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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5화 (5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5화

55화

다시 탁자 앞에 앉은 히사토요의 얼굴은 주도권을 완전히 뺏긴 탓인지 한층 더 어두웠다.

시마즈 가문 가독 자리를 둔 오슈가와 소슈가, 즉 종가와 분가의 내전은 종가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분가에서 양녕과 접선해 조선에 본가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조건을 제시하고 정동군의 힘을 빌린다면 상황은 뒤집힐 수 있다.

결국 히사토요는 조건은 차치하고서라도 양녕과 협상을 해야지만 분가가 정동군과 손잡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배상하는 것, 우토와 사가라 두 가문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조선에 넘기는 것, 휴우가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것이 조선의 봉신이자 제후가 되는 조건이오?"

"그렇소. 그 조건만 이행해 준다면 주상께 최대한 힘써서 건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소슈가를 돕지는 않을 것이오."

"알겠소. 조선의 주상 전하께서 승낙해주시기를 부처님께라도 기도해야겠구려."

히사토요의 기운 빠진 표정을 본 양녕은 주도권이 확실히 넘어왔으니 회유책도 꺼내기로 했다.

"일이 잘 풀려 공이 조선의 봉신이 되고 조선의 예법을 받아들이면 얻게 되는 것이 있소."

"예법으로 얻는 게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시마즈 가문 분란의 발단은 가독 상속을 두고 공의 매제가 일으킨 것 아니오? 전대 시마즈 가문 가독이 공의 형이었는데, 시마즈의 먼 방계인 이쥬인 가문 가독이자 공의 여동생의 남편인 이쥬인 요리히사가 술수를 쓴 것이 원인이라 알고 있소."

히사토요가 놀라 움찔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소? 조선은 용의 피를 이은 고려 왕을 죽이고 세워진 나라라 들었는데, 역시 용을 죽일 정도면 신통력이 있는 가문인 것이오?"

뜬금없는 말에 실소를 참으며 양녕이 대답했다.

"그런 신통력이 어딨겠소."

"하긴 그렇지. 여하간 공께서 아시는 대로 그 매제 놈이 문제요. 형의 외동아들을 출가하게 유도해서 직계 상속자가 없게 만들고, 형과 내가 내 정략결혼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틈을 타서 제 아들, 그러니 내 외조카를 가독 상속자로 만들려 했소."

양녕은 술술 얘기하는 히사토요에게 은근히 편을 들어주는 말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 매제의 탐욕이 공의 형이 사망하고 나서는 더 노골적으로 되지 않았소?"

"맞소. 형이 딱히 외조카를 상속자로 정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유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제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소. 물론 멀리 주둔해 있던 내가 부고를 듣고 급히 돌아와 형님의 위패를 탈취해 장례식을 치르고 가독과 슈고직을 상속받아 매제 놈의 흉계는 이루어지지 못했소."

대단한 일을 했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하는 히사토요에게 양녕이 말했다.

"뭐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지 않소. 그 뒤에 종가의 자리를 노리던 분가인 소슈가가 매제 편으로 끼어들고, 각 지역 호족들까지 덩달아 양쪽으로 편을 나눠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내전이 되지 않았소?"

"내전이라 하면 좋게 말한 것이고, 차라리 아수라장이 맞을 것이오. 처남이 배신하고는 내 처자식을 잡아 저쪽에 넘기려는 걸 내 가신들이 구출하기도 하고, 내가 다른 곳에 원정 간 틈을 탄 매제에게 성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기도 했고, 또…… 여럿 있었소."

갑자기 말을 하다 끊은 히사토요였지만, 양녕은 그 뒤에 나올 내용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히사토요가 화약을 맺자는 핑계로 자신의 6촌 손자에 해당하는 분가의 가독을 불러서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 아들도 마저 죽이겠다며 출전한 히사토요가 분가의 성을 포위하자, 매제가 병력을 끌고 와 포위망을 포위해 버렸다.

주군을 구하러 온 히사토요의 가신들이 그걸 또 포위하는, 그야말로 난장판인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승기를 잡은 히사토요와 매제가 화약을 맺고 히사토요의 가독 상속을 확정 지으며 상속 분쟁은 종료되었다.

대신 이 과정에서 불붙은 종가와 분가의 싸움은 그 뒤로도 이어졌고, 결국 종가가 우세를 점해 가는 상황에서 정동군이 구주도를 정벌하러 온 것이다.

"그래서 예법으로 얻는다는 것이 무엇이오?"

화제를 돌리고자 던진 히사토요의 말에 양녕이 설명을 시작했다.

"조선의 상속법이오. 조선에는 아들 없이 딸만 있어 가문이 이어지지 못하면 사위가 처가 가문의 제사를 지내주는 외손봉사라는 제도가 있소. 하지만 둘째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막내딸의 아들인 외손자가, 그것도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아예 가문을 잇는 법도는 없소."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은 알겠지만, 그게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오?"

"물론이오. 조선의 예법에서 보면, 매제가 공의 형의 장례를 지내고 자기 아들을 상속자로 만들려던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찬탈 시도가 되오. 그러면 공은 예법을 지키고 정당한 자기 권리를 찾으려 한 것이 되고, 매제와 그편을 든 자들은 찬탈 시도자가 되는 것이오."

"매제의 이쥬인 가문이 성씨를 바꾸기는 했지만 시마즈의 방계인데도 그렇소?"

"애초에 조선에서는 방계라 해도 같은 선조를 두었으면 혼인을 하지 않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조선의 상속은 일본의 가독처럼 가문의 대표를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가는 혈통을 말하는 것이오."

"말인즉슨, 일본의 풍습이 아닌 조선의 예법을 따르면 내가 완벽하게 명분을 얻는다, 뭐 이런 것이오?"

얼추 이해한 듯한 히사토요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공의 명분이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누군가 매제가 한 것처럼 찬탈 시도를 할 구실이 아예 없어지오. 시마즈씨 아닌 이가 시마즈 혈통을 잇겠다 들 수 없으니 말이오."

"그건 마음에 드는군. 비록 지금은 내가 매제를 이기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오."

고개를 끄덕인 양녕이 말했다.

"조선의 예법으로 얻는 것이 그것이고, 봉신이 되어 얻는 것도 있소. 이것은 시마즈 가문 안에서도 종가의 자리를 지키는 방법이오."

"종가의 자리를 지킨다면, 분가인 소슈가 놈들을 이기는 방법이오?"

"이길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소슈가가 종가의 자리를 넘볼 수 없어지는 것이오."

"어떤 방법이오?"

"내 주상께 공을 봉신이자 제후로 받아들이면서 성과 본관을 하사할 것을 주청하겠소."

"시마즈 가문은 이미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지고 있소."

"그 미나모토 성이 시마즈 가문 선조의 출신을 어떻게든 가져다 대서 주장하는 것일 뿐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거 알고 있소. 아예 조선의 주상 전하께 성을 받는 게 더 확실하고 강력할 것이오."

성을 가진 가문이라고 당당히 말하려다 양녕에게 정곡을 찔린 히사토요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새로 성을 받으면 뭔가 다른 게 있소?"

"성을 받는 것은 시마즈 가문 전체가 아니라 공이오. 즉 공 이후로만 그 성을 칭할 수 있고, 그 성을 가진 자라야 조선의 봉신이자 제후의 가문인 것이오."

히사토요는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런 것이군. 내 윗대에서 갈라진 이들은 그 성을 받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는 하사받은 성을 가진 내 후손만이 계승자고, 성이 다른 소슈가 놈들은 분가조차 아니게 되겠구려."

"그렇소.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니오?"

양녕의 말에 히사토요는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대서는 천천히 말하며 조건을 되짚어 보았다.

"노예로 잡혀온 이들을 돌려보내고 배상하는 것은 살기 위해 당연한 것이고, 충성을 보이는 수단으로 우토와 사가라 가문을 쳐서 땅을 넘기는 것도 감당할 만하오. 휴우가 지역도 슈고 직함만 있지 실제로 지배 중인 땅은 아니라 미련만 버리면 될 것이고."

양녕이 부추기듯 이어 말했다.

"조선의 예법대로면 매제와 싸운 것도 정당해지고 계승도 견고해지오. 성까지 하사받으면 위엄이 설 뿐만 아니라 계승도 확실히 공의 후손들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소."

"알겠소. 대신에 모든 것은 조선의 주상 전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는 하나, 대군께만이라도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이오?"

"노예로 끌려온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배상하는 것은 당연히 즉각 할 것이오. 휴우가 지역을 포기하는 것도 바로 하겠소. 대신 그 외의 조건은 확실하게 조선의 봉신이 된 다음 이행하겠소."

양녕이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는 인정할 수 있소. 어차피 예법을 따르거나 성과 본관을 받아 생기는 이득도 조선의 봉신이 되어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니 말이오. 그러면 봉신이 된 다음 우토와 사가라 가문을 치시오. 거기에 더해서 소슈가가 조선 쪽에 붙지 못하게도 해 주겠소."

"고맙소.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실 것이오?"

"주상께 올리는 건의를 이 자리에서 바로 쓸 테니 옆에서 같이 보시오. 승상, 필기구와 상자, 봉인할 종이와 도장을 가져다주게."

"예, 대군."

옆에서 가만히 있던 최만리가 지시받은 물건을 가져와 탁자에 올려놓자, 양녕과 히사토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옆에 나란히 섰다.

"우선 공이 항복하면서 써서 보낸 것으로 할 서신이 있어야 하오. 불러 줄 테니 적으시오."

"알겠소."

히사토요가 종이를 펴고 붓을 들자 양녕이 불러 주기 시작했다.

"일본국 구주도 3주태수 시마즈 히사토요가 대조선국 주상 전하께 올립니다. 저의 가문은 대를 이어 구주도 남쪽의 땅을 오래 다스려왔습니다. 본래 제가 맡기 전 이 땅을 다스리던 사람은 저의 형이었는데, 매제가 흉계를 짜 형의 외동아들을 출가시키고,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형이 돌아가시자 유언을 위조하여 시마즈씨가 아닌 자기 아들에게 상속시키려 하였습니다."

"방계라는 얘기는 빼는 것이오?"

"같은 선조를 둔 이들끼리 결혼했다고 하면 예법 없는 오랑캐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방계일 뿐 같은 성씨라고 하면 이쥬인 가문에 찬탈 명분을 조금이라도 주는 것이니 빼는 것이 좋소. 그럼 마저 적으시오."

오랑캐라는 말을 곱씹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이어서 불러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급히 돌아와 형의 위패를 매제에게서 빼앗아 장례를 치르고 동생인 제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자리를 탐내는 시마즈 가문의 분가가 매제를 부추겨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난을 진압하던 도중 분가에서 일꾼으로 쓰고자 조선과 명나라에서 잡혀 온 무고한 백성들을 노예로 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노예를 부린 죄가 다 소슈가에 가겠구려."

"맞소. 그렇게 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겠소? 다음 내용이오. 이제 분가의 난이 진압되어 가고 백성들을 구출하였으니 마땅히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며, 분가라고는 하나 같은 시마즈 가문이 지은 죄이니 제가 대신해서 그들의 고초를 배상하겠습니다."

히사토요와 시마즈 종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해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적으로 인정받게 해주는 그 내용에, 옆에서 듣던 최만리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초조한 표정만 지었다.

"지금 조선의 상왕 전하와 주상 전하께서 옛 주나라의 성군과도 같으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조선의 봉신이 되어 교화의 은덕을 누리고 먼 변방에서 영원토록 섬기겠습니다. 끝이오."

슬쩍 양녕이 자신의 입지 강화에 관련된 내용을 섞어서 불러 준 것까지 받아적고, 수결까지 한 다음 양녕과 같이 서신을 보던 히사토요가 물었다.

"그런데 이러면 휴우가 지역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나 우토와 사가라 가문을 치는 내용도 없지만, 성과 본관을 받는다는 내용도 없지 않소?"

"그건 내가 보낼 서신에 적을 것이오. 공이 너무 정세를 다 아는 것처럼 써서 보내면 수상해 보일 뿐만 아니라 진의가 의심받지 않겠소? 그럼 이제 내가 쓰겠소. 옆에서 보시오."

처음 보는 필기구를 신기하게 보는 히사토요와 걱정으로 가득한 최만리의 시선을 받으며, 양녕이 깃털 붓을 들고 이도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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