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4화 (5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4화

54화

1419년 11월 초순 모일.

석성부 석성목, 관아 동헌.

키쿠치성 점령전으로부터 며칠 뒤. 양녕은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승상 최만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키쿠치 가문 식솔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정동군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별다른 재주가 없거나 정동군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이들은 키쿠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땅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 앞으로 거기서 농사짓게 했습니다."

"좋네. 키쿠치성에서 나온 전리품들은 지금 거기 주둔 중인 중군사단장 최윤덕 공이 1차로 정리해서 보낼 테니 받아서 처리하면 될걸세."

"알겠습니다. 또 지시하신 대로 키쿠치 카네토모도 화장해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니?"

"이전에 멸망시키신 쇼니 가문은 아예 역사에 불명예로 남게 하시려 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독인 카네토모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을 남기시면 키쿠치 가문은 명예롭게 남지 않겠습니까?"

"그 얘기로군. 괜찮네. 가독이 명예롭게 패배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식솔들과 땅을 부탁하며 넘겨준 것이 되니, 오히려 키쿠치 가문은 명예롭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구주도 정복에 정당성을 줄 수 있어. 무엇보다 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는 대신 식솔들의 안전을 요청한 카네토모와 살아남겠다고 달아나면서 행선지를 알릴까 식솔들을 모두 죽인 쇼니 가문을 대비되게 해야 쇼니가 저항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더 확실하게 막을 수 있지."

"그런 계책이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양녕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이번 키쿠치성 점령전에서는 탈출 시간을 벌려는 무사들의 분투와 기습 때문에 정동군에서도 제법 전사자가 있었다.

"이전처럼 화장해 유골을 수습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야지. 생각보다 많다 하니 미리 명부를 작성해서 보내면 조정에서도 처리하기 좋을 걸세. 그리고 한 가지 더 주상께 건의 드릴 것도 있네. 전쟁터에서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야."

"사당을요? 사당은 우선 세우고 말씀드려도 되지 않습니까?"

"사당 자체가 아니라 사당을 세우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제도에 관한 건의일세. 각 지역마다 그 지역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죽은 자는 군인과 일반 백성, 전사인지 사고사인지를 가리지 않고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세우고 충렬사라고 하는 것이네. 그리고 그 각 지역의 충렬사들을 총괄하는 사당이자 관청을 한성부에 세우고 현충사라고 이름하자는 건의야."

"병사들까지는 이해하지만, 일반 백성들도 말입니까?"

"그래. 무관으로 죽은 자는 가문에서나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병사와 백성들은 잊힐 뿐이야. 그들을 위한 사당일세. 물론 집에서 알아서 제사를 지내겠다 하면 기록에는 남기더라도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에서는 빼 주는 것이 옳겠지."

"지금 나라에서 예법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을 백성들에게도 보급하려 하니, 차라리 각 집에서 조촐하게나마 제사 지내는 예법을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있고 나이 든 사람만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아니네. 후사 없이 어린 나이에 전쟁터의 고혼이 된 자식을 기일마다 부모더러 제사 지내게 할 셈인가?"

양녕의 말에 최만리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참담한 일을 하라 나라에서 시킬 수는 없지요. 대군께서는 역시 덕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 말에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그리 좋은 생각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야. 폐세자인 내가 해동의 오 태백이라는 과분한 이름을 등에 업은 덕에 살아남았네. 그것도 모자라서 나 한 사람이 공을 세우고자 할 때마다 만 사람의 백골이 들판에서 말라붙어 갈 것임을 알면서도 제후가 되어 이리 전쟁터에 나와 있어. 그 만 사람의 고혼을 위로하고자 하는 미약한 노력일 뿐이야."

당나라 시인 조송이 쓴 기해세의 구절을 인용한 양녕의 말에 최만리는 더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건의할 내용을 정리하여 대군께 확인받고 조정에 올리겠습니다."

"그리하게나."

감동한 최만리와는 반대로 양녕은 여전히 씁쓸한 표정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대마도 원정에서 죽은 군인의 아들이 조정에 탄원해 부친의 생사라도 알고 싶다 했을 정도였다. 만약 양녕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국가에서 관리하는 보훈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런 일들은 줄어들 것이었다.

"그러면 왜인 출신 병사들 중에서도 죽은 이가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할까요?"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최만리가 물어보자 양녕이 짧게 생각하고 답했다.

"화장해서 집에 유골을 보내주는 것은 똑같이 하게. 그리고 나라에서 명복을 빌어주기를 원하는 이들은 석성목에 사당을 짓고 거기서 제사 지내 주게."

"출신 기록은 어떻게 남길까요?"

"왜인 누구라는 식으로 적지 말고 석성부 어디 마을 출신 누구라고 적게. 조선의 군대에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 죽었으니 조선인으로 대우해야 마땅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 집은 조선인으로 간주하여 앞으로 세금을 1할만 내게 하며, 이미 거둔 올해 세금은 계산해서 돌려주기 어려우니 다만 식량과 포목을 조금 주어 위로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지 않나?"

최만리의 말을 잠시 멈춘 양녕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정말로 뛰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동헌 앞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군! 중기병연대장 이징옥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다급한 그 목소리에 단에서 뛰어 내려간 양녕이 동헌 장지문을 열자, 비에 흠뻑 젖어서 숨을 몰아쉬는 이징옥이 서 있었다.

"자네는 키쿠치 지역에 가 있지 않았었나?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길래 이리도 급하게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대군을 뵙고자 하는 이가 갑자기 주둔지에 찾아왔습니다. 중군사단장께서 만나 보고서는 빨리 대군께 데려가야 한다 하셔서 제가 직접 말 뒤에 태우고 데려왔습니다. 그자는 지금 관아 정문 누각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대체 누구길래 중군사단장이 연대장인 자네를 빗속에 이리 급하게 보낸단 말인가?"

"시마즈 히사토요라는 자입니다. 대군과 긴히 협상하고자 한다 합니다."

그 이름을 들은 양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겠네. 빨리 동헌에 들이게. 승상은 사람을 시켜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주게."

* * *

잠시 후.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녕과 마주 보는 자리에 장년의 무사가 앉아있었다.

시마즈 가문의 가독이자 구주도의 남쪽 1/3에 해당하는 사츠마(살마), 오오스미(대우), 휴우가(일향) 세 지역의 슈고직을 모두 가진 사내. 시마즈 히사토요였다.

최만리가 가져다준 천으로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낸 히사토요가 양녕을 보고는 말했다.

"들여보내 준 것은 고맙지만, 일단은 적대관계인 나를 이렇게 성 깊은 곳까지 들여도 괜찮소?"

"이 빗속에서 주변을 잘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남쪽 끝에서 온 공이 북쪽 끝인 이곳 지리를 기억해 돌아가 봐야 별 위험요소도 없을 것이오. 무엇보다 가독이자 슈고가 직접 찾아온 것을 보면 평범한 일이 아닐 테니, 가장 주변 눈이 없는 곳에서 보는 게 맞소."

"평범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줘서 고맙소."

"이번에는 내가 묻겠소.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오? 키쿠치 지역에서는 조선군이 데려왔다고 해도 사츠마에서 키쿠치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닌 데다가 비까지 이리 오지 않소?"

양녕의 질문에 히사토요가 자랑하듯 대답했다.

"우리 집안은 바다와 접한 땅을 영지로 수백 년을 살았소. 대를 이어온 가신들 중에는 배를 모는 데 있어 이 정도 폭우쯤은 아무 문제 없는 이들이 흔하오. 그들이 모는 배를 타고 와 해안에 내리고, 키쿠치에 있던 조선군 장수에게 내 이름과 온 이유를 말하니 이리 바로 보내 주었소."

점령지 처리를 위해 키쿠치에 보내두었던 최윤덕이 큐슈 정세도 잘 아는 장수라 다행이었다 생각하며 양녕이 말했다.

"좋소. 협상을 하러 왔다고 들었소. 그럼 바로 시작하지."

"큐슈의 슈고들은 다 내치려던 것 아니었소?"

슬그머니 떠보듯 물어보는 히사토요의 말에 양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서신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감경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일본 조정이오. 슈고들하고 협상하지 않겠다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소. 그리고 뭣보다 공께서도 내가 협상에 응할 것이라 생각했으니 온 것 아니오?"

"그건 맞소. 사실 그런데 좀 무작정 온 감도 없지는 않소. 슈고가 직접 가면 신분을 봐서 협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적어도 냅다 죽이지는 않겠지 싶어서 말이오."

그 말에 양녕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시마즈 가문의 사람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용맹과감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정말인 것 같소."

히사토요가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생각하기 전에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협상 시작이오. 원래대로라면 시마즈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항복 아니면 저항 둘 중 하나요. 그 둘 다 아닌 선택지를 원하니 협상하러 온 것일 게고. 그럼 어떤 선택지를 원하는지 말해 보시오. 나는 결코 결렬되지 않을 협상을 할 자신이 있소."

"우리가 직접 잡아 온 것은 아니지만, 조선과 명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다 흘러들어와 시마즈 가문 영지에도 여럿 있소. 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고초를 겪은 배상도 하겠소. 또 슈고 아닌 호족들처럼 조선의 봉신이 되는 대신 사병을 모두 포기하겠소."

양녕은 히사토요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끌고 간 무고한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고초를 배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오. 게다가 내 서신을 받고 바로 온 것도 아니고, 지금 키쿠치 가문이 무너지고 우리가 히고의 절반을 장악하고서야 위협을 느끼고 온 것 아니오? 그건 조건이 될 수 없소."

"그럼 원하는 조건이 있소?"

히사토요도 딱히 기대하고 던진 조건도 아니었는지 순순히 양녕에게 순서를 넘겼다.

"현실적으로 사병을 바로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오. 마침 키쿠치 가문에서 탈출한 이들 일부가 정동군과 시마즈 영지 사이에 있는 우토 가문에 합류했고, 근처의 오랜 호족인 사가라 가문도 세력을 보전하고 있소. 시마즈 가문의 사병으로 이 둘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조선에 넘기시오."

"그냥 사병을 없애거나 싸울 때 도우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병력을 상하게 해 가면서 그들을 멸망시켜서 땅을 넘기라는 것이오?"

어처구니없다는 히사토요의 말투와 표정에도 양녕은 태연히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니오? 조선의 봉신이 되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선의 적과 싸워서 충심을 증명해야 할 것이오. 어차피 노예들 출신지를 안다는 것은 그들이 명과 조선의 백성임을 알면서도 사 간 것 아니오? 시마즈 가문을 멸망시키거나 쫓아내지 않는 대신, 그 백성들이 흘린 피눈물만큼 무사들의 피를 흘리시오."

히사토요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알겠소. 우토나 사가라 둘 다 딱히 우호 관계도 아닌 가문이고, 이기지 못할 세력도 아니니 크게 꺼릴 건 없소. 그럼 그거면 되겠소?"

"아니. 더 있소. 지금 공께서는 사츠마, 오오스미, 휴우가의 세 슈고를 겸하고 있지만, 어차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사츠마와 오오스미 둘 뿐인 것은 알고 있소. 그 두 지역을 봉토로 가지는 것은 인정해 주겠지만 휴우가의 지배는 포기하시오. 거기는 조선에서 지방관을 보내 다스리는 지역이 될 것이오."

양녕의 말이 끝나자 히사토요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휴우가를 장악하기 위해 시마즈 가문은 많은 피를 흘려 왔고, 나 역시 지금 부인을 그 지역 호족 가문 중 하나에서 정략결혼으로 맞이했소! 그런데 휴우가 지역을 포기하라는 것이오? 포기하면 확실히 우리를 조선의 봉신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맞소?"

목소리가 커진 히사토요에게 양녕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조선의 왕자라고는 하나 주상 전하의 봉신이고 조선의 백성일 뿐이오. 내가 공과 협상을 하고 조정에 건의할 수는 있지만 결정은 주상 전하께서 하실 것이오."

그 말에 화를 낼 마음조차 없어졌는지 히사토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확실한 것을 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고 땅을 포기할 수는 없소. 결렬되었다고는 하지 않겠으나 협상은 없던 것으로 하겠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사람을 보내시오. 그럼 난 이만."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나가려는 히사토요의 등에 대고 양녕이 조용히 말했다.

"사쿠라지마는 여전히 화산재를 뿜어내오? 아, 시미즈 성은 주변에 산을 두른 요충지라 산에 가려서 화산재가 날리는 것만 보이겠구려."

히사토요가 발을 딱 멈추더니 양녕에게 물었다.

"큐슈에 온 지 몇 달 안 되는 대군이 어떻게 우리 가문 거점의 지리와 경치를 아시오?"

"모를 것 있소? 그런데 내가 사츠마의 경치 얘기를 한 걸로 그렇게 놀라면, 시마즈 종가인 오슈가와 분가인 소슈가의 관계나, 공의 매제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더 놀라려고 그러시오?"

양녕의 말에 정말로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 히사토요가 아차 싶었는지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 가문 일을 아는지 모르겠으나, 소슈가 놈들은 이미 세가 기울었으니 내 힘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소. 놈들은 절대 내 가독과 슈고 자리를 빼앗을 수 없을 것이오."

주도권을 잡은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시마즈 가문의 사람을 보는 것은 공이 처음이오. 이제 시마즈 종가의 공을 봤는데, 공께서 가고 나면 분가인 소슈가에서 온 사람도 볼지 모르겠군. 세가 기운 만큼 더 좋은 조건을 들고 온 사람으로 말이오."

"대체, 대체 어디까지 아는 것이오?"

떨리는 히사토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 말도 했소. 나는 결코 결렬되지 않을 협상을 할 자신도 있다고."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서 있던 히사토요가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의자에 와 털썩 앉아 말했다.

"알겠소. 협상을 다시 시작하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