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8화
58화
1419년 12월 중순 모일.
석성목 관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대군."
동헌에 들어온 시마즈 히사토요가 양녕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느라 수고 많으셨소. 자, 이쪽으로 앉으시오. 추울까 봐 의자 발치에 화로를 두었으니 데이지 않게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히사토요와 탁자에 마주 앉은 양녕이 입을 열었다.
"우토와 사가라 가문을 평정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소. 정동군이 가서 뒤처리를 하는 중이니 그게 다 끝나면 지방관을 보내 다스릴 것이오. 생각보다 일찍 해결될 것 같소. 이게 다 공께서 힘써 주신 덕분이오."
"과찬이십니다. 우토 가문을 공격하다가 키쿠치 가문 가독인 모치타케를 놓치고야 말았는데도 칭찬해 주시니 송구스럽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어린아이 하나만 작정하고 피신시키는데 잡기도 어려울 것이고, 기반을 다 잃고 몸만 달아났으니 다시 가문을 일으키거나 위협이 되지도 못할 것이오. 그 정도면 충분하오."
"감사합니다."
"그럼 공을 부른 본래 목적인 이것을 드릴 차례요."
양녕이 탁자 위에 문서함과 도장함을 올려놓자 히사토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히사토요가 양녕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존댓말을 쓰는 이유인 책봉 문서였다.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예법이 있습니까?"
"주상 전하의 왕지이니 주상 전하께 직접 받는 예를 갖추면 되오. 내가 이 서류를 들어 올리면 거기에 절을 네 번 하고 앉아서 받으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히사토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할 자세를 잡았다. 양녕이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높이 들자 히사토요가 절을 네 번 하고는 바닥에 앉아서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양녕이 읽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구주도가 풍속이 교화되지 않고 문물이 전해지지 않아 싸움과 해적질을 일삼는 무리가 많으나, 이것이 어찌 그 천성이 악한 탓이겠는가? 시마즈 가문의 가독이 종법을 어지럽힌 매제와 거기 편승해 난을 일으킨 방계를 벌하여 통치의 기강을 잡았으니 이는 곧 수신제가의 이치다. 또 억울하게 붙잡혀간 조선과 명나라의 백성들을 용감히 구출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니, 이는 그 스스로의 천성이 인의를 갖춘 것이다."
정확한 의미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을 칭찬하는 말임은 알아들은 히사토요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으며 경청했다.
"또한 조선의 신하가 되어 삼한의 풍속을 따르고 나라의 간성이 되고자 하니,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성과 땅을 내린다. 시마즈라는 이전 성씨는 섬과 나루라는 뜻이니 그 의미와 소리를 살려 깊을 심 자를 성으로 내린다. 또한 살마(사츠마)와 대우(오오스미)의 두 고을을 봉토로 내린다. 가문의 거점인 녹아도군(카고시마군)을 녹아목으로 하여 도읍으로 삼고, 살마와 대우라는 이름과 지역을 폐지하고 둘을 합쳐 녹아부로 삼을 것이다. 이에 심구풍(시마즈 히사토요)을 녹아백으로 봉하니, 그 백성들을 잘 다스리며 세세토록 충성을 다하라."
양녕이 다 읽은 왕지를 옆에 내려놓고 도장함에서 구리 도장을 꺼내자 심구풍이 일어나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도장 인면에 '녹아부백지인'이라 새겨진 것을 감격한 표정으로 쓰다듬으며 심구풍이 말했다.
"이제 시마즈라는 씨가 아니라 심이라는 어엿한 성이 생기고, 녹아라는 본관이 생기고, 힘으로 얻은 슈고직이 아니라 정당하게 다스리는 봉토가 생겼습니다. 정말이지 감계가 무량합니다."
"축하하오. 사실 제후로 삼을 것을 주상께 건의하면서 살마국이나 웅습국처럼 나라에 해당하는 이름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왕자인 내 봉토가 축자국인데 왕족 아닌 이를 같은 급으로 책봉할 수 없다 하여 부로 격이 내려갔소. 아쉽게 되었소."
"아닙니다. 제가 어찌 대군과 같은 대접을 받고자 하겠습니까. 녹아부의 백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녹아 심씨의 시조이자 녹아부의 백작이 된 것에 진심으로 만족한 듯한 심구풍의 표정을 보던 양녕이 다른 상자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기뻐하는 공을 보니 나도 기쁘오. 이것은 주상께서 내리신 하사품이오."
"이것은…… 옷입니까?"
상자를 열어본 심구풍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공에게 내리는 예복과 평상복이오. 관아 밖에 수레가 있을 텐데, 거기 실린 포목과 기물들도 모두 하사품이오. 조선옷을 만드는 옷본도 종류별로 같이 있으니, 옷을 지어 공의 가족들도 입으시고 백성들에게도 가르쳐서 녹아부를 조선의 의복 풍습으로 교화해 가면 될 것이오."
"주상 전하께 어찌 더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 옷을 지금 입어 봐도 되겠습니까?"
설레는 표정의 심구풍을 보고 양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공께서 바로 입고 가시라고 내가 따로 여기 빼놓았던 것이오. 자, 말을 타고 가야 하니 평상복으로 입으시오. 내 도와주겠소."
양녕의 도움을 받아 철릭을 입고 갓을 쓴 심구풍이 흡족한 표정으로 소매도 쓰다듬어보고 갓도 만져보더니 양녕에게 말했다.
"정말로 날아갈 듯 기쁩니다. 제가 뭐 도울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단걸음에 달려와 돕겠습니다."
"괜찮소. 지금 우토와 사가라 두 가문을 치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아마 옛 시마즈 가문 내부와 호족들 사이에서 공이 귀순하고 성과 본관, 봉토를 하사받은 것에 대해 불만이 슬슬 나올 것이오. 나를 돕는 것은 괜찮으니 그것들을 잘 수습하기 바라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주는 것이오."
양녕이 내민 것은 책이었다.
"사탕수수를 키우고 즙을 짜내어 설탕을 만드는 법을 정리해 보았소."
"일본 땅에서 사탕수수를 키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탕수수는 먼 남쪽에서나 자라는 것 아닙니까?"
의아한 표정의 심구풍에게 양녕이 대답했다.
"이제껏 키워 본 이가 없으니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나, 공의 영지인 녹아부는 충분히 따뜻한 곳이니 키울 수 있을 것이오."
"대군께서 그렇다 하시면 맞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인 이유로 사탕수수와 설탕입니까?"
"공의 영지 일대는 화산 토양이라 비옥하긴 하지만 물이 잘 빠져서 곡식을 키우기에는 부적합하오. 아마 휴우가 지역을 얻으려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고."
"맞습니다. 농사가 잘되지 않으니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잡고, 사냥도 하고 교역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요."
"사탕수수는 물이 쉽게 빠지는 땅에서도 잘 자라오. 사탕수수 농사를 지어 설탕을 만들면 귀한 것이니만큼 비싼 값에도 잘 팔릴 것이니, 그 이익으로 식량을 사면 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농사를 지어 평화롭게 지낼 수 있고 굶는 백성도 없을 것이오."
멍하니 듣고 있는 심구풍에게 계속해서 설명했다.
"물론 조선은 사탕수수가 자라는 땅이 아니라 묘목은 구하지 못했고, 내가 직접 키워 본 것도 아니라 기르는 법이 조금 틀릴 수도 있소. 묘목은 공이 알아서 구해야 하고, 책의 틀린 부분도 실제로 재배하면서 고쳐 나가야 할 것이오."
"공께서 저와 백성들이 먹고살 방도를 이리도 신경써 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데 어찌 묘목을 구하는 것에 토를 달겠습니까? 사탕수수 농사에 반드시 성공해서 처음 만들어진 설탕을 대군께 감사의 의미로 모두 바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휴우가 지역을 포기하고서도 먹고 살길을 열어 주었다 생각한 심구풍은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었지만, 사실 양녕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무사들이 지주가 되면 싸우는 법을 잊게 된다. 먼바다에 나가 교역할 일이 없어지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없어진다. 그 상태로 녹아부의 주 산업이자 생업이 설탕 생산이 되고, 그걸 주로 사 가는 것이 조선이 된다면 이들은 완전히 조선에 목줄을 잡히고 벗어날 수 없어진다.'
"이렇게 은인이신 대군을 만난 것도 불보살의 가호라 생각합니다. 혹시 나이대가 맞는 자녀분이 있으시면 더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만……."
"아니 되오."
"역시 그렇지요……."
넌지시 꺼낸 혼담을 양녕이 바로 끊자 심구풍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양녕이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만류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세자였다가 폐출된 것을 알고 있소?"
갑자기 나온 민감한 소재에 심구풍이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주상 전하께 자리를 양보하시고자 그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리 좋게 말해 주니 고맙구려. 하지만 폐세자는 폐세자요.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건 간에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지. 내가 이리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아바마마께서 아들이라면 지극히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라 그럴 뿐이오. 하지만 외척이라면 얘기가 다르오."
이방원이 이도가 즉위하자마자 외척을 견제하고자 이도의 장인인 심온을 숙청해 버린 것을 떠올리며 얘기를 이어 갔다.
"무예로 이름난 변방의 제후가 폐세자의 외척까지 된다면, 아바마마와 주상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경계 받고 견제당할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래서 공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와 인척이 되지 말라 하는 것이오."
양녕이 덤덤하게 말하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냉혹한 이야기에 잔뜩 긴장한 심구풍이 말했다.
"그렇다면 자녀분들 혼사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마 아바마마나 주상께서 주선해주시는 혼인을 하게 될 것이오. 사돈이 되는 것도 한미한 집안이겠지. 그게 다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모두 알고 있으니 아무 이의도 나오지 않을 것이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선택한 길이오. 괜찮고말고."
양녕의 말에 심구풍이 무사다운 결의로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대군께서는 정말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생각하시는 것, 내다보시는 것, 이뤄내시는 것 어느 것 하나도 저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대군께 투항하고 조선에 귀순한 것이 오히려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득으로 돌아왔습니다. 대군께 누가 되지 않도록 조선의 충신이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소."
양녕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데, 동헌 앞에서 어린애 목소리가 들렸다.
"대군. 중군사단장께서 대군을 뵙고자 오셨습니다. 밖이 추워 우선 객사로 모셨습니다. 시간이 되실 때 말씀하시면 동헌으로 모셔오겠습니다."
"대군께서는 역시 바쁘시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날이 풀리면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알겠소. 멀리는 못 나가나 동헌 앞까지는 배웅하겠소."
심구풍과 양녕이 장지문을 열고 나오자, 동헌 앞에 서 있던 댕기 머리 사내아이가 꾸벅 인사했다.
"시동으로 쓰시는 아이입니까?"
"그렇소. 이름은 등자사라 하오. 공께는 아마 원래 이름인 쇼니 스케츠구라고 하는 편이 더 알기 쉽겠구려."
뜻밖의 이름에 눈을 크게 뜬 심구풍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쇼니 가문이 후지와라 성이니 등씨고, 스케츠구를 조선식으로 읽어 자사로군요. 그나저나 그 소문이 정말이었을 줄이야……. 아, 아닙니다."
쇼니 가문의 항복 소문을 떠올리던 심구풍이 입 밖으로 내던 말을 다급하게 멈췄다.
양녕은 못 들은 척하고는 심구풍을 소개했다.
"이분은 녹아백으로 책봉되신 녹아 심씨 가문의 구 자 풍 자를 쓰시는 분이다. 너에게는 아마 시마즈 가문의 히사토요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알기 쉽겠구나."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등자사라 합니다."
"오냐. 나는 심구풍이라 한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그것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스케츠구!"
등자사와 심구풍이 나누던 인사가 누군가 외친 소리에 끊겼다. 다 같이 소리가 난 쪽을 보자 머리는 산발하고 눈은 풀린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등자사의 옆에서, 심구풍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저자는……. 쇼니 미츠사다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