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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50화 (5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50화

50화

최만리의 자기소개를 듣고 잠시 멈칫했던 양녕이 모르는 척 물었다.

"최씨라면 해동공자의 후손인가?"

"네, 맞습니다."

"서신에는 없지만, 어쩐지 주상께서는 자네를 성균관에 두고 쓰시고 싶어하셨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김홍빈으로 살며 익혔던 지식으로 장난치듯 던진 양녕의 말에 최만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처음에 이조에서 정한 곳은 성균관이었다가 주상께서 대군을 보필하라며 보내셨습니다. 부담을 느끼실 수 있으니 먼저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도 하셨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그럴 것 같았네."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양녕을 보는 최만리의 눈이 더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 인사할 때도 해동의 오 태백이라며 칭송했는데, 얼굴만 보고도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모습에 더 대단하다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최만리의 모습을 보며 양녕도 흥미가 동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일평생 성균관에서만 일해온 고지식한 탁상물림으로 기억된 원래 역사의 최만리가 아니라, 소문으로만 듣던 대단한 인물을 처음 만나 눈을 빛내는 순수한 20대 청년 최만리였다.

"자네는 사람이 교육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공자께서 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는 없다고 하신 말씀은 지극히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다르니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 역사의 행적을 아는 양녕은 슬쩍 그를 떠보기 위해 물어본 것이었지만, 뭔가 심오한 질문이라 생각한 최만리는 심사숙고해서 대답했다.

"좋네. 기왕에 첫 발령으로 이리 먼 곳까지 왔으니,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환경을 접해 보게. 자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지켜보고 싶어졌어."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최만리가 옆에서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던 다른 문관의 눈짓을 받고는 말했다.

"주상 전하께서 대군께 보내신 것이 있는데, 여기서 드릴 물건은 아닙니다."

"좋네. 마침 석성진 관아를 새로 지었으니 거기 가서 받도록 하지. 가는 길에 석성진 소개도 간단히 하고 말이야. 오늘 온 다른 문신들도 다 따라오게나. 정동군단장과 세 사단장도 일은 잠시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같이 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예, 대군."

대화를 마친 양녕이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서는 병사 몇이 호위하면서 앞서가고 뒤에는 장수들과 문관들이 따라오는 가운데, 양녕이 대각선 뒤에서 따라오는 최만리에게 석성진의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두가 있는 이곳이 석성진 외성이네. 서쪽의 냉천만, 동쪽의 비혜강, 남쪽에 새로 판 해자와 토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지. 지금은 정동군 주둔지로 쓰지만, 나중에 정벌이 끝나고 고을이 생기면 민가들이 들어설 것이야."

계속 걸어가며 이번에는 앞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석축 위에 보이는 게 중성, 그 너머 바다 쪽에 있는 것이 내성이네. 저 석축이 꼭 성과 같다 해서 왜인들이 석성이라 부르던 것을 따와 석성진이라 지은 것인데, 이제 주상께서 문관들을 보내주셨으니 그 이름도 바꿔야겠군."

군현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최만리가 생각났다는 듯 양녕에게 말했다.

"사실 주상 전하께서 직접 말로 전해 드리라고 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중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서신에 안 적으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뭔데 그러는가?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면 지금 말해 주게나."

"지금 대군께서 쓰신 군현제 개편안을 어떻게 시행할지를 두고 전하와 중신들이 수시로 회의를 하신다 합니다."

"군현제 개편안이라면 도를 없애고 전국을 부로 나누는 그것 말이로군. 그런데?"

"지금 계수관을 기준으로 부를 나누는 것은 일치를 보았으나, 그다음에 어려움이 있어서 대군께 도움을 청한다 하셨습니다."

도는 크기가 너무 커 관찰사가 모든 고을을 다 통제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큰 고을이 인근 작은 고을까지 관리하며 관찰사와 고을들을 중계하도록 한 것이 계수관이었다.

경상도를 예시로 보면 이름의 유래가 된 경주와 상주에 더해서 안동과 진주의 네 계수관이 있는 식이었다.

"계수관 자체가 이미 주변 지역을 하나로 모아 관리하는 역할이었으니 계수관과 그 관할 고을들로 부를 만들면 크게 바꿔야 할 것도 별로 없고 괜찮겠군. 그런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각 부의 수도인 수부는 그 군현을 목으로 한다 하셨고, 목이면 고을 이름이 주로 끝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나라에서 주를 다스리던 자사를 주목이라고도 했던 것을 따와서 군현 단위로 쓰는 것이니 주가 들어가야 하지."

"거기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함길도 계수관에 길주가 있는데, 경기도 계수관 중 부평의 다른 이름 가운데 주가 들어가는 것도 길주입니다. 또 경상도 계수관 중 안동도 주가 들어가는 다른 이름은 길주입니다. 발음만 같아도 헷갈릴 텐데 심지어 한자까지 같습니다. 그냥 진행했다가는 길주목을 수부로 둔 길주부만 조선에 세 개가 될 판입니다."

과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양녕에게 최만리가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계수관 아닌 곳을 수부로 삼으면 계수관 기준으로 쪼개는 의미가 없고, 새로 이름을 짓자니 익숙하지 않아 혼란이 오는 문제가 있어서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런데 도움을 구하시는 것이면 서신에 적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말로 하라고 하신 성심을 모르겠습니다."

최만리의 말을 다 들은 양녕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주상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네. 해결책도 알겠고."

"무엇입니까?"

"관아에 가서 알려 주겠네."

양녕이 알았다면서도 대답을 뒤로 미루자 최만리는 의아해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겠거니 하고 납득했다.

* * *

잠시 후.

석성진 내성 북부.

"다 왔네. 여기가 석성진 관아 겸 구주도 정벌 동안 정동군 지휘소로 쓰일 곳이야."

양녕의 소개에 최만리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엄있게 서 있는 큰 누문 좌우로 행랑이 쭉 이어져 있었다.

"꼭 조선의 큰 관아 입구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처음 보는 양식입니다. 새로 지으신 것입니까?"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나. 사당 입구로 쓰이던 것을 옮겨 온 것이야."

양녕과 함께 누문을 지나 관아에 들어선 최만리가 앞에 보이는 신기한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서쪽에 있는 저것이 객사고, 동쪽에 있는 저것은…… 동헌(집무실)입니까?"

"특이하지?"

최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객사와 동헌 둘 다 여러 양식으로 된 건물들이 서로 합쳐져도 있고 회랑으로 이어져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 제각각으로 생긴 와중에 지붕만은 다 얇은 나무판으로 이은 것이 똑같아 그게 또 신기합니다.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눈을 떼지 못하며 말하는 최만리에게 양녕이 대답했다.

"전부 다 철폐한 사당에서 옮겨 온 본전 건물들이네. 객사는 주상께서 계신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곳이니 제일 좋고 넓은 건물 셋을 이어 만들고, 나머지 건물들을 이어 동헌과 내아(관사)를 만들었네. 어차피 주로 나 혼자 쓰는 곳이니 생긴 건 좀 어수선해도 되니 말일세."

"내부가 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여러 건물을 통로로 잇고, 벽을 헐어서 이어 붙이고 해서 회의를 할 만큼은 키웠네. 또 원래 왜인들은 사당 지붕에 기와를 올리지 않고 편백나무 껍질을 켜켜이 쌓아 이은 것을 최상으로 치는데, 그걸 그대로 옮겨오자니 잇는 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고 시간만 걸릴 것 같아서 포기했네. 대신 안 쓰는 편백나무 기둥을 얇게 켜서 지붕을 이었지. 실제로 왜인들은 저렇게 지붕을 잇기도 한다는군."

"대군께서는 이미 부상백으로 책봉되셨으니 이곳은 관아이기도 하지만 백작궁이기도 합니다. 더 위엄을 갖추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최만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양녕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지내면 오히려 주상께 누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어차피 어지간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정문이야. 그래서 정문은 위엄 있는 누문을 옮겨다 짓지 않았는가. 나머지는 이대로 쓰다가 나중에 건물이 많이 상하면 그때 새로 번듯하게 지어도 충분해."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위엄은 건물이 아니라 제대로 된 통치에서 나오는 것이야. 옳은 길로 간다면 싸리 담을 두른 초가집에 앉아서도 다스릴 수 있네."

양녕의 말에 감동한 최만리의 눈이 또 빛나기 시작했다.

* * *

동헌의 중심이 되는 본건물에 들어서자 최만리는 물론이고 다른 문관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당을 옮겨온 것이라 그런지 내부 구조도 독특하군요."

나무 부재에 장식용으로 박혀있던 구리 철물들은 조선으로 보내기 위해 전부 뽑아서, 철물이 붙어있던 자리만 주변하고 색이 다른 것이 오히려 더 장식처럼 보였다. 본건물 중앙 안쪽에는 다른 곳보다 한 자 정도 높게 만들어진 단이 있고 그 좌우에는 난간이 있었다. 회의 때 양녕이 앉을 법한 상석이었지만, 거기 있는 것은 맨바닥도 의자도 아니었다.

"저건 무엇입니까?"

최만리가 단 위의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무로 된 큰 상자였는데, 상자 옆에 붙어서 내려오는 긴 다리가 몇 개 있어서 밑면이 바닥에서 떠 있었다. 겉에는 옻칠을 해서 검게 빛나고, 위에는 술 달린 비단으로 덮어서 엄숙하면서도 화려함이 있었다.

"당궤(카라비츠)라는 왜국 가구일세. 습한 지역이라 바닥에 닿지 않게 저렇게 다리를 달아 띄운 모양을 하고 있다네. 저건 하치만궁에서 신이 깃들었다는 청동 거울이며 귀한 것들을 담아 모셔 놓던 일종의 신줏단지로 쓰이던 것이야."

"그런데 그게 왜 저기 있습니까?"

"의자로 쓰려고 한다네."

의아한 표정이 된 최만리를 보고 피식 웃은 양녕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도착했으니 주상께서 보내신 것을 받아야겠군. 바닥에 놓고 받을 수 없으니 상을 가져다주시오."

양녕의 말에 장수들이 방 한쪽에서 허리 높이까지 오는 상을 가져와 당궤가 올라가 있는 단 앞에 놓았다. 장식 없이 옆으로 긴 상판에, 높은 다리가 왼쪽에 넷, 오른쪽에 넷 달려있어서 팔족대라 불리는 왜국 가구였다. 역시 사당에서 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올리는 용도였다.

문관들이 그 위에 저마다 가져온 것을 올려놓고 옆으로 물러가자 최만리가 다가가 서류함 하나의 봉인을 뜯고 서류를 꺼냈다. 뒤돌아 서류를 들어 올린 최만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군께 내리는 주상 전하의 왕지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옷을 가다듬고, 양녕의 왼쪽으로는 문관들이, 오른쪽으로는 장수들이 바닥에 앉아 최만리가 들고 있는 왕지를 향해 조아렸다. 이윽고 왕지를 향해 네 번 절한 양녕도 바닥에 앉아 조아리자 최만리가 왕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일전에 오 태백의 전례에 따라 부상을 봉토로 하여 백작에 봉한 바 있으나, 내가 거듭 생각하여 보니 부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여러 섬을 가리키는 모호한 이름이라 봉토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고, 구주도 전체를 다스릴 작위로 백작은 낮다 판단하였다. 이에 양녕대군 이제를 부상백에서 축자후로 높여 봉한다."

애초에 모호한 봉토 이름에 중간 작위인 부상백으로 봉해진 것은 구주 정벌이 잘 안 풀렸을 때 대마도만 가지고도 양녕이 권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걸 구주도를 가리키는 이름인 축자로 명확히 하고 후작으로 올렸다는 것은, 이도와 조정 신하들이 보기에 이제 정동군이 구주도 정벌에 성공할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와서 도장을 받으십시오."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는 동안, 최만리는 가오리 가죽으로 감싸고 붉게 옻칠한 화려한 도장함에서 비단에 싸인 도장을 꺼냈다. 두 손으로 받아 비단을 풀고 도장을 본 양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도, 재질이 은이어서도 아니었다. 인뉴(도장 손잡이)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양녕은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최만리에게 대답하며 생각했다.

이전에 부상국백지인을 내렸을 때 같이 받은 문서에 국왕행보가 찍혀있긴 했으나 그것만으로 인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어렴풋하게 원래 역사에서 조선 임금들이 썼던 도장들처럼 명 황제의 용보다 낮춘 제후국의 거북이 인뉴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양녕에게 내린 도장의 인뉴가 거북이라면, 이도가 원래 역사보다도 10년 일찍 만든 국왕행보와 국왕신보 두 도장의 인뉴가 무엇일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상을 위로 옮겨 주시오."

양녕이 그렇게 말하며 도장을 들고 단에 올라가 당궤 위에 앉자 장수들이 팔족대를 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 위에 비단을 펴고 도장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양녕은 동서로 나뉘어 바닥에 앉은 문관과 장수들, 그리고 단 아래에 서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승상 최만리를 천천히 돌아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제후의 궁궐도 생겼고, 봉토의 이름도 새로워졌고, 나를 보좌할 승상과 문관들도 왔소."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정동군 도원수인 나 양녕대군이 축자국의 후작으로서 통치를 시작하겠소. 승상과 문관들은 축자국을 꾸려가는 것을 도와주시고, 장수들은 내가 다스려 마땅한 봉토인 축자국의 땅을 얻는 것을 도와주시오."

"예!"

힘찬 대답이 동헌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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