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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8화 (4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8화

48화

1419년 10월 하순 모일.

히고노쿠니. 키쿠치성.

산 아래, 강과 구릉에 둘러싸인 키쿠치성 중앙의 저택에서는 히고 지역의 슈고인 키쿠치 카네토모가 한 사내를 앞에 두고 서신을 읽고 있었다.

"조선은 여전히 싸울 생각이라는 얘기로군."

"예. 조정에서도 당장은 군사를 보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랫자리에 앉아 카네토모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며칠 전 협상장에서 모리하루와 함께 천막에 들어갔던 무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건 괜찮네. 조정에서 큐슈를 통째로 조선에게 주고 항복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버텨 볼 수 있어. 그런데 군사를 보내기 어렵다는 내용은 서신에 없는데?"

"상황이 흉흉하니 만약에라도 중간에 누군가에게 잡힐 때를 대비해서 서신에는 별것 아닌 내용만 적었으니, 나머지는 외워서 가라는 주군의 명이 있었습니다."

"들려주겠나?"

카네토모의 무미건조한 시선을 받은 무사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협상 천막에 따라 들어오게 한 것도,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도 주군이 자신을 신뢰한 것이니,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치쿠고가 전투 한번 없이 조선군에 넘어간 것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물론이네. 덕분에 우리는 순식간에 조선군 세력과 맞닿게 되었지."

"오토모 가문이 치쿠고를 조선에 넘겨주고 결탁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오토모 가문이면, 치카… 아니, 분고의 슈고가 조선과 결탁했다고?"

오토모 치카아키를 이름으로 부르려다 황급히 고쳐 말하는 것을 들은 무사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의심의 씨앗은 있어 보이니 키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예. 조정이 조선을 끌어들여 남조 충신들을 모조리 없애려고 하는데, 그 대상 중 하나로 지목된 오토모 가문이 치쿠고를 바쳐 조선을 돕는 대가로 조정으로 옮겨 타려 한다는 소문입니다."

오우치 가문이 조정에게 토사구팽당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덕에, 조정에 부정적인 소문을 오우치 가문에서 전달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하긴 북조 조정은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고, 오토모도 남북조에 줄을 다 대겠다며 가문까지 쪼갰던 줏대 없는 이들이니 그럴 수 있지. 확실한 내용인가?"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혹시라도 오토모 가문이 조선과 짜고 함정을 팔 수 있으니 토노께서도 알아 두시고 조심하셔서 나쁠 건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다급한 와중에도 알려 줘서 고맙다고 전해 드리게나."

말을 마친 카네토모가 작은 목소리로 '그놈들이 역시'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무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 *

같은 시각.

분고노쿠니, 오토모 저택.

분고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호족들을 철저히 지배하는 위세를 과시라도 하듯, 성이 아니라 저택으로 지어진 오토모 가문의 거점에서도 오토모 치카아키와 독대하는 무사가 있었다.

"그러면 키쿠치 가문이 조선군에게 공격받는 쇼니 가문을 돕지 않은 건 의심해서가 아니라는 말인가?"

"예. 쇼니와 키쿠치 두 가문 다 조선과 결탁했고, 쇼니 미츠사다는 싸우는 척하면서 조선군에 합류하러 간 것이니 굳이 도우러 갈 필요가 없었다는 소문입니다."

"미츠사다와 그 아들이 조선군에 잡히고 바로 항복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런 소문도 있었군."

"아무래도 돌아온 자가 없으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로 싸웠으면 한두 명이라도 살아 돌아왔을 텐데 아무도 안 돌아온 것은 싸우지 않고 통째로 저쪽에 넘어갔을 것이라는 의심이지요."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쇼니하고 키쿠치가 조선에 붙어서 얻을 이득이 있는가?"

상대가 적당히 넘어온 것을 보고 살짝 과장되게 주변을 살핀 무사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남조가 다시 미카도의 자리를 차지하려 조선까지 끌어들여서 큰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그러니 토노께서도 괜한 오해를 사지 않게 조심하셔야 할 것이라는 주군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남조와 반란이라는 두 단어에 치카아키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아직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식적인 행보를 보인 적은 없지만, 북조 편이었던 숙부에게 슈고를 물려받았을 뿐 자신은 그 전 슈고인 부친을 따라 남조에 충성하려던 치카아키였다.

"그런데 소식은 고맙네만……. 자네 주군이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이유가 있는가?"

왜 상경까지 해서 열심히 북조 조정과 연줄을 만들던 모리하루가 남조를 지지하는 자신에게 남조 반란에 엮이지 않게 주의하라고 알려주냐는 내용을 빙빙 돌려서 묻는 치카아키의 질문에, 무사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이유라니요? 오토모 가문에서는 이미 토노의 숙부 대에 기울어가는 남조를 버리고 조정에 귀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같은 조정을 섬기는데 선대의 일로 괜한 오해를 받지 않게 조언해 드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 뭐, 그렇지. 고맙다고 전해드리게."

차마 귀순한 게 맞다 하지도 못하고, 역모 소문이 도는데 여전히 남조 편이라고 하지도 못한 치카아키가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며 무사는 웃음을 꾹 참았다.

* * *

같은 시각.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집무실 상석에 앉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결국 결렬되었단 말이오? 츠시마와 이키 두 섬을 조선이 통치해도 된다는 것. 해적들이 설치면 조선이 와서 직접 공격하고 잡아가도 뭐라 하지 않겠다는 것. 이 두 조건 정도면 큐슈에서 나가줄 만하지 않소?"

며칠 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요시모치였지만, 이미 익숙해진 모리하루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이미 완전히 점령한 두 섬인데, 주는 것도 아니고 가지기는 일본이 가지되 다스리기만 조선이 하라는 조건이 먹히겠습니까? 그리고 해적을 단속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잡으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요. 지금 조선이 직접 잡으러 와서 이 난리가 난 것이지 않습니까."

이거면 충분할 것이라고 자신이 우겨서 정했던 두 협상 조건이 퇴짜 맞고 돌아온 다음이니 고집을 꺾을 법도 했지만 요시모치는 여전했다.

"그렇지만 그 두 섬은 고사기에도 나올 정도로 유서 깊은 섬인데 쉽게 넘겨줄 수도 없고, 지금 우리가 해적들을 단속할 상황도 아니지 않소."

그래도 자기가 맞다고 하는 요시모치의 말에 대답하기도 포기한 모리하루가 자기 뒷목을 한번 만지고는 대화를 돌렸다.

"어찌 되었건 그 조건은 다 거부한다 하였습니다. 큐슈를 모두 점령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목표이고, 협상은 한 번만 더 하겠다 합니다. 만일 다음 협상에서도 이상한 소리를 해서 결렬되면 그때는 조롱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큐슈를 점령한 다음 혼슈까지 진격하겠다 합니다."

자기가 제시한 조건을 보고 이상한 소리라 하는 말에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양녕의 말을 전달하는 것뿐이라 차마 그러지는 못한 요시모치는 대신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협상이라는 것이 이쪽에서 뭘 해 줄 테니 그쪽에서는 뭘 해 달라 하며 맞춰 가는 것 아니오? 결국 큐슈 전부를 다 얻어야겠다고 할 거면서 조선의 왕자는 대체 무슨 협상을 원한다는 것이오?"

"조정에서 큐슈를 넘긴다는 결정을 내리면, 슈고들이 큐슈를 떠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조정의 뜻에 거스른 독자 행동이라 간주해서 조정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합니다."

"결국 빨리 항복하라는 소리를 하려고 협상 담당을 지목까지 해서 불렀단 말이오?"

모리하루가 일부러 주위를 슬쩍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밀히 전하라 한 것이 있었습니다. 큐슈를 순순히 넘겨준다면 일을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인 해적들은 전부 남조 추종 세력들이고, 그 지시도 남조에서 한 것이라 자백받았다는 내용을 서신에 포함해 보내 주겠다 합니다."

"남조에서 세를 회복하려 큐슈의 추종 세력들에게 해적질을 해오라 시켰고, 참다못한 조선이 직접 왔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남조 탓으로 돌릴 수 있게는 되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요시모치가 다시 말했다.

"큐슈를 잃고 남조를 잡는 것은 우리가 손해요. 남조는 이미 약해졌으니 곧 쇠퇴할 것이고, 남조 탓으로 돌려서 유지할 권위보다 큐슈를 잃어서 떨어질 권위가 더 크오."

만에 하나라도 요시모치가 여기서 선뜻 항복해 버리면 양녕과 짜놓은 모든 판이 어그러질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자기 자리보전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요시모치가 그 조건을 받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조선의 왕자가 보낸 항복 권고에 이미 큐슈의 슈고들이 해적질했다는 내용이 있소. 큐슈에서 배 좀 탄다 하는 슈고들이 다 남조 세력인 것은 일본 땅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조선에게 다시 확인받을 필요가 없소."

"물론입니다. 그런 조건을 받을 이유가 없지요."

모리하루가 맞장구를 쳐주자 요시모치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낙관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좋은 생각이 났소. 우리가 조선군을 큐슈에서 몰아내고, 남조와 그 잔당이 이 위기를 만들었던 것이라 하여 책임을 지우고 쓸어버리면 그야말로 완벽한 상황이 될 것이오. 그러려면 조선군을 잘 파악해야겠지. 그래, 직접 가서 본 조선군은 어땠소?"

모리하루가 침을 삼켰다. 협상하러 가서 조선군의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는 것은 요시모치가 비밀리에 내린 지시였다. 이 상황을 잘 넘겨야만 했다.

다행히 양녕이 자신보다는 모리하루가 쇼군의 성격을 잘 알 테니 방향만 정해 주겠다며 당부한 것이 있었다. 그 내용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공이 본 우리의 상황 자체를 속이려 하지 마시오. 만일 쇼군이 공을 믿지 않아 사람을 심어 두었다면 쉽게 탄로 날 것이고, 그러면 공이 위험해지오. 본 것을 그대로 전하되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도록 만드시오.'

"양쪽 세력이 만나는 곳에서 협상을 한 탓에 조선군 본진은 살피지 못했습니다. 다만 데려온 병사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과시를 할 것이었으면 병력이 많은 것을 보여 기를 죽이려 했을 것인데, 아닌 것을 보면 점령지가 넓어 병력이 흩어진 탓에 많이 못 데려온 것 같습니다."

"그 신무기라는 것은 어땠소? 손에 들고 쏘는 대포 말이오."

"들고 있는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습니다. 우리 눈에 띄는 것을 꺼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쓰라고 보내서 여유가 없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건 강력한 무기임은 맞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요시모치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 생각하시오?"

정말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모리하루는 다시 양녕의 당부를 떠올리며 말했다.

'해석이 틀린 것도 나중에 가면 밝혀질 것이오. 하지만 본 것을 속인 것은 명백한 고의지만, 해석을 틀린 것은 실수일 수 있고,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부젠을 잃었을 테니 실수의 대가도 치른 셈이오. 어차피 비밀리에 전달하는 것이니 쇼군도 더 추궁은 못 할 것이오.'

"적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고압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태로운 부분이 있어서 허세로 협상해 이기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선군은 바다를 건너온 군대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고, 화약이나 불화살도 무한정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로는 대단하게 떠들지만, 지금까지 겨우 큐슈의 일부만 얻지 않았습니까."

모리하루로선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한 것이 잘 먹혔는지 다행히 요시모치는 납득한 듯했다.

"그 말이 맞소. 저들이 말한 협상 기회라는 게 한 번은 남았으니 너무 오래 끌지만 않으면 공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오. 다른 슈고들을 쳐봤자 어차피 거의 다 남조 세력이니, 그들과 싸워서 힘이 빠진 다음 양쪽을 다 쳐서 잡으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음 협상 내용을 정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연전연승 중인 조선군을 저평가하는 것을 요시모치가 납득한 것은,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마음에 드는 얘기여서임을 눈치챈 모리하루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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