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47화 (4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7화

47화

치욕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탁자만을 노려보듯 내려다보는 모리하루에게 양녕이 말했다.

"공의 아버지께서 남조에서 북조로 귀순하고 키쿠치 가문과 치열하게 싸운 공로로 세 지역의 슈고로 임명된 것이 오우치 가문 부흥의 시작이었을 것이오. 그 뒤를 이은 공의 형의 대에 부젠을 얻고, 반란을 일으킨 야마나 가문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야마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두 땅까지 얻어 6국슈고가 되었을 것이고."

"엄청나게 정확하게 알고 있으시오. 맞소. 전국 66주 중에 11개 지역을 가져 6분의 1슈고라 불릴 정도로 강성했던 야마나 가문이오. 우리가 후방에서 같이 치지 않았다면 난을 진압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런데도 요시미츠 그놈은!"

전임 쇼군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화가 났는지 모리하루가 탁자를 가볍게 내리쳤다.

"별장을 짓는다며 노동력을 보내라 했을 때, 형님께서 무사는 창칼로 봉사하는 것이 본분이라며 정중히 거부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소. 갑자기 쇼니 가문 토벌을 명하고서는 그 싸움에서 작은형께서 전사하셨는데도 보상은커녕 위로의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소! 나중에야 들었지만 쇼니와 키쿠치 두 가문 놈들더러 형을 공격하라 은근히 부추겼다는 소문도 있었고!"

"조정에서 암살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지 않았소?"

"맞소. 그런데도 상경하라고 재촉하고, 암살을 우려하신 형님께서 상경하지 않자 영지 둘을 몰수하며 몰아붙여 형님께서 끝끝내 군대를 일으키게 만들고, 전쟁터에서 돌아가시게 만든 다음에는 영지를 둘만 남기고 모조리 빼앗아 갔소."

"빼앗은 땅은 조정을 도와 오우치 가문을 공격한 공로로 야마나 가문에게 주었다고 알고 있소. 난을 일으켰다 토벌당해 영지를 거의 잃고 몰락해 가던 야마나 가문은 그걸 토대로 다시 세력을 회복했고 말이오."

"그렇소. 조정에 대들다 토벌당해 놓고 부끄러움도 없는지 금방 조정에 꼬리를 흔든 야마나 놈들이 우리 피를 흘리고 가져갔소. 지금은 그 땅들을 기반으로 조정 세력의 최전열에서 우리를 견제하고 있고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모리하루는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양녕을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대군의 말을 듣고 깨달았소. 두 번째 어려움은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었소. 야마나 놈들은 그 강약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무너뜨려 형님의 원수를 갚아야만 하는 것이니 말이오."

"잘 생각하셨소."

"하지만 우리가 조정에 토사구팽당한 사실만으로 대군은 나를 믿으시오? 내가 대군과 손을 잡는 대신 이 내용을 조정에 알리고 충절을 지킨 공로로 세력을 회복하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오? 내가 미야코에 있던 이유도 정치적으로 어떻게 가문의 활로를 뚫어보려던 것이었는데 말이오."

이번에는 모리하루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지만 양녕은 여유롭게 한번 슬쩍 웃고는 대답했다.

"공께는 조정에 충성할 이유가 없소. 조정은 영지를 몰수해 가고 둘을 남겨준 것이 아니라, 큰형을 버리고 항복해 충성을 맹세한 공의 동생에게 그 두 영지를 보상으로 준 것이지 않소? 조정 충성파가 오우치 가문의 주도권을 잡도록 말이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 모리하루의 내면을 읽어내려는 듯 역으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양녕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모든 기반을 잃고 남의 영지인 분고까지 밀려났으면서도 배신한 동생을 격파해 죽이고, 동생의 아들이 그 뒤를 이어 맞서자 그도 격파해 죽이자 보다 못한 조정에서 토벌령을 내리지 않았소?"

친족과 전쟁터에서 싸워 죽이고 이긴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던졌지만 모리하루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양녕 또한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이었다.

"결국 적대세력을 모두 쓰러뜨리자, 마지못해 큐슈에서 쇼니와 키쿠치 두 가문에 밀리고 있는 시부카와 가문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공의 동생에게 주었던 두 지역의 슈고직을 공에게 준 것뿐이지 않소? 그런 일을 당한 공께서 조정에 충성할 것이라고 본다면 내 눈이 옹이구멍보다 못할 것이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모리하루는 다른 질문으로 받았다.

"맞소. 철천지원수인 요시미츠 놈이 죽기 전까지는 미야코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쇼군인 그 아들놈에게 내가 충성할 이유도 없지. 하지만 형과 내가 요시미츠 놈에 반기를 들었을 때 큐슈의 남조 세력들과도 힘을 합쳤던 것도 알고 있소? 내가 조정 편은 들지 않더라도 남조 세력들과 동조해 대군을 막으려 들면 어떻게 할 것이오?"

"그것도 알고 있소. 힘을 빌려 주겠다는 말만 해놓고 정작 공의 형이 거병하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결국 전사하게 만든 남조 세력들을 또 믿을 만큼 공이 어리석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답이오. 그렇다면 첫 번째 어려운 일인 식량문제는 교역으로 해결될 수 있고, 두 번째 어려운 일인 야마나 가문 토벌은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정과 남조 놈들에게도 복수해야 할 일이라 문제가 되지 않으니, 대군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나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오. 하지만."

모리하루는 다시 정면에서 양녕을 보며 계속 말했다.

"조선은 큐슈를 전부 얻은 시점에서 목적을 달성하지만, 내 이익은 그다음에나 얻어지는 것인데 대군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소. 대군께서 큐슈만 얻고 입을 닦으면 그만이지 않소. 그렇다고 대군과 약조해서 문서로 남길 수도 없는 것이, 대군께서 그 문서를 조정에 보내 버리면 그땐 정말로 적과 내통했다고 토벌당할 것 아니오?"

"그럴 이유가 없소. 공께서 토벌당하면 그 자리는 왜인 혈통인 야마나 가문이 차지할 것이 뻔하지 않소."

"굳이 삼한 혈통인 우리 가문을 이곳에 두려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오?"

"있소. 오우치 가문은 조선의 입이 될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모리하루의 표정에 언뜻 실망감이 스쳤다.

"결국은 조선과 일본 양쪽에 다 연이 있는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구려. 이해는 하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니 말이오."

"입술이 아니라 입이라 말했는데도 오해를 하시는구려. 입은 먹는 곳이기도 하고 말하는 곳이기도 하지 않소."

태연히 말하는 양녕의 모습에 모리하루의 실망감이 의문으로 바뀌었다.

"무슨 뜻이오?"

"내가 제안했던 내용대로 조선과 명나라와 교역해 얻는 이익으로 공이 부강해지는 것처럼, 조선도 일본에서 나오는 물자를 공을 통해 얻어 부강해질 것이오. 이번 원정 이후 우리가 일본 영주들에게 바로 구리를 사겠다 하면 화포를 만들어 공격할까 두려워 팔지 않을 수 있지만, 공이 동전을 만들어 교역에 쓰겠다고 산다면 꺼리는 이가 없을 것이오. 이것이 입의 먹는 곳으로의 역할이오."

"그럼 말하는 곳으로의 역할은 무엇이오?"

"우리는 앞으로도 당연히 삼한 혈통인 오우치 가문만을 협상 대상으로 삼겠다 할 것이오. 최전방에서 조정의 방패로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에게 첩보를 건네주고, 반대로 우리가 만든 거짓 첩보를 그럴싸하게 흘려 넣어 조선을 강적으로 여기게 하시오. 이것을 반복하면 일본 조정은 섣불리 큐슈를 치지 못해 우리는 안정을 얻고, 조선을 전방에서 막고 교섭하는 오우치 가문은 그 입지가 커질 것이오."

양녕의 말을 들은 모리하루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젠 하나를 잃는 대신 교역의 이익을 독점하고, 후방의 안정을 얻고, 야마나 가문과 조정, 남조에 복수할 기회를 얻는 것이로군. 만일 복수가 잘 풀리지 않더라도 조정 안에서의 입지는 커질 것이고 말이오."

"그리고 조선은 큐슈를 손에 넣고, 그 뒤로도 일본에서 물자를 쉽게 얻게 되오. 또 일본의 내막을 쉽게 알아낼 수 있고 일본 조정이 섣불리 큐슈를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어 안정을 얻을 수 있소."

양녕과 번갈아 가며 서로가 얻을 이득을 정리한 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모리하루가 말했다.

"이 정도 이익이라면 부젠을 잃더라도 괜찮은 조건이로군.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걸어볼 만하겠소. 무사라면 치욕을 갚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하니 말이오. 그런데 우리 가문에 대한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온 사람이 계획하는 것치고는 소박하지 않소?"

양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돌아섰는지 농담을 던지는 모리하루에게 양녕도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뒤에 계획한 것이 더 있는데 미리 듣겠소?"

"무엇이오?"

"공을 일국의 군주로 만들 것이오."

자칫하면 역심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것도 폐세자이자 지금 정동군 전체를 통솔하는 양녕의 입에서 나왔기에 뒤에 서있던 장수들은 기겁해서 화들짝 놀라고, 왕의 형제인 것만 알지 폐세자임은 모르는 모리하루도 그 말 자체의 위험성은 알았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막 안의 모두가 바짝 굳어 버리고 양녕만이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있기를 잠시, 그나마 정신을 차린 모리하루가 물어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요. 오토모 가문의 영지를 기반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될 것이오. 일본에서는 떨어져 나오겠지만 아예 독립적인 나라는 아니고, 조선의 제후국이 될 것이오."

역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들 안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파격적인 발언인 탓에 다들 놀람은 가시지 않았다.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라면 일본의 슈고나 조선의 봉신이나 별 차이 없지 않소?"

"차이가 있소. 지금 일본이 섬 안에서 서로 싸우느라 점점 쪼개지는 중인 것은 미야코에 있다가 오신 공께서 더 잘 아시지 않소? 쪼개져 약해지는 나라의 조정에서, 그것도 정식 지방관도 아니고 호족으로서 임시로 임명받은 것일 뿐인 슈고보다는 조선이라는 하나로 뭉쳐진 강한 나라에 정식으로 책봉을 받은 군주가 나을 것이오. 애초에 독립된 나라를 세운다고 해 봐야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인 나라가 얼마나 버티겠소?"

"일본에서 떼어 조선의 봉신으로 만들려면 삼한 혈통인 쪽이 좋긴 하겠소. 하지만 그리하면 일본 조정과는 영영 척을 지게 될 것이 자명한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모리하루의 질문에 양녕은 양손을 탁자 위에 턱하고 올리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많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것은 말해줄 수 있소. 일본을 약하게 만들고 쪼개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게 만들어 조선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오."

그 말이 끝나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으하하하하!"

모리하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 고개까지 뒤로 젖혀가며 호탕하게 웃는 그 모습에, 뒤에 서 있던 무사들조차 영문을 몰라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모리하루가 양녕을 보고 말했다.

"일본이 조선의 후방이라면, 조선의 전방은 여진족, 아니면 그 너머라는 얘기로군. 맞소?"

양녕이 대답 대신 싱긋 웃자 모리하루는 웃느라 눈 끝에 맺힌 눈물을 대강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야심으로 타오르는 눈이었다.

"일본 땅을 66개로 나눠 놓은 안에서 작은 고을 여섯 개를 얻어 6국슈고라 불리던 것이 대단하다 생각하고, 그 시절 영광을 되찾겠다는 생각만 하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소. 그에 비해 대군께서는 그야말로 대해를 헤엄치는 곤어와 같구려. 대군께서 언제 붕새가 되어 날개를 펼치실지 모르겠으나 이 오우치 모리하루, 아니 백제왕손 고성견이 한번 그 큰 뜻을 따라보겠소이다."

"좋소. 그럼 협상 타결이로군."

"협상 결렬이라 해야 하지 않겠소?"

"하하하하! 그 말이 맞소. 결렬되어야 타결이니 말이오."

모리하루의 농담에 이번에는 양녕이 호탕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럼 어떻게 결렬되었다 할지 논의해 봅시다. 협상은 결렬이지만 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말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