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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6화 (5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6화

56화

양식에 맞춘 인사말과 히사토요가 항복하러 왔다는 내용을 다 적은 양녕이 이윽고 본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제가 주민들과 첩보를 통해 확인해 본 바로는 정말로 시마즈 가문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 맞고, 분가에 노예로 끌려간 백성들을 내분에서 이겨 가는 히사토요가 구출한 것도 맞습니다. 혹시라도 분가에서 항복하러 온다 해도 그들은 조선 백성을 노예로 부린 왜구로 간주하여 상종하지 않겠습니다.

노예로 끌려간 것을 자신이 구출했다는 내용과 분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히는 것을 보며 히사토요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이자가 조선의 봉신이 되고자 한다 하였는데, 조선 편에 서서 우토와 사가라 두 가문을 쳐서 그 땅을 바치게 해 충심을 확인하겠습니다. 만일 정말로 그들을 쳐서 바친다면 그때는 조선의 봉신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과 본산을 하사해 제후로 삼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가진 땅이 너무 넓으니 살마(사츠마)와 대우(오오스미)만 남겨 주고, 일향(휴우가)은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하면 성과 본관을 받는 것을 항복과 거래한 것이 아니라 귀의하고 하사받은 것이 되니 모양새가 더 좋겠소. 게다가 휴우가를 바치라고 했을 때 순순히 바친 것이 되니 그 자체로도 충심이 증명될 것이고 말이오."

"그렇소. 그럼 이제 이렇게 보내겠소."

양녕은 편지 끝에 날짜와 쓴 사람을 적고 도장을 찍었다. 이어서 발송 대장에 날짜와 문서 요약을 적고 편지와 겹치게 해 도장을 찍어 기록을 남기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히사토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무엇이오?"

"내가 쓴 편지에는 내 수결이 있으니 누가 쉽게 조작할 수 없겠지만, 대군이 쓴 편지에는 대군 도장만 있는데 여차하면 대군이 다른 내용으로 새로 써서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내 안위가 달린 일이라 걱정되어서 그렇소."

조심스럽게 양녕의 표정을 살피는 히사토요의 예상과는 달리, 양녕은 흔쾌히 수락했다.

"기분 나쁠 게 뭐 있소? 충분히 이해하오. 물론 내 서신에 공의 수결을 남길 수는 없소. 외부자가 조정에서 쓰이는 문서를 읽었다는 말이 되니 말이오. 대신 이렇게 하겠소. 승상, 방 안쪽에 사당에서 거두어 왔던 밀랍초가 있을 걸세. 그 밀랍초하고 화로, 칼과 숟가락을 가져다주게."

"예, 대군."

최만리가 방안을 여기저기 다니며 양녕이 지시한 것들을 가져와 탁자 위에 두는 동안, 양녕은 종이 하나를 더 펼쳐놓고 새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제가 쓴 서신은 내용상 히사토요에게 보여 줄 수 없어 안에 히사토요의 수결이 없지만, 혹시라도 위조될 수 있으니 편지를 봉한 겉에 수결하고 도장을 찍겠습니다. 또한 상자도 봉하여 보낼 것인데, 혹시라도 봉인이 상한 흔적이 보인다면 누군가 서신에 손을 댄 것일 수 있으니 그 내용을 믿지 마십시오.'

다 써 내려간 양녕은 히사토요의 서신과 자신의 서신을 몇 번 접고 끝을 붙여 봉인한 다음 방금 쓴 종이 위에 겹쳐지게 놓고는, 세 종이에 걸쳐지게 도장을 찍었다.

"이제 공도 세 종이에 걸쳐지게 수결하시오. 그러면 공이 쓴 서신과 내가 쓴 서신, 이 종이 셋 중 어느 것도 위조할 수 없소."

히사토요가 수결하자 새로 쓴 종이와 두 서신을 상자에 넣고, 여닫는 부분에 작은 종이 두 개를 반씩 겹치게 붙여 봉인했다.

"이제 여기도 두 종이에 겹치게 수결하시오. 한 장이면 몰라도 두 장을 상하지 않고 뗄 수는 없을 것이오."

"정말 꼼꼼하구려. 수결했소."

"그럼 마지막이오."

양녕은 최만리가 가져온 밀랍초를 칼로 조금 깎아서 숟가락 위에 올렸다. 그 숟가락을 난방용으로 쓰던 화로 위에 올려 밀랍을 녹이고, 상자에 붙인 수결 위에 부은 다음 바로 자기 도장을 꾹 찍었다.

밀랍이 식어 굳은 뒤에 도장을 떼자 밀랍에 도장 모양이 그대로 양각되어있었다.

"이러면 밀랍이나 종이 둘 다 상하지 않고서는 뗄 방법이 없소. 이러면 되겠소?"

편지를 몇 중으로 봉인한 것을 본 히사토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오. 고맙소. 그럼 조선의 주상 전하께서 답신을 보내 주시는 대로 나에게도 알려 주시오."

"알겠소.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겠소."

"그럼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난 이만 가 봐야겠소."

"공을 여기까지 데려왔던 조선의 무관이 다시 데려다줄 것이오. 조심히 가시오."

양녕이 장지문을 열며 말하자 히사토요가 목례하고 동헌을 나섰다.

히사토요가 빗속을 지나 관아 정문까지 나서는 것까지 본 양녕이 장지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와 앉자, 지금까지 자초지종을 다 본 최만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자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계책인 것은 알겠지만, 너무 많은 것을 맞춰 주신 것 아닙니까? 특히 내분 중에 노예를 구출했다는 내용은 위험합니다. 노예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혹여라도 시마즈 종가에서도 조선이나 명나라 출신 노예를 부렸다고 증언하는 순간 대군께서도 기군망상의……."

양녕이 자신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듯 묵묵히 무언가 또 종이에 쓰는 것을 본 최만리가 말을 흐렸다.

"무엇을 쓰십니까?"

"아까 편지에 적히지 않은 자세한 자초지종을 적고 있네. 이것도 같이 보내면 주상께서 정확한 상황을 아실 수 있겠지."

"이미 상자는 몇 겹으로 봉하지 않으셨습니까?"

최만리의 물음에 양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상자에 넣을 필요가 뭐 있는가? 따로 보내면 되지."

"그래도 상자에 든 내용과 따로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내용이 달라지게 된 상황도 적어서 보내면 되네. 애초에 따로 보내거나 내용이 다르거나 한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네. 아바마마와 주상께서 생면부지의 왜인 태수를 믿겠는가, 아니면 자식이고 형제인 나를 믿으시겠는가?"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역시 대단하십니다. 구주도는 대군께서 축자후로서 전부 가지실 명분이 있는 땅인데 그자에게 대군께서 가지실 봉토를 두 지역이나 내어 주신 것 아닙니까?"

조금 전 쓴 서신에서 양녕은 히사토요를 조선의 봉신으로 삼으라 했다. 그렇게 되면 같은 군주의 봉신이니 히사토요가 봉토로 받을 구주도의 두 지역만큼은 양녕의 것이 아니게 된다.

"조선 군인들의 피를 흘리지 않고 시마즈 가문을 평정할 수 있는데, 그 두 지역이, 그것도 지금 내 손에 들어와 있지도 않은 땅이 대수이겠는가?"

최만리가 기왕에 좋게 해석한 김에 맞춰 주었지만, 양녕의 노림수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예법상 후작인 양녕도 그 밑에 군으로 봉한 제후를 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 하지 않고 히사토요를 자신의 봉신이 아닌 조선의 봉신으로 삼으라 한 것이다.

즉, 종친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경계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양녕 자신은 구주도 땅을 온전히 가지는 것도, 자기 봉신을 두어 세력을 만드는 것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겸손히 말씀하시지만 역시 대군께서는 해동의 오 태백이십니다. 그러면 일단 주상께서 결정하시기 전까지는 시마즈 가문에서 공격하지는 않겠군요."

"그렇지. 오우치도 협상이 종료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제 비후의 키쿠치 가문이 정리되었으니 풍후의 오토모 가문을 공격할 차례로군요."

최만리의 질문에 양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지."

최만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상과 다르게 키쿠치 가문 일부가 도주해서 오토모 세력에 합류했으니, 우리도 저들 예상을 틀어 줘야 맞지 않겠는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며 양녕이 씨익 웃었다.

* * *

1419년 11월 중순 모일.

분고노쿠니, 오토모 저택.

"키쿠치 성이 함락되고 가독께서 돌아가신 지 열흘이 넘었다는 말이로군. 대를 이은 어린 다음 가독은 우토 지역으로 몸을 피했고."

"그렇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쪽으로 모셔 왔을 텐데……."

오토모 가문 가독 오토모 치카아키와 대화하던 키쿠치 타케다테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자책하지 말게. 키쿠치 가문을 의심했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두 가문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속이려 들었는데, 어찌 속은 사람 잘못이겠나."

"감사합니다, 토노."

열흘이 넘게 산길을 따라온 타케다테를 반겨 준 것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오토모 치카아키의 반응과,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이었다.

"오우치 모리하루의 전언이 키쿠치 가문더러는 오토모 가문이 조정과 조선과 짜고 남조를 쓸어낼 함정을 팔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라 그랬지? 우리에게는 키쿠치 가문이 조선을 끌어들여 남조를 다시 일으키려 하니 오해 사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었네."

"명백히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전언을 가져온 고위 무사가 거짓말을 해서 자신에게 득될 것도 없으니 가독의 전언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적겠지요. 게다가 거의 동시에 두 가문에 전언을 가져온 것도 수상합니다."

"그렇네. 누가 봐도 이간계지. 조선과 내통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우치 가문에서 뭔가 꾸미는 것만은 확실해."

"토노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케다테의 질문에 치카아키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일단 조선과 내통을 했건 아니건 오우치 가문은 협상 담당이니 한동안 조선군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남쪽 시마즈 가문은 너무 멀고 산도 건너야 하니 조선군은 아마도 가장 가깝고 위협이 되는 우리 오토모 가문부터 공격할 걸세."

"그렇습니다. 조선군 입장에서 후방인 여기 분고를 치지 않고 시마즈를 치러 가면 너무 전선이 길어지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와 함께 온 기병들로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자네들 식량과 의복, 무기와 갑옷 수리와 군마에게 먹이는 것은 우리가 다 대어 주겠네."

"물론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남조의 충신끼리 뭉쳐야지요."

"고맙네. 그러면 방어하면서 첩보를 모아야 하네. 오우치가 이간계를 썼지만 서신에 적지 않고 말로 한 것이라 증거가 남지 않았으니, 지금은 심증만이 있을 뿐이야. 다만 이제 저들이 뭔가 꾸민다는 걸 알았으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캐다 보면 나오는 게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돕겠습니다."

"고맙네. 늦었지만 두 가문이 힘을 합쳐서 잘 이겨내 보세."

치카아키와 타케다테가 서로 협력할 것을 약조하는데 밖에서 다급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누군가 말했다.

"주군,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오게."

치카아키의 말에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무사가 말했다.

"오우치 가문 상황을 살피러 갔던 세작의 보고입니다. 조선군이 치쿠젠 동부와 부젠 일대의 오우치 세력권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당황한 치카아키가 되물었다.

"조선군이? 오우치를 공격해? 아니 오우치는 협상 담당이지 않은가?"

"자세한 정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조선이 오우치를 공격 중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 말에 덩달아 당황한 타케다테가 치카아키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내통 여부와 상관없이 조선이 지금 오우치를 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걸세. 대체……."

대답하던 치카아키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앞에 놓여 있던 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빌어먹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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