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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62화 (6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62화

62화

1419년 12월 하순 모일.

휴우가노쿠니. 히키 지역 모처.

거대한 천막 안에서 양녕과 장수들, 문관들을 포함한 일행은 호족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겨울날 난데없이 석성목에서 섬 반대쪽 휴우가(일향) 지역까지 오게 된 발단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녕이 대뜸 조만간 일향 지역으로 갈 것이니 호족들을 일정에 맞춰 소집하라 지시하고, 문관 몇 사람도 따라오라 지목한 것이었다.

그때 이유를 딱히 말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시마즈 가문의 기존 세 슈고직 중 살마와 대우 두 지역만 심구풍의 봉토가 되면서 남겨진 일향 지역 호족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일향 지역을 확보해야 풍후의 오토모 가문을 남쪽에서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같은 일향 지역인데 북부 호족 따로, 남부 호족 따로 모아서 만나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옆에 서 있던 최윤덕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일향은 원래부터 남북으로 긴 땅인 데다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산지를 빼고 보면 그것보다도 더 남북으로 긴 땅이오. 그래서 남북 간에 차이가 많소. 북부는 고만고만한 토착 호족들이 다수고, 남부는 지금은 서쪽으로 거점을 옮긴 시마즈 가문의 발상지인 탓에 시마즈 방계 가문들이 다수를 차지하오."

"그래서 따로 만나시는 것이군요. 남북이 정치적 상황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그렇소. 대신 나눠서 만나느라 시간은 두 배로 걸리지만, 어차피 일은 다 승상에게 맡겨 두고 왔으니 자리를 길게 비워도 크게 걱정할 것도 없소."

"요 며칠 승상이 더 퀭해 보이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양녕과 최윤덕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북부 호족 가문 대표들이 하나둘 들어와 양녕에게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들어올 사람이 전부 들어와 앉고 천막 입구가 닫히자 양녕이 호족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가문 대표들은 전체적으로 무사라기보다는 부농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구주도를 석권해 가는 양녕의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너희도 이미 알겠지만 나는 조선의 왕자이고 축자의 후작이자 정동군 도원수인 양녕대군이다. 너희를 조선의 백성으로 포섭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며칠 전 내가 꿈을 꾼 것이 있어서 너희를 이리 갑자기 모으게 되었다."

호족 가문 대표들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장수들과 문관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며칠 전 꿈에 잘 차려입은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잠시 멈춘 양녕이 그 노인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삼한에 뿌리를 둔 나라의 왕손인데, 나라가 망하고 이곳에 와 다시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번이나 망한 나라의 왕임에도 내 백성들이 나와 아들들을 잊지 않고 아직도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이제 삼한 땅의 왕자가 구주도에 와 그 세를 넓히기에 이리 꿈에 찾아왔다. 부디 그대가 이 섬의 새 주인이 되더라도 해를 맞이하는 곳의 내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기 바란다."

양녕은 다시 잠시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사라졌다. 잠에서 깨서 잘 생각해보니 해를 맞이하는 곳이라면 해를 향한다 하여 일향이라 쓰고 휴우가라 읽는 이 지역일 것 같아서 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고자 각 분야에 능통한 문관들도 데리고 직접 온 것이다. 혹시 너희 중에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자가 있느냐?"

양녕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눈을 놀란 듯 크게 뜨고 있던 호족들이 잠시 서로 눈치만 보다가, 그중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나, 제가 대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지역에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좋다, 말해 보아라."

"백제국 마지막 대왕의 고손자인 정가왕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정가왕은 백제가 망할 때 유민들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 와 야마토의 땅에 갔으나, 거기서도 박해받아 다시 유민들을 이끌고 여기 휴우가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터를 잡고 백제를 다시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대왕이라면 의자왕을 말하는 것이겠군. 좋다. 계속하거라."

"정가왕은 여기서 좀 먼 산속에 둘째 아드님인 화지왕과 자리를 잡았고, 첫째 아드님인 복지왕은 여기 히키 지역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양녕이 끄덕이자 호족은 설명을 계속했다.

"정가왕과 두 아드님은 백제 유민들과 함께 이곳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또 여러 기술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며 선정을 펴셨으나, 탈출한 백제의 왕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라에서 보낸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호족의 설명을 옆에서 듣던 다른 호족 중 누군가가 이어질 이야기에 미리 탄식하듯 한숨을 쉬었다.

"신라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복지왕께서는 아버지와 동생을 구하고자 다급히 군사를 이끌고 가 적들을 물리쳤으나, 화지왕은 전사하셨고 정가왕도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두 분을 장사지내고 이곳 히키로 돌아온 복지왕께서는 슬픔 속에서도 백성들을 잘 다스렸습니다. 후사 없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백성들은 그 덕을 기려 히키에 사당을 세우고 복지왕을 모셨고, 화지왕과 정가왕도 각각 묘소 근처에 사당을 지어 모셨습니다."

호족이 눈에 띄게 침울해진 표정으로 설명을 마치자 양녕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네가 지금 말한 이야기와 내가 꿈에서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구나. 아들들 얘기를 한 것을 보면 꿈에 나온 그 노인이 바로 정가왕이겠지. 참으로 신묘한 일이다."

"저도 왕자님께서 말씀하시는 꿈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놀랄 만하지. 그런데 너희가 쓰는 왜어가 조금 특이한 것 같구나?"

"예. 여기 근처 말이 사투리가 심해서, 다른 지역에 가서 말하면 잘 통하지 않곤 합니다. 저희는 다른 지역 호족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 그나마 괜찮은 편인데도 이렇습니다."

잠시 뭔가가 떠오른 듯 턱을 쓰다듬은 양녕이 말했다.

"내가 짚이는 것이 있다. 마침 같이 온 문관 중에 언어에 능통한 자가 있으니, 그자가 듣도록 너희 중 두 사람이 서로 아무 얘기나 여기 말로 대화를 해 보거라. 자네는 나와서 들어보고 어떤지 알려 주게."

양녕이 지목한 문관은 호족 둘이 나누는 대화를 한참 듣더니 신기하다는 듯 양녕에게 말했다.

"이들이 하는 말 중에 우리 말을 닮은 것이 많습니다."

"내 예상이 맞았구나. 너희도 들었느냐? 너희의 말이 조선말을 많이 닮았다 한다. 아무래도 백제의 말이 남아 너희에게 이어져 온 것 같다. 그러니 다른 지역 왜인들이 잘 못 알아들었겠지."

"그저 사투리가 심한가 보다 생각만 했지, 이것이 백제의 말인 줄은 몰랐습니다."

호족 대표가 감격한 듯 말하고, 다른 이들도 서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호족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었다.

"왕자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어찌 되었는지를 묻는 그 말에 호족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물어본 이는 물론이고 그 질문을 들은 다른 이들의 표정이 약하게나마 적대감을 띤 것을 읽어 낸 양녕이 대답했다.

"망해 없어졌다. 망한 지 거의 500여 년이 되었지."

물어본 호족이 그 말에 멍해진 것을 보고 덧붙여 말하기 시작했다.

"신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방에서 반란이 터졌다. 호족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하며 사방에서 들고 일어났지. 그중에서 백제를 이었다 하는 나라의 왕이 신라 궁궐을 털고, 신라 왕을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겁탈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 백제를 이은 나라는 어찌 되었습니까?"

양녕은 묘한 기대감이 섞인 그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또한 망했다. 아들에게 배신당하고 고구려를 이은 나라에 귀순한 왕이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켰지. 결국에는 신라도 고구려를 이은 그 나라에 항복하고 나라를 바치며 멸망했다. 세월이 흘러 고구려를 이은 나라도 끝내 멸망하고 나의 할아버지께서 삼한을 모두 계승하여 조선을 세우셨다. 실로 덧없는 일이지."

이야기를 들은 호족들은 다들 허망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해소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서라벌을 식읍으로 받고 고려의 귀족이 된 얘기는 굳이 하지 않길 잘했다 생각하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여기 히키가 복지왕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이곳에서 맞이한 것도 그런 이유였느냐?"

"예. 삼한 땅의 왕자께서 오신다 하여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복지왕의 사당이 근처겠구나. 한번 가 보아야겠다."

양녕이 말을 마치자마자 호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호족들이 서로 자기가 모시겠다며 아웅다웅하는 잠시간의 소란 끝에 사당에 도착한 양녕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사당이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나 너희가 정성껏 모시는 것은 느낄 수 있구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리 나와서 둘러보니 복지왕이 왜 이곳에 도읍을 정했는지 알겠구나."

양녕의 말에 호족들의 궁금증 가득한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엇입니까?"

"굽이쳐 흐르는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뒤와 옆은 산이라 방어하기 좋고, 앞에는 평야가 있어 뻗어가기 좋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성이 이런 지세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복지왕께선 고향이 그리웠던 모양이구나."

그 말에 몇몇 호족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 사당에서는 어떤 제사를 지내느냐?"

"12월이 되면 복지왕의 위패 대신으로 사당에 모셨던 유품들을 가마에 싣고 열흘에 거쳐 화지왕의 사당을 거쳐 정가왕 사당에 들렀다 돌아옵니다. 그것을 제사 대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는데, 왕자님께 못 보여 드려 아쉽습니다."

"생전에 세 사람이 함께하지 못한 한을 혼령이 되어서라도 풀어 주고자 하는 것이로구나. 그 마음이 매우 갸륵하다."

끄덕거리며 대답한 양녕은 진지한 표정으로 호족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정가왕을 따라온 백제 유민들의 후손일 수도, 가르침을 받은 토착 왜인의 후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가왕과 복지왕이 너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다스렸고, 너희도 대를 이어 그들을 옛 임금으로 모셨으니 무엇을 따지겠느냐? 너희 모두가 틀림없는 정가왕의 백성이었고 백제의 후손이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너희가 조선에게 왜인으로 취급받고 고초를 겪을까 걱정한 정가왕이 내 꿈에 나타나 알린 것이겠지."

호족들의 절반 이상이 양녕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정가왕의 그 뜻을 따르고자 한다. 혹시 이 근처에 적당한 터가 있느냐? 이 근방은 사당을 모신 조용한 곳이기도 하고 또 터가 그리 넓지는 않구나."

양녕의 질문에 호족 대표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강 하나를 건넌 곳에 옛날 관청이 있었다 전해지는 땅이 있습니다. 이곳 히키와 지세가 비슷하나 강이 곧고 평지가 더 넓습니다."

"거기가 좋겠다. 여기와 지세가 비슷하다면 사비성과도 비슷하겠지. 거기에서 이곳 히키를 거쳐 정가왕의 묘에 이르는 지역을 묶어 동쪽의 사비라 하여 동사목이라 할 것이다. 휴우가 지역 전체는 동사부라 하여 동사목의 관할에 두고, 동사목에 지방관을 보내어 이 땅을 다스리게 하겠다."

"땅은 다르지만 잠드신 고을이 사비의 이름을 얻었으니, 정가왕과 아드님들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동사부의 모든 백성은 조선인이다."

이어진 뜻밖의 말에 호족들이 허겁지겁 눈물을 닦고 놀란 눈으로 양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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