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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3화 (5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3화

53화

"적 기병대는 돌파를 시도하다가 그대로 퇴각했습니다. 아군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이종무의 보고를 들은 양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해가 거의 없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혹시 아군 기병대로 추격하라 하셨소?"

"안 했습니다. 이 근처 지리는 저들이 더 잘 아니 쫓아가기도 힘들고, 잘못해서 함정에 걸릴 수도 있다 판단했습니다."

"내 생각도 같소. 게다가 쫓아가서 맞붙는다고 해도 아군 궁기병의 활로는 적 갑옷을 뚫기가 어렵고, 근접으로 붙으면 저들 하나하나의 무력이 출중하니 아군 기병만 상할 것이오."

"예. 무엇보다 적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아군만 쓰러진 상황이라면 오기로라도 돌격할 법한데, 그대로 퇴각하는 것을 보면 냉철하고 상황판단이 뛰어난 자일 것 같아 쫓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오. 자, 그럼 후방도 안정되었으니 다시 공성전으로 돌아갑시다. 지금 상황은 어떻소?"

양녕의 말에 이종무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발사되지 않고 발사대 안에서 터진 인화살이 둘 있었습니다. 화차 하나는 전소했고, 다른 하나는 빠르게 대처해서 발사대만 불타고 수레 부분은 건졌습니다."

"병사들이 무사하니 다행이지만 아쉽게 되었군. 적들은 어떻소?"

"화차를 쏜 군관이 말하기를 성안에 제대로 된 건물이 얼마 안 남았다 합니다. 이제 인화살을 더 쓰더라도 효과는 많이 못 볼 것입니다."

"알겠소. 이제 진입 준비를 하시오."

"예."

* * *

잠시 후.

키쿠치성 토벽 입구.

무사 하나가 토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살폈다. 잠시 살피다 다시 조심조심 고개를 내리고 토벽에서 뛰어 내려와 다른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아까 네가 말한 게 맞다. 저 투구는 히데토모 님 것이야."

"역시 그렇지?"

무사들이 얘기하는 것은 조금 전 조선군 진영에서 온 말 한 마리와 한 사람 때문이었다. 말 갑옷과 사람이 입은 투구를 보았을 때 한참 전 조선군에 다가가 도발하다 산 채로 잡혔던 히데토모가 확실했다.

"상태는 어떠시냐?"

"말 위에 걸쳐져만 있으신 정도야. 다행히 손발을 가끔 움직이시니 큰일이 나지는 않은 것 같아."

조선군은 히데토모가 타고 온 말 안장에 곤죽이 된 히데토모를 갑옷째로 걸쳐 놓고, 말 궁둥이를 때려 키쿠치 성 방향으로 보냈다. 그렇게 제 주인을 싣고 가던 말은 해자를 건너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붙잡히시는 걸 보고 돌아가시겠구나 했고, 말에 실려 오실 때도 돌아가셨겠구나 했는데 어쩐 일로 조선군이 돌려보낸 거지?"

"놈들도 바보가 아닌데 그대로 죽이면 우리 사기가 올라갈 걸 알겠지. 대신 화는 나니까 저렇게 매질만 해서 돌려보냈을 거고. 자, 뭣들 하냐. 다리를 내려라. 빨리 치료해 드려야지."

한 무사의 말에 다 같이 끄덕이고 널빤지 다리를 낑낑대며 내리자, 슬픈 눈을 한 말이 푸르릉거리며 토벽 안으로 들어왔다. 무사들은 말 안장에서 조심스럽게 히데토모를 내려 눕혀놓고 살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눈이라도 좀 떠 보십시오, 도련님."

한 무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히데토모는 터진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셨군. 하긴 이렇게 얼굴이며 손이며 다 피멍이 들게 당하셨으니 그럴 만하지. 빨리 갑옷 벗기고 업어다 안으로 모시세."

그렇게 말하고 우선 턱 끈을 풀어 투구를 벗기고 몸통 갑옷을 벗기려 옆구리를 더듬던 무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안 풀려?"

"응. 엄청 단단하게 묶여 있는데? 갑옷 끈 아닌 거로 한 번 더 묶여 있어."

"각오하고 나가신 거라 더 튼튼하게 묶고 나가셨나? 칼로라도 끊어 봐."

끄덕인 무사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서 옆구리를 들여다보며 조심조심 매듭을 끊어나가는데,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면서 조용해지자 갑옷 안에서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무슨 소리지? 뭐가 갑옷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때 흐린 의식을 간신히 붙잡은 히데토모가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조금 전에는 대화에 묻혀 듣지 못했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서…… 떨어져……."

무사들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갑옷 안에서 타들어 간 도화선이 화약에 불을 붙이고, 화염, 쇳조각, 백린 파편들이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 * *

키쿠치 가문 저택.

토벽에서 생긴 소란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한 저택에서는 키쿠치 가문원과 무사들이 모여 얘기하고 있었다.

"결국 기병으로도 돌파하지 못했구나. 조선이 화포에 능하다는 말이 정말이었어."

"송구스럽습니다, 형님. 제가 미숙하여 아까운 무사들만 죽게 만들고, 아무 성과도 없이 뻔뻔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타케다테에게 형이자 키쿠치 가문 가독인 카네토모가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원래 일본의 무사들은 말 위에서 창칼을 쓰는 것보다 활로 싸우는 전통이 더 길지 않았느냐. 익숙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하물며 기병에 상극인 창병 방진을 뚫지 못한 것이 어찌 흠이 되겠느냐.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형님……."

"아버지, 그러면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 질문한 것은 카네토모의 열 살배기 아들인 모치타케였다. 그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묻는 그 질문에 카네토모가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나가서 저들과 싸워 상황을 낫게 만들 수 없다면, 여기서 마지막 순간까지 결사 항전해야지."

"네, 아버지."

"따르겠습니다, 형님."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모치타케와 타케다테는 물론 다른 무사들까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 너희는 아니다."

고개를 숙였던 이들이 뜻밖의 말에 놀라서 다시 고개를 들고 카네토모를 보자, 카네토모는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결사 항전하는 것은 나 하나다. 너희는 무기와 식량,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탈출하거라."

"형님! 어째서입니까! 저희 또한 무사입니다. 어찌 저희더러 달아나라 하십니까! 기왓장처럼 몸을 사리느니, 옥처럼 깨어지겠습니다!"

타케다테가 반발해 외치듯 말하는데도 카네토모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옥처럼 깨어지는 것이 기왓장처럼 보전하는 것보다 무사답지. 하지만 깨어져야만 옥이고, 보전했다고 기왓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왓장을 만드는 진흙 속에 처박혔다고 해서 옥이 옥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훗날을 도모하거라. 그것을 치욕이라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다. 치욕을 이기고 살아남아 목표를 완수하는 것 또한 무사의 길이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같이 가시면 안 됩니까?"

눈물이 고이는 것을 참는지 연신 눈을 깜빡이는 모치타케가 아버지 카네토모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말했다.

카네토모가 자상한 표정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우리의 옛 선조께서 기반으로 삼으신 땅이다. 이 키쿠치 땅은 우리의 성씨가 되었고, 요새가 되었고, 무덤이 되어온 땅이지. 지금 이 성 또한 선대께서 지어 물려주신 것이야. 이대로 두고 전부 달아난다면 조선군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무사가 우리를 비웃는 구실만 될 것이란다. 누군가는 끝을 함께할 이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적합한 사람은 키쿠치 가문 가독 말고는 없단다."

"아버지……."

"형님……."

동생과 아들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것을 보고 씁쓸하게 미소지은 카네토모가 이번에는 주위에 앉은 무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대를 이어 키쿠치 가문의 충신이었고, 앞으로도 키쿠치 가문의 충신일 너희들에게 지시할 것이 있다. 다른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선택을 하더라도 좋다. 그러나 지금만은 내 아들과 동생을 데리고 살아남아라. 일단 살아남고 그다음에 명예롭게 죽을 곳을 찾아라. 키쿠치 가문 가독으로서 하는 최후의 지시다."

* * *

한참 뒤. 해 질 녘.

키쿠치 성 앞 시가지.

"병력이 없어도 너무 없군. 설마 화재로 다 죽은 것은 아닐 것이고, 남은 놈들 전술도 보아하니 설마……."

양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토벽 너머로 진입한 조선군을 맞이한 것은 거의 다 불탄 건물과 시체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건물들 틈새에서 화살을 쏘기도 하고 칼을 뽑아 들고 기습하기도 하며 최대한 전진을 막으려는 무사들이었다.

"저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양녕이 키쿠치 성 방향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화려한 갑옷을 차려입고, 등 뒤에는 매 깃털 두 개가 나란히 있는 가문 문장 깃발을 매단 카네토모가 걸어오다 멈추어 서 있었다.

"고생 많았다."

조금 전 조선군의 총에 맞고 건물 벽에 기대어 죽어 가던 무사를 내려다보며 카네토모가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토노께서…… 나오신 것을 보니 도련님과…… 다른 이들이 무사히 피한 모양입니다."

숨이 차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헐떡인 무사가 이어서 말했다.

"시간을 번다는 마지막 임무를 무사 달성해서 기쁩……."

거기까지 말하고 무사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말해도 기어코 남아서 시간을 벌겠다던 너희 덕분에 다들 무사히 탈출했다. 고맙다. 편히 잠들거라."

무사에게 합장한 카네토모가 다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양녕 또한 앞으로 나갔다. 100보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선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양녕이었다.

"나는 조선의 왕자이자 축자국의 후작, 정동군 도원수인 양녕대군이다. 그 깃발을 보아하니 네가 키쿠치 카네토모겠군. 이렇게 혼자 나오다니, 설마 다른 이들은 다 탈출시킨 거냐?"

"그렇다. 너희가 붙잡고 싶어 했을 내 아들과 동생은 물론이고 많은 무사들이 탈출했다."

"사방에 기병을 풀어 감시했는데 용케도 빠져나갔구나."

"하하하! 우리가 대를 이어 여기 산 세월이 얼마인데, 오늘 처음 온 너희들에게 붙잡히면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도 없지 않겠느냐?"

호쾌하게 웃으며 말하는 카네토모를 보고 양녕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야 그렇지. 마침 해까지 지고 있으니 이제 와서 수색해 봤자 더 어렵겠지. 보나 마나 식량도 충분히 챙겨 갔을 것이고, 퇴각한 기병들이 합류했으면 속도도 빠를 테니 더더욱 말이다."

"물론이다."

"그래도 너무 기뻐하지는 마라. 어떻게 보냈을지는 몰라도 어디로 보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양녕의 말에 카네토모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짐작이 간다고?"

"그래. 갈 곳이라고 해 봐야 남쪽의 우토 지역 아니면 동쪽 분고 지역이겠지. 네 아들은 우토 지역으로 갔을 것이다. 우토 지역의 호족인 우토 가문은 너희 키쿠치의 분가이기도 하고, 가는 길도 거의 평야니, 어린 후계자인 네 아들이 달아나기에도, 가서 보호받기에도 적합하지."

진지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듣는 카네토모를 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나머지 기병들은 아마 분고로 갔을 것이다. 우토 지역은 그 많은 군마를 먹일 만큼 풍족하지 않아. 큐슈의 아홉 지역 중 가장 소출이 많은 분고로 보내면 키쿠치 가문의 기병을 탐내기도 하고 먹일 능력도 되는 오토모 가문이 반길 거란 계산이겠지."

"정확하게 맞췄다. 역시 소문대로 대단하구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내가 아들을 오토모 가문에 보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한데, 정말로 오토모 놈들이 너희하고 내통했느냐?"

잠시 고민하던 양녕이 대답했다.

"어차피 달아난 기병들이 가 보면 알게 될 테니 너에게도 알려 주마. 아니. 그건 우리 이간계였다. 큐슈의 슈고 그 누구도 우리와 내통한 자는 없다."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갈 것을 대비해 오우치 가문까지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우리 기병들이 아니라 치카아키 놈에게 다행이야. 가서 우리가 이간계에 넘어간 것이면 합류하고, 정말로 배반한 것이었다면 합류하는 척하다 틈을 타서 치카아키 놈의 목을 베어 버리라 말해 두었거든."

그 말에 양녕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자, 그럼 나도 묻겠다. 이 성에는 그럼 이제 무사는 너뿐이고, 너는 죽음을 각오하고 남은 것이냐?"

"그렇다. 명예롭게 죽을 사람은 적을수록 좋고, 살아남아 그 명예를 전할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느냐?"

"어느 놈들하고는 다르구나. 하나 더 묻겠다. 너희 조상들이 고려와 명나라를 해적질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적질이 악업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조상이 악업을 지었다고 후손이 제 입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대답을 들은 양녕이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하구나. 충효라는 것을 이만큼 이해한 왜인은 처음 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조선을 위해 일하게 하고 싶으나, 그럴 생각이 없으니 이렇게 나온 것이겠지."

"알아주니 다행이다."

카네토모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말했다.

"마지막 부탁이 있다. 이 성에 무사들은 남지 않았지만 키쿠치 가문을 따르던 식솔들은 저택 안쪽에 피신시켜두었다. 전투 중에 타지 않은 군량고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아마 거기 있는 식량이면 식솔들이 겨우내 먹을 양은 충분할 것이야. 그것을 받는 대신 식솔들은 해치지 말아주겠나?"

"알겠다. 반드시 그리하겠다 약조하마. 그러면 더 남길 말이 있느냐?"

양녕이 말하며 손짓하자 포수 하나가 총을 들어 카네토모를 겨누었다. 카네토모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초연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옥도 기와도, 깨어지면 결국엔 모래인 것을……."

양녕의 손짓에 고요하던 키쿠치 성에서 총성이 울렸다. 뒤로 쓰러져 땅을 피로 적시는 카네토모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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