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9화
59화
머리를 산발한 미츠사다는 풀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등자사를 발견하더니 다시 크게 외쳤다.
"스케츠구!"
그리고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잔뜩 당황한 표정이 된 등자사가 허겁지겁 달려가 미츠사다를 부축했다.
"저자는 쇼니 미츠사다 아닙니까? 대군께 투항했다는 것까지는 들었지만 뭔가 좀 이상합니다. 왜 저럽니까?"
"스케츠구야. 아들아, 어디 갔었느냐? 너를 한참 찾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라."
풀린 눈으로 등자사를 꽉 껴안고는 연신 등자사의 머리를 쓰다듬는 미츠사다를 보던 양녕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광증에 걸렸소. 저렇게 수시로 아들을 찾으며 사방을 돌아다니오."
이윽고 등자사가 미츠사다를 부축한 채로 양녕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를 데리고 급히 관아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구풍이 혀를 차더니 말했다.
"허허 참. 젊은 사람인데 안됐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참 효자라 저리 돌보니 다행인가 싶습니다. 그러니 정신이 온전치 못해도 아들을 저리 찾는가 싶기도 하고요. 아,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군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다음에 볼 때는 느긋하게 차라도 한잔 마십시다."
양녕의 말에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한 심구풍이 관아 밖으로 나가자, 객사 쪽에서 최윤덕이 주변을 살피며 양녕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츠사다는 제때 나왔습니까?"
"그렇소. 덕분에 잘 풀렸소. 그나저나 저 아이가 정말로 놀라고 당황한 것처럼 표정이며 행동을 실감 나게 잘해서 나도 속을 뻔했소. 참 대단한 아이요."
최윤덕과 양녕이 안도하며 말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양녕과 최윤덕, 등자사 셋이 꾸민 것이었다.
등자사가 먼저 동헌에 가 손님이 왔다고 전해서 심구풍이 나오게 유도하고, 최윤덕은 미츠사다에게 아들이 동헌으로 갔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미츠사다가 등자사를 아들로 여기는 모습을 심구풍에게 보여서 등자사를 진짜 쇼니 스케츠구라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자기 아들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자마자 저렇게 미칠 줄은 몰랐습니다."
듣는 귀가 없는지 주변을 슬쩍 살핀 최윤덕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려 준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가짜를 내세워서 무엇을 하려는지, 자기가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증언했을 때 이미 자식들은 다 죽었고, 증언한 내용은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데 쓰일 것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미칠 만하지 않겠소."
"그렇지요. 다행입니다. 제대로 미쳐 줄지 어떨지 처치 곤란하던 차에, 마침 딱 맞는 방향으로 미쳐줬으니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작게나마 도움이 되어 갚은 셈 아니겠습니까."
"왜구 가문 쇼니의 마지막 가독이 받는 벌로는 가장 어울리오. 악업을 쌓은 집에는 재앙이 남는다는 말이 실로 옳았소."
본래 양녕의 계획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투항한 것이라 선전한 미츠사다를 언제까지고 가둬놓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풀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은 같은 극약을 섭취하게 해서 미치게 만든 다음 풀어 놓아서 미츠사다가 무슨 말을 하고 돌아다녀도 신빙성이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츠사다가 진실을 듣자마자 미쳐서는 등자사를 진짜 자기 아들로 여기며 애타게 찾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미츠사다를 더 돌아다니게 두실 계획이십니까?"
"미친 사람이 사방을 활보하고 다니게 둬서 좋을 게 뭐 있겠소. 충분히 여기저기에 등자사를 자기 아들로 여기는 걸 보여 주고 난 다음에 진사를 처방해서 좀 얌전하게 만들 것이오. 광증은 가라앉겠지만 진사도 결국 수은으로 만드는 것이니 제정신으로 돌아올 리는 없을 것이오."
"정신이 돌아온다고 한들 미쳐서 저러고 다니던 사람 말을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참, 심구풍에게 이 상황을 보여 주러 미츠사다를 데리고 온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전해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무엇이오?"
"수군여단장이 왔습니다. 조금 전에 부두에서 만나서 바로 관아로 오라 했으니, 곧 올 것입니다."
"오, 그런가. 오랜만에 그를 보게 되는군."
* * *
잠시 후.
동헌 탁자에 양녕과 최윤덕, 박초가 앉아있었다. 등자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셋을 탁자에 올려놓고 꾸벅 인사한 다음 동헌 밖으로 나가자 박초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일기도에서 멀미를 하다 하다 앓아누웠던 그 최만리라는 친구가 대군의 승상이 되었다는데 일은 잘합니까?"
"엄청 잘하오. 그래서 오늘도 여기저기 시찰 다니고 일하느라 안 보이는 것이오. 아마 내일하고 모레도 하루 종일 안 보일 것이오."
그 말에 박초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있는 재주 다 쓰게 일 시키시는 것은 두 분 전하와 똑 닮으셨습니다."
지난번 보았을 때는 조선에서 끌려온 노예가 암매장당한 사건을 겪은 직후라 표정이 굳어 있었던 박초가 오늘은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는 것을 보고 안심한 양녕도 농으로 응수했다.
"아들이고 형제인데 어디 가겠소? 일을 잔뜩 시키니 이렇게 차 마시면서 얘기할 시간도 나고 아주 좋소이다. 공께서는 어떻소?"
"저도 대마와 일기에 현령이 와서 일을 맡아 한 뒤로 훨씬 부담이 줄었습니다. 지금은 대군께서 명하신 비전 지역 해안 공격에 힘쓰는 중입니다."
"부담이 줄었다니 다행이오. 대마와 일기는 어떻소?"
"이번에 이주해 온 대마현 주민들은 막상 첫 겨울을 맞이해 보니 생각보다 안 추운데 일을 안 하는 게 아깝다면서 열심히 간척 중입니다."
"이 겨울에 간척을 한단 말인가?"
옆에서 듣던 최윤덕의 질문에 박초가 대답했다.
"예. 천모만을 면한 비탈 중에 너무 가팔라 농사짓지 못할 곳에는 전부 불을 놓아 태우고, 그렇게 생긴 재를 퍼다가 평지에 밭을 일군 곳에 거름 삼아 뿌렸답니다. 나머지 비탈은 무너뜨려 천모만에 붓고 있습니다. 그것도 요령이 생겼는지 그냥 붓는 게 아니더군요."
"산에서만 살던 화전민들이 벌써 간척하는 요령이 생겼다니 신기한 일이오. 어떤 요령이요?"
"맨 처음 비탈을 무너뜨려 천모만에 쏟아지게 만든 다음, 비탈에 남은 흙은 퍼다가 바다가 얕은 곳에 부어 펄을 만들고, 남은 돌들은 수심이 깊은 쪽에 던져넣습니다. 그렇게 비탈을 다 긁어다 바다에 집어넣고 나면 산에는 흙도 돌도 없고 그 속에 있던 큰 바위만 남습니다. 그 바위도 깰 만하다 싶으면 깨서 돌로 만들어 바다에 집어넣습니다. 정말이지 태행산과 왕옥산 산신이 왜 기겁해서 옥황상제에게 탄원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박초가 웃으며 말을 마치자 양녕이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마도의 돌과 바위가 부수거나 쪼개기 좋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오. 흙을 얕은 곳에, 돌을 깊은 곳에 넣게 궁리한 것도 아주 좋소. 그냥 무너뜨리면서 채우면 간척이 다 되었을 때 땅속에 흙이 있고 위에는 돌이 있겠지만, 돌로 먼저 바다를 채워나가면 아래가 돌이고 위가 흙이니 농사짓기에 더 좋을 것이오."
"그것만이 아닙니다. 천모만 안의 작은 만 중에서도 입구가 좁은 곳을 찾아서는 그 좌우를 무너뜨려 바다를 틀어막습니다. 그렇게 생긴 호수의 물을 밖으로 퍼다 버리면서 간척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기껏 간척한 흙이 썰물 때 쓸려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겠구려."
"그렇습니다. 이것 말고도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로 참신한 것이 많습니다. 이미 좁은 만 몇 곳은 간척이 다 되어 만이 없어지고 뻘밭이나마 물 위로 땅이 생겼습니다. 거기 흙을 더 쌓고 봄부터 농사를 지으면 인구가 더 늘어날 테니, 간척하는 속도도 갈수록 더 빨라지지 싶습니다."
"정말 대단하오. 대마도에 막 왔을 때만 해도 산하고 바다를 거칠게 다루면 동티가 날까 봐 무섭다던 이들이 그리도 거침없이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운다니. 그들이 괴력난신에 휘둘리지 않게 된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 싶소."
양녕의 말에 재밌는 것이 떠올랐는지 박초가 싱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요즘 산비탈에 불을 놓을 때 백성들이 지내는 의식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우선 마을 대표가 나와서 이런 축문을 읽습니다."
양녕의 질문에 대답하던 박초가 헛기침을 몇 번 해 목을 풀고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산을 헐고 바다 메워 문전옥토 일구어서, 자자손손 농사지어 천년만년 풍년 되어, 나라에는 세금 내고 곳간마다 가득 채워, 삼한 백성 먹고사는 고향 땅을 삼으려니, 산신과 해신은 이 술 받고 다른 집을 찾아보라. 이런 것입니다."
"어조가 산신과 해신에게 하는 것 치고는 강경하구려. 그 뒤에는 무엇을 하오?"
"막걸리 한 사발은 불 놓을 산에, 다음 한 사발은 흙이 쏟아질 바다에 뿌린 다음 이렇게 외치면서 산에다 불을 놓습니다."
잔뜩 귀를 기울이고 듣는 양녕과 최윤덕의 시선을 받으며 박초가 말했다.
"이것은 대군 마님 엄명이시다!"
"으하하하하!"
박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윤덕이 뒤로 넘어갈 듯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했다. 눈 끝에 눈물까지 고일 정도로 웃으며 최윤덕이 말했다.
"대마현 백성들이 산과 바다를 거칠게 다뤄 동티가 날까 봐 걱정할 이유가 없을 만합니다. 대군께서 산신과 해신보다 더 영험하신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습니까! 으하하!"
당사자인 양녕도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웃겼는지 폭소를 터뜨렸다.
"백성들이 괴력난신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력난신을 이겨 버렸구려! 얼마나 완승했으면 떡 하나도 놓지 않고 술 한 사발씩만 먹여서 산신과 해신을 내쫓는단 말이오! 하하하!"
그렇게 셋이서 한참을 웃다가 겨우 가라앉고 나서 차분해진 양녕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대마현 백성들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오. 그럼 일기현은 어떻소?"
"왜인들은 전부 조선으로 압송이 끝났습니다. 이제 섬은 텅 비어 군인과 문관들만 있습니다. 기념비도 다 쪼개고, 주춧돌도 다 뽑고, 성곽을 헐었는데도 그걸로는 석재가 조금 모자라서 돌을 더 구해다 지은 요새도 며칠 전 완공되었습니다. 민가도 다 헐어서 요새 안에 막사를 짓는 데에 썼으니, 이제 일본 땅이었던 흔적은 일기도 안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소. 봄이 되면 일기도에 이주할 백성을 보내 달라 요청하겠소. 호랑이도 없고 겨울도 따뜻한 섬에 자기 소유 땅을 준다고 하면 오고자 할 이들도 많을 것이고, 변방의 방비에 관한 것이니 조정에서도 도와줄 것이오."
"그러면 일기현 현령도 주민 없는 고을의 현령 신세를 벗어나겠군요."
"그러게 말이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내가 요청한 것들은 어떻게 되었소?"
"물론 구해왔습니다. 밖에 두었으니 나가서 보시지요."
양녕과 최윤덕이 박초를 따라 동헌 밖으로 나가자, 마당에는 포박당한 왜인 사내 수십 명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비전 지역 해안을 쓸면서 잡아 온 마츠라 가문 해적 놈들입니다."
"많기도 하오. 이놈들을 다 생포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소."
"아닙니다. 대군께서 만들라 하신 판옥선 덕분에 어렵지도 않았고 다친 병사도 없습니다. 놈들이 배를 타고 나와 저항하려 해도 판옥선이 한참 더 높으니 배를 넘어와서 칼질하지도 못하고, 판옥선으로 들이받기만 해도 놈들 배가 박살 나니 물 위에서 허우적대는 놈들만 건지면 그만이었습니다."
"판옥선이 제법 효용이 있다니 다행이고, 다친 병사가 없다니 더더욱 다행이오. 공께서 수고가 많으셨소."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건진 놈들 중에서 대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몸에 문신이 없고 털이 적은 놈들만 모아왔습니다. 나머지는 원래 하던 대로 참수해서 조정에 수급을 보냈습니다."
양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고는 최윤덕에게 말했다.
"잘했소. 중군사단장께서는 이놈들 귓불에는 구멍을 뚫고 머리는 상투를 틀어 놓으시오. 며칠은 있어야 뚫은 것도 아물고 머리카락도 상투 모양으로 자리를 잡을 테니, 오늘 바로 입 무거운 군관과 군교들을 시켜 그렇게 해 두시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미 망건으로 쓸 천 조각들과 송곳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지시하는 양녕과 대답하는 최윤덕을 보고 박초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에 쓰시려고 이 포로들을 준비하라 하신 겁니까?"
그 질문에 양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물이오. 아니면 동맹에게 보내는 군수품이라고 해도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