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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60화 (6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60화

60화

1419년 12월 중순 모일.

스오노쿠니. 오우치 저택.

스오 동북부의 요시키 지역은 오우치 모리하루의 부친인 히로요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동쪽으로 강이 흐르는 지형이 수도인 미야코(교토)를 닮았다 하여 가문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었다.

격자형으로 잘 정비되어있는 거리와 그 거리 북쪽에 오우치 가문의 저택이 있는 것 역시 히로요가 미야코의 시가지와 궁성의 입지를 본떠서 계획한 것이었다.

그렇게 미야코를 기준 삼아 지어진 만큼 오우치 저택 역시 궁성만큼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다.

"오우치 저택에는 처음 와 보는데 과연 소문으로 듣던 대로 대단하구려."

오우치 가문에 사절로 보내진 오토모 치카아키의 장남, 오토모 타카치카는 바닥에 앉아 집무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규모와 들어오면서 본 정원이며 건물의 웅자에 실제로 감탄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감탄해서 둘러보는 것을 빙자해서 내부를 정탐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칭찬 고맙소. 주군께서는 언제나 그러시듯 미야코에 계시오. 외교에 관한 것은 나에게 일임하고 가셨으니 나에게 말하면 되오."

가독이 앉는 상석인 단 아래에 방석을 깔고 앉은 무사가 타카치카의 칭찬을 짧게 끊고 말했다. 슈고인 모리하루의 외교 대리인이라는 중책을 맡은 고위 무사라고는 하지만, 같은 슈고인 오토모 치카아키의 사절이기 이전에 그의 장자이자 계승자인 타카치카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과하게 뻣뻣했다.

"얼마 전에 치쿠젠에 이어서 부젠까지도 결국 거의 다 조선군에게 넘어갔다고 들었소."

"놀리러 오신 게요?"

영토를 잃은 얘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날 선 반응을 보이는 무사에게 타카치카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오우치의 무사들 또한 용맹한 이들인데, 너무 빨리 영토를 잃고 밀려난 것에 혹시 다른 큰 문제라도 있나 해서 걱정되어 안부를 묻고자 온 것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도울 수도 있지 않겠소?"

도와주겠다는 말 뒤에는 조선에게 쉽게 땅을 넘긴 이유를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을 읽은 무사가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빨리 밀려난 이유가 뭐 달리 있겠소? 치쿠젠과 부젠의 호족들은 이미 세력도 기운 지 오래고, 당연히 그 무사들도 오합지졸이오. 오우치 가문에서 가서 대신 싸울 수도 없소. 협상 담당인 오우치 가문이 조선군하고 싸우다가 협상이고 뭐고 다 틀어질 일 있소?"

그 말을 들은 타카치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의 무사는 오토모 가문에 와서 키쿠치 가문과 이간질하는 내용을 전달한 바로 그 무사였다. 그런 자가 당당하게 조선이 큐슈 북부를 차지한 것은 자신들 책임이 아니고 싸울 이유도 없다고 하니 열이 치밀었지만, 사절로 와서 주먹다짐을 할 수도 없어 꾹 참고 말했다.

"그래도 직접 가서 싸우지는 않더라도 거기 호족들을 다른 방향으로 도와줄 수는 있지 않겠소?"

"안 되오. 못 하오."

말하기 무섭게 돌아온, 뻔뻔함마저 느껴지는 대답에 타카치카가 뭐라 하려는데 무사가 바로 이어서 말했다.

"이미 도왔었고, 돕다가 조선군에게 들켰소. 조선의 왕자가 말하기를, 오우치 가문이 직접 조선군과 싸운 것은 아니니 이번만은 문제 삼지 않겠지만, 만일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조선군과 싸우자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였소. 그러면 더 이상 협상이고 뭐고 없이 전부 쓸어버리면서 미야코까지 밀고 가겠다고도 했고."

"아, 그런 뜻이었구려. 그래도 미야코까지 진격하겠다는 말은 과장일 것이오. 몇 달이 지나도록 큐슈를 다 점령하지 못한 조선군인데, 그 전력으로 큐슈보다 더 큰 혼슈 땅을 점령해 가며 미야코까지 가려다가는 도중에 힘이 다 빠지지 않겠소?"

"미야코까지 밀리지만 않으면 큐슈 코앞인 오우치 가문 거점 영지는 조선군에게 공격당해도 괜찮다는 말이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었소. 그저……."

타카치카를 당황하게 만든 무사는 기회를 잡았다 생각했는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쏟아내듯 말했다.

"조선군 무기가 얼마나 강한지 익히 들어 알지 않소? 무기만 강한 것이 아니고 큐슈에 온 병력이 2만에 달한다는 말도 있소. 2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 전투에 최소 몇천씩 병력을 보낸다는 것은 공께서도 들어서 아실 텐데 그걸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어떻게 막소? 애초에 우리가 바다까지 건너가 돕는다고 막아질 게 아니오."

"그건 그렇소. 그나저나 조선군이 협상 담당인 오우치 가문 영지를 왜 공격한 것이오? 치쿠젠이야 그렇다 쳐도 부젠은 명백하게 토노께서 슈고직을 가지고 계신 땅이지 않소?"

"협상 담당은 오우치 가문 가독이지 부젠 슈고가 아니고, 애초에 큐슈는 협상에 상관없이 조선이 다 점령할 계획이니 미리 얻어 둔다고 달라질 것 없다 하더이다. 뭐 조선이 우리라고 봐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오. 덕분에 우리는 평야지대를 다 잃어서 당장 내년 이후 군량 조달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소."

꾸밀 생각도 없이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무사를 보는 타카치카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대로 더 끌면 수확도 없이 열불만 날 것 같아 대충 맞장구치고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알겠소. 군량 구하는 게 참 일이겠구려. 그나저나 조선군이 까마귀 떼를 몰고 다닌다는데 정말 그렇소?"

대충 던진 주제였지만 무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제법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오. 조선군이 있는 곳에는 항상 까마귀가 따라다니오. 먼저 와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기다리기도 해서, 큐슈 북부에서는 까마귀 떼만 봐도 조선군이 오는 걸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소."

"우리는 아직 싸우기는커녕 만나 본 적도 없어 몰랐지만 그런 게 있었구려. 조선군이 오는 걸 알 수 있다면 대응에 도움이 되겠소."

"이유를 알면 까마귀들이 먼저 와 날아다니는 게 기분 좋지는 않을게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무사가 말하자 이상함을 느낀 타카치카가 물었다.

"이유가 어떻길래 그렇소?"

"시체 재료가 여기 있으니 빨리 와서 자기들 밥으로 만들어 달라고 조선군을 안내하는 것이오."

"크흠, 알리는 족족 사기가 떨어질 얘기로군. 부대 대장급 되는 이들에게만 알려주고 다른 무사들에게는 알리지 않아야겠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한 타카치카가 다시 주제를 돌리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토노는 원래부터 미야코에 계셨으니 그렇다 치고, 토노의 조카분께서는 어디 가셨소?"

타카치카가 말한 조카는 모리하루의 조카, 즉 모리하루의 죽은 형인 전전대 가독 요시히로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치요 도련님 말이오? 미야코에 가셨소. 주군께서는 미야코에 계속 계시느라 바쁘셔서 여기와 미야코를 오가며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영지의 정무를 보는 것은 도련님께서 거의 도맡아서 하시오."

"오우치 가문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신 두 분께서 동시에 자리를 비우신단 말이오? 정무도 보셔야 한다면 미야코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되지 않소?"

"나도 모르오.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최대한 적은 사람이 아는 것이 좋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아니면 부친을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들을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피하시는 것일 수도 있겠소."

요시히로를 돕겠다고 해놓고는 막상 거병하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키쿠치와 오우치 등의 남조 세력을 빙 돌려 까는 그 말에, 타카치카는 어떻게든 내통과 이간질의 증거를 잡아 조정에 알려서 오우치 가문을 박살내 버리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이를 갈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보이는 당당한 태도나 도발하는 말은 이 자리에서 보고 들은 나에게는 큰 심증이 되지만, 형체가 남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 보낼 증거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선은 이들이 호족들을 돕다가 걸렸다는 부분이 가장 취약해 보이니 거기를 파고들어야 한다.'

"호족들을 돕다가 발각되어서 조선의 왕자가 경고했다는 것은 직접 만나서 한 것이었소?"

"아니오, 서면으로 보냈소. 그 경고 하나를 하려고 우리를 부를 리도 없고, 직접 올 리는 더더욱 없지 않소. 그나저나 그건 왜 물어보시오?"

"별거 아니오. 그저 아까 조선의 왕자가 말했다고 하시길래 정말로 말로 한 건가 궁금해서 그랬소."

"그랬소? 뭐 문서로 뜻을 내보인 것도 흔히들 말했다고 표현하니 나도 모르게 그리 말했나 보오."

그 대답을 들은 치카아키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음 방법을 생각했다.

'내가 어떤 부분을 파고들려 하는지 알아챈 눈치다. 조선 왕자의 경고를 서면으로 받았으면 조선군에게 걸렸다는 증거가 될 테지. 설사 저 무사가 눈치채고 둘러댄 것일 뿐 실제로는 그런 문서가 없었더라도 오우치가 조선과 내통한 상태라면 필요하니 만들어 달라 하면 그만이다. 경고를 받았다는 부분은 포기하고 대신 호족들을 도와 싸웠다는 부분을 파고들…….'

"그러고 보니 마침 오신 김에 보여드릴 게 있소."

"무엇입니까?"

생각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타카치카가 대답하자 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시오."

타카치카가 무사를 따라간 곳은 오우치 저택 한쪽 구석의 마당이었다. 거기에는 잘린 목과 무기며 갑옷들이 있었다. 잘린 목은 젊은 무사들이 오동나무 상자에 소금과 함께 담는 중이었고, 무기와 갑옷은 멀쩡한 것과 깨진 것이 섞여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일본 무사들이 쓰는 것은 아니었다.

"이게 다 무엇이오?"

"조선군과 싸워 얻은 전리품이오. 우리가 조선군에게 날로 치쿠젠과 부젠을 넘겨준 것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들킬 것이 걱정되는 와중에도 호족들이 조선군과 싸우는 것을 도와가며 어렵게 구했소.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증거로 조정에 보낼 것이오."

잘린 목들의 정체는 얼마 전 양녕이 박초에게 구해 오라 했던 마츠라 가문 해적들의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타카치카가 보기에도 생김새나 상투 튼 머리카락 길이에서 조선인 같지 않은 위화감이 들었다.

'조선과 내통한 것이 확실하다. 그자들이 잡은 포로들의 수급을 조선인처럼 꾸미고 무기와 갑옷도 같이 보내 주어 오우치가 조정의 의심을 피하게 도와준 것이겠지.'

하지만 수급은 하나같이 머리는 상투를 틀고, 귀에는 귀고리 구멍이 있어 약간의 위화감을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조선인의 머리였다.

더군다나 상자에 소금과 같이 담아 보내면 조정에 가는 동안 절여지고 변형되어 그나마 있던 위화감도 없어질 것이었다.

'당했다. 너무 늦었어. 여기가 이 정도라면 이미 조선군도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치쿠젠과 부젠의 호족들이 오우치에게 도움을 받았었다는 증거 역시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오우치 가문에서 치쿠젠과 부젠의 호족들이 싸우는 것을 돕다가 들켜서 조선군에게 경고를 받았다는 무사의 주장이 온전히 증거를 갖춘 것을 보고, 파고들려던 방향이 다 틀어막힌 타카치카가 이를 꽉 물었다.

"어쩌면 이게 조선군 머리가 아니라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 궁금하면 죽은 머리통을 되살려서 물어보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소?"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오는 무사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꽉 문 타카치카의 이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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