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9화
49화
1419년 10월 하순 모일.
구주도 석성진.
화재의 흔적이 정리된 석성진은 말끔한 부지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양녕은 석성진을 조선이 구주도를 경영하는 거점이 되도록 새롭게 만들어나갈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도가 필요했고, 병사들의 측거 사용 연습을 겸해, 사방에서 측량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자를 온전히 믿으십니까?"
양녕과 함께 석성진 여기저기를 다니며 부지 정비와 측량을 시찰하던 최윤덕이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최윤덕이 말한 이가 이전에 협상했던 오우치 모리하루를 두고 하는 소리임을 읽어 낸 양녕이 말했다.
"불신할 이유는 없으나, 적이 아니라 해도 아군 아닌 자를 온전히 믿어서는 안 되는 법 아니겠소. 다만 그자의 속내가 어떻건 간에 지금은 거짓 정보를 퍼뜨릴 것은 확실하오."
"그렇습니까?"
"우리가 구주도를 정복하는 것을 도우려는 게 아니라 기회를 봐서 정동군을 몰아낼 생각이라면 정동군이 약해져야 할 것이오. 그러려면 우리가 최대한 남조 세력과 싸워서 서로 전력을 깎아 먹어야 할 것이니 정동군이 키쿠치와 오토모 두 세력과 모두 싸우기를 바랄 것이오."
"하긴, 그렇게 몰아내고 난 다음 조정에서 추궁하면 조선 편에 붙은 것은 남조까지 한 번에 소탕하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주장하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최대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싸워야겠군요."
"그렇소. 설령 그자가 조정과 우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라고 해도, 우리가 병력을 온존한 상태로 큐슈를 장악해 버리면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 상황에서도 줄타기를 하다가는 정동군의 다음 목표가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디를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동쪽 풍후의 오토모씨를 먼저 공격한다면 풍전의 오우치 가문은 협상 담당이니 병력을 보내 같이 싸울 필요는 없더라도, 다른 형태로라도 오토모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오."
"그럼 우선 남쪽 비후를 치실 생각이시로군요."
"그렇소. 비후의 키쿠치 가문을 멸망시킨 다음 풍전과 풍후에 동시에 공세를 가하는 것처럼 위장해서 풍후를 공격하면, 오우치 가문이 오토모 가문에게 딱히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자기 영지를 방어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하면 되니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오."
"시기는 언제쯤으로 계획하십니까?"
"추수가 끝나면 농민들까지 끌어모아 전력에 큰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병력을 불릴 수도 있고, 시간을 너무 끌면 이간계가 발각당하는 것은 물론 목책을 쌓는 등 방어준비를 갖출 수도 있으니 늦어도 11월 초순 내로는 쳐야 할 것이오."
"생각보다 촉박하군요. 적 병력까지 많으면 까다롭겠습니다."
그 말에 양녕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시기는 전국시대 돌입 이후의 경쟁적인 농지확보가 시작되기 전이었고, 비후 지역 역시 축자해(아리아케해)를 면한 해안이 간척되기 전이다.
원래 역사의 21세기 지도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반이 안정적인 곳에 노반을 깐 큐슈 신칸센 선로 바깥의 해안지대는 전부 바다나 뻘밭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비후라고 농지가 많은 것은 아니니 상륙전에서 싸웠던 쇼니군과 시부카와군을 합친 정도일 거라 생각하오.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이오. 이들은 서로 반목하던 그 둘과 달리 한 세력 아래 뭉쳐 있으니 말이오."
"지금 멸망시킨 쇼니 가문과 다르게 우리 전력을 어느 정도 아는 상태에서 싸우고, 비후 전체를 단일 세력으로 차지하고 있고, 해안가 뻘밭이나 산 사이로 난 좁은 길목 너머에서 방어전을 한다는 이점도 있군요. 쉽지 않은 싸움이니 아군 피해도 제법 나오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병력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특히나 포수들은 지금이 조선군에서 처음으로 운용되는 병과라 한 명, 한 명의 경험이 귀중하니 더더욱 보호해야 하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오자병법에서도 한 명이 열 명을, 그 열 명이 백 명을 가르치다 보면 결국 전군이 배우게 된다 하였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포수들을 잘 보호하고, 세금을 감면받으러 군에 들어온 숙련도 떨어지는 왜인 병사들도 유효하게 쓸 수 있는 전법을 생각해 봤소. 나중에 검토해 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아니면 지금 먼저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최윤덕의 말을 들은 양녕이 설명을 시작하려는 순간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군! 대군!"
"무슨 일인가?"
달려온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바로 부두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잠시 후 석성진 남쪽 부두에 도착한 양녕이 본 것은 잔뜩 입항한 배들이었다.
"오셨습니까, 대군."
"이게 다 무엇이오?"
이미 부두에 와있던 이종무가 양녕의 질문에 부두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내려지는 화물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조정에서 보낸 화약과 백린,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화포들입니다."
"저렇게나 많이 왔단 말이오?"
"몰수한 유황과 구리를 잔뜩 보내서 생산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무리해서 생산한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오. 이걸로 한동안은 걱정 없겠구려. 그건 그렇고 저들은 누구요?"
이번에 양녕이 가리킨 것은 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문관들이라 합니다. 조정에서 보냈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은 이종무에게 더 묻는 대신 직접 물어보기로 하고 문관들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알아보고 다 같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받아 준 양녕은 문관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조정에서 자네들을 보냈다고 들었다. 대표로 온 자가 있는가?"
"대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가장 경력 있어 보이는 문관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직 오지 않았다니? 이런 것은 보통 대표를 먼저 보내지 않는가?"
"그것이…… 대표로 뽑힌 자가 뱃멀미를 너무 심하게 해서 일기도에 내리자마자 앓아누웠습니다. 바로 또 배를 타면 죽을 것 같다 하여 마지막 배를 타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저런, 고생이 많군."
"대표로서 대군께 드릴 물건들은 그 마지막 배로 같이 올 것이나, 이 문서 하나는 먼저 가져왔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문관이 서류함 하나를 내밀었다. 양녕이 서류함을 열고 왕명에 절을 하려는데, 두루마리 위에 작은 쪽지가 있었다.
'왕지가 아니라 형님께 보내는 사적인 편지이니, 절하지 마시고 바로 읽으십시오.'
"주상 전하의 명이시니 따르시지요."
"허허, 알겠소. 왕지가 아니라서 대표 아닌 이들이 들고 올 수 있던 모양이구려."
옆에서 같이 상자를 보던 이종무가 농으로 던진 말에 피식 웃으며 말한 양녕이 문서를 꺼내어 펼쳤다.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편지 내용이 보이지 않는 위치로 알아서 물러나고, 양녕은 천천히 이도가 보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점령지에 새 군현의 제도를 먼저 시험해 보시겠다던 형님께서 왜 아직도 군사지역인 진만을 설치하시는가 했는데, 아무래도 장수들과 무관들에게 본업이 아닌 수령 업무까지 맡기면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 생각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궁궐에 앉아서도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낸 이도의 안목에 감탄하며 다음 내용을 읽었다.
'그래서 문관들을 보내드립니다. 조정에서도 할 일이 많아 많이 보내지는 못하였으나 새로 급제한 이들, 천거 받은 이들, 근무지를 옮길 때가 된 이들 등 출신은 다양하게 뽑았습니다. 또 여전히 걱정하는 이들이 많아 형님께서 오 태백과 같은 분이심을 열렬히 믿는 이들 위주로 보냈습니다.'
양녕은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잠시 생각했다. 여전히 양녕의 변화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폐세자가 대병력을 오랫동안 이끄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양녕이 오 태백과도 같은 이라고 열렬히 믿는 이들을 보내서 일하게 한다면, 그들은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해 양녕을 따르는 것이니 당연히 직접 반역을 주도하지도 않을 것이고, 만에 하나 양녕이 반역을 생각하더라도 실망하고 등을 돌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양녕이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기만 한다면 열과 성을 다해 일할 이들이기도 했다.
"역시 주상께서는 대단하시군."
신하들의 불안을 잠재운 이도의 솜씨에 작게 감탄한 양녕이 문서를 마저 읽어내려갔다.
'또 제가 다 임명해서 보내면 현지의 상황과도 맞지 않고, 형님의 위엄도 떨어질 것 같아 궁리해 보다가 옛 법도를 참고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뽑아서 보낼 테니, 그들을 저마다 필요한 자리에 쓰시는 것은 형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대신 그것을 총괄하는 것은 유일하게 임명해서 보낼 새 관직인 승상이 할 것입니다.'
양녕은 승상이라는 관직명에서 이도가 참고한 옛 법도라는 것이 한나라의 군국제임을 알았다.
'어떤 이를 무슨 자리에 임명하겠다고 형님께서 정하시면 승상이 건의의 형태로 조정에 보고하고, 제가 승인하여 임명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건의 중인 상태에서도 업무는 할 수 있게 정하였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시행하면서 문제점이 있으면 제게 알려 주시면 고쳐 보겠습니다.'
군국제를 토대로 지금 조선의 상황에 맞게 다듬은 것이었다. 조정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것도 아니고, 왕 아닌 자가 과거를 주관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승상을 두어 자율과 통제의 균형을 한 번에 잡았으니 조정 신료들도 이 방식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럼 그 멀미 때문에 늦는 대표가 승상인 것이로군."
"맞습니다."
"승상의 역할이 역할이니만큼 원리원칙에 철저하면서 재주도 있는 자를 보내셨겠군."
마침 서신의 다음 내용이 승상에 관한 것이었다.
'승상으로 임명해 보내는 자는 증광시 을과에 붙어 새로 관리가 된 자입니다. 경험은 적으나 일은 잘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읽은 양녕이 눈을 크게 떴다. 증광시면 즉위를 기념하여 열리는 특별 과거 시험이니 올해 갓 붙은 것이었다. 갑과 다음인 을과에 붙었으니 33명 중에서 4등과 10등 사이고 정8품으로 시작하는데, 아무리 점령지에서 처음 시행해 보는 관직이라고는 하나 승상이라는 이름을 단 자리에 과거에 붙자마자 올 정도라면 시험 보는 실력은 조금 뒤처지더라도 실무능력은 뛰어난 자일 것이었다.
"음?"
본문은 거기서 끝났지만, 뒤에 내용이 더 있었다.
'왜인들은 불교를 믿는 자들이 많아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농사지을 소만 키우고 돼지는 키우지 않는다 하니 한동안 고기를 구경도 하지 못하셨을 것 아닙니까. 남쪽이라고 하나 겨울은 추울 텐데 몸이 허하면 힘드실까하여 돼지 몇 마리 보냅니다. 몇 마리는 바로 잡으시고 나머지는 새끼를 낳게 해 불리셔서 꾸준히 고기를 드십시오.'
걱정하는 마음을 서신 너머로 느낀 양녕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다시 말아 서류함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대군. 서신을 다 읽으셨으면 저쪽을 보시지요. 마지막 배가 온 모양입니다."
이종무의 말에 양녕이 부두를 보자 새로 도착한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다들 싣고 온 물건들을 분주하게 내리는 가운데, 짐은 들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저자가 승상으로 온 자인 모양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창백한 문관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가오는 것을 걱정스럽게 보던 양녕은 문관이 절을 하려고 자세를 잡자마자 놀라서 말리며 말했다.
"아니, 괜찮네. 자네가 주상께서 승상으로 임명하신 자인가? 괜찮으니 절은 생략하게."
"하오나……."
"자네가 절하다 드러누우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러네. 예법이 사람에 우선하지 않음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마침 병사 하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 와 문관에게 주었다.
"우선 물 좀 마시게."
"감사합니다, 대군……."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을 마신 문관은 텅 빈 바가지를 병사에게 다시 주고는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이윽고 안색이 좀 나아진 문관이 양녕을 향해 똑바로 서고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말했다.
"주상 전하의 큰 은덕으로 갓 관리가 된 자가 해동의 오 태백을 가까이서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최만리라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