꿔서 모은 것은 아니오. 거기에 자리 잡은 호족 가문들을 확실하게 포섭하러 가는 것이오."

북부와 남부를 나눠서 만나는 이유는 두 지역이 언어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북부가 백제어의 영향이 남은 방언인 데 반해서, 남부는 인접한 사츠마와 오오스미 지역과 더 가까운 방언을 사용했다. 언어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부 호족들은 거의 다 시마즈 가문의 방계라 하셨지요. 북부야 고만고만한 호족들이 서로 크게 싸우지도 않고 살고 있었지만, 시마즈 가문 방계면 자기들끼리는 물론이고 이전 시마즈 종가인 녹아 심씨 가문과도 이리저리 얽혀 있으니 엄청 복잡하겠습니다."

"복잡해서 더 좋소. 더 쉽게 해결될 것이오."

"무슨 뜻이십니까?"

"매듭이 어중간하게 묶여 있으면 어떻게 풀까 고민하게 되지만, 아예 단단히 묶여 있다면 칼로 쳐서 끊어 버리면 그만 아니겠소?"

또다시 선문답 같은 말을 하며 양녕이 미소지었다.

* * *

한참 후.

동사부 남부 모 사찰.

"확실히 대접이 남다릅니다. 아까 본 북부 호족들은 정말 부농일 뿐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내 생각도 그렇소. 반대로 보면 다들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서 내 눈에 들려고 할 만큼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라는 말도 되겠소."

지친다는 표정을 한 최윤덕과 양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말대로 남부 호족들의 환대는 지극했다. 모두가 양녕에게 잘 보이려는 상황에서 누구 한 가문의 저택을 쓸 수는 없었는지 대사찰의 가장 큰 건물을 빌려 모임 장소를 만들었고, 저마다 저택에서 가져온 깔개며 휘장으로 사방을 치장한 탓에 심각하게 어수선했다.

"왕자님, 피곤하신 것 같으신데 차 한잔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맞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데려온 이가 차를 기가 막히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제가 아주 이름 높은 다인을 고용했으니 한잔 올리라 하겠습니다."

양녕의 지친 표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차마 절간에 술상을 차릴 수는 없었는지 차를 대접하겠다고는 하지만, 저마다 경쟁적으로 차를 올리려 하는 탓에 옆에서 다도구를 들고 앉아 있는 이들만 십여 명이었다.

"피곤하니 마시기는 하겠지만, 차를 이 사람들 숫자만큼 마시면 오늘 잠을 못 잘 걸세. 그러니 내가 차를 달라고 할 때마다 다인 모두가 힘을 합쳐 한 잔씩 만들어 올리게. 대신 자기 실력을 내세우려고 하다가 맛을 망치지는 않기를 바라네."

차를 다인 숫자만큼 다 마실 수도 없고, 몇 명의 것만 골라서 마시면 나머지 다인들이 문제가 되니 한 잔을 같이 만들게 하되 그 안에서 또 경쟁하지 않게 하는 지시였다.

"자, 그럼 얘기를 시작하겠네. 어차피 자네들도 시마즈 무사들이라 번잡한 것을 싫어할 테니 꾸미고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지."

다인들이 찻잔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양녕이 말을 시작했다.

"시마즈 종가가 조선에 귀화해 녹아 심씨가 된 이후로 모든 시마즈 방계가 고민이 많겠지만, 자네들은 특히 고민이 더 많을 걸세. 영지가 녹아부에 속하게 된 시마즈 방계들이야 생각할 것도 없이 본가인 녹아 심씨 가문에 붙으면 되네. 어차피 본가가 방계를 심씨로 받아들여 줄 생각은 없겠지만, 자기네들 영지를 포함한 녹아부 전체를 다스리게 된 본가에 엎드리는 것 아니면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야. 아, 고맙네."

어느새 다인 하나가 차가 담긴 찻사발을 가져와 탁자에 올리자 양녕은 말을 멈추고 찻사발을 들어 올렸다. 몇 모금에 나눠 차를 다 마시고는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빈 찻사발을 다인에게 돌려주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자네들처럼 녹아부 밖에 영지를 가진 시마즈 방계들은 생각할 것이 많아서 오히려 난처하겠지. 심씨가 되려 하기에는 종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영지가 밖에 있다고 조선에 붙으려 해도 역시 종가에서 반발할 테니 말이야."

양녕의 말에 호족들 가운데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녹아부 안에 있는 방계도 받아 주지 않는 종가가 녹아부 밖의 저희들을 받아 줄 리가 없지요. 조선의 주상께 성을 새로 하사받는다 해도 종가에서는 영지를 맞댄 저희가 자기네와 같은 급이 되어서 경쟁하려 든다고 생각해 견제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자네들에게 알려줄 게 있네. 조금 전 북부 지역 호족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거기서 있던 몇몇 일 덕분에 오늘부터 휴우가는 동사부가 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의 영토가 되었고, 동사부의 모든 백성은 조선인으로 대우받게 되었네."

"그렇다면……."

"자네들은 아니야."

기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호족의 말을 양녕이 끊었다.

"그들이 백제 유민의 혈통이고, 백제 왕의 제사를 지내왔고, 쓰는 말에도 백제 말이 남아있어 특별히 대우한 것일세. 동사부의 중심지인 동사목도 그쪽에 설치될 것이야. 하지만 제사나 쓰는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마즈 가문의 방계임이 만천하에 알려진 자네들이 백제 유민의 혈통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나?"

"그 촌놈들 고약한 사투리가 백제말이었을 줄이야……. 그러면 저희는 동사부 백성인데도 조선인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모계로라도 그들과 피가 섞였다면 인정해 줄 수도 있지만, 자네들 대다수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시마즈 종가와 방계 울타리 안에서만 혼인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유력한 가문들과 인척을 맺었을 것이고."

양녕의 지적에 호족들이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저희는 이미 글렀다는 통보를 하시러 이리 먼 길을 오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맞아. 자네들에게 상황을 해결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 주러 왔네."

다인들에게 다음 차를 달라 손짓한 양녕이 호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뛰어들게. 정말로 죽으면 더 좋네. 그리하면 살 수 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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