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046화
46화
1419년 10월 중순 모일 오전.
석성진 동북쪽 모처.
포내성 함락으로부터 얼마 뒤, 작전 회의 때 양녕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며칠 만에 오우치 모리하루가 협상 장소와 시간을 정해 서신을 보냈고, 협상 날짜가 되어 양녕이 장수들과 그 협상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다 왔습니다. 저 천막입니다."
최윤덕이 손으로 가리킨 천막은 넓은 공터 위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정동군과 오우치 가문 어디 세력권에도 속하지 않는, 두 세력이 맞닿은 지역인 카스야 인근의 평지였다.
천막 서쪽에 미리 와서 서 있는 정동군 병사들을 지나 천막 앞까지 간 양녕과 장수들이 말에서 내리자, 천막 동쪽에 서 있던 오우치군의 대열에서도 갑옷을 잘 차려입은 한 사람이 무사들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백제국 성왕의 셋째 아드님이신 임성태자의 24세손이자 스오(주방)와 나가토(장문)의 슈고인 오우치 모리하루라 하오."
10여 년 전 출가해 도유라는 법명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승려가 아닌 슈고로서 협상에 임하고자 가사가 아닌 일반 옷 위에 간단한 갑옷을 걸치고 세속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한 모리하루는 삭발한 무사로만 보였다.
"대조선국 상왕 전하의 아들이자 주상 전하의 형제이며, 정동군 도원수이자 부상백인 양녕대군이오. 생각보다는 조금 늦게 뵙게 되었구려."
양녕의 말에 모리하루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늦다니요. 대군께서 항복 권고를 보내고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났으니 생각보다 이르게 본 것이 맞지 않소?"
"미야코(교토)에 있다가 쇼군의 지시를 받고 바로 내려왔을 것이니, 스오에 있다가 쇼군의 부름을 받고 미야코에 갔다가 다시 오는 것보다는 빠른 것이 당연하지 않소. 아니면 혹시라도 일본 조정에서는 중요한 외교 협상 지시를 서면으로만 한다면야 이러나저러나 속도는 똑같겠소만."
양녕이 자연스럽게 꺼낸 말을 들은 모리하루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미야코에 있던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 모습을 본 양녕의 표정은 반대로 여유로워졌다.
"백번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으려면 상대를 잘 아는 것은 기본이지 않소. 협상이라는 것도 결국 싸움 아니겠소?"
"대군이 우리에 대해 많은 걸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소.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기선을 제압당했다 생각해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전환하려 천막에 들어가려던 모리하루를 양녕이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오?"
"천막이 그리 넓지 않으니 나는 다섯 명만 데리고 들어가겠소. 공께서도 그 정도만 데리고 들어오시오."
중요한 얘기를 할 것이니 서로 믿을 수 있는 부하들만 데리고 들어가자는 얘기를 돌려서 한 것이었다.
그 속뜻을 파악한 모리하루가 뒤를 보고 눈짓을 하자 무사 네 명만이 대열에서 나왔다.
그대로 천막에 들어간 양녕과 모리하루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고, 따라 들어온 장수들과 무사들이 그 뒤에 각자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모리하루였다.
"항복 권고 내용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내가 어디 있었는지까지 아는 걸 보니 정말로 내가 오게 의도한 것이었구려."
"그렇소. 왜인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조선에 가장 잘 알려진 삼한 혈통인 오우치 공을 지목했소. 아니, 삼한혈통 얘기를 하는 중이니 고 공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구려."
전대 오우치 가문 가독이자 모리하루의 형인 요시히로가 조선에 조상의 땅을 영지로 받고 족보와 성씨를 알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영지와 족보는 얻지 못했지만 고씨 성을 받아간 것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편한 쪽으로 부르시오. 그런데 조선에서도 결국 우리가 임성태자의 후손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하여, 백제 왕성인 부여씨를 주는 대신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여 고씨 성을 준 것은 대군께서도 아실 텐데도 우리가 백제의 왕손임을 믿는 것이오?"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기로 한 것 아니었소?"
"무슨 뜻이오?"
조금 전 기선 제압당한 뒤로 여전히 경계 중인 모리하루와 대조적으로 느긋한 표정을 한 양녕이 대답했다.
"조선과 무역을 하거나 외교를 할 때 이익을 보기 위해 삼한혈통임을 확실히 하려 보냈던 것 아니오? 영지까지 얻으면 더할 나위 없고, 족보를 얻으면 큰 성과고, 성씨만 얻어도 충분하니 말이오."
딱히 부정하지 않는 모리하루를 앞에 두고 말을 이었다.
"조선에서는 당시 여섯 지역의 슈고를 겸해 6국슈고라 불리던 오우치 가문을 백제의 왕손으로 인정해주면, 조선이 백제를 포함한 삼한을 모두 계승했으니 오우치 가문을 통해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오. 그런가 하면 오우치 가문에서는 일본의 다른 유력 성씨들이 다 미카도(왜황)에게 하사받은 것인 것처럼, 조선의 대왕께 성을 하사받아 권위와 실리를 동시에 얻고자 했던 것이겠지."
"대군의 말이 맞소. 거기에 명확한 증거는 필요 없었소. 주장과 인정만이 필요한 거래였으니 말이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이것이 쇼군께서 보내신 서신이오."
양녕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모리하루는 이대로는 계속 기선 제압만 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재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굳이 꺼낼 필요 없소."
서류함에서 서신을 꺼내려던 모리하루가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양녕을 보았다.
"협상하려는 것 아니었소?"
"쇼군이 원하고 공이 원한 협상 목적이 따로 있을 것임은 알고 있소. 쇼군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큐슈에서 내보내는 것일 게요. 그래야 지금 불안한 쇼군의 입지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공은 그걸 도와서 조정 내에서의 입지를 강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겠지."
모리하루를 정면으로 보며 양녕이 계속 말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협상은 그런 것이 아니오. 내가 왜 굳이 20년 전 나의 백부와 공의 형님이 했던 협상 얘기를 꺼냈겠소? 애초에 공을 협상 담당으로 보낸 시점에서 일본 조정에 볼일은 끝났소."
계속 허를 찔린 끝에 완전히 양녕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모리하루가 체념한 듯 말했다.
"도대체 나하고 무슨 협상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소. 설마 부젠을 나에게 남겨 줄 테니, 나머지 큐슈를 얻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이오?"
"그렇게 티 나게 하면 나하고 공이 거래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되지 않겠소? 조선이 큐슈를 모두 점령하게 도와주시오. 일본 조정이 이에 저항하자 큐슈뿐만 아니라 혼슈까지 진격하려 하였으나, 공께서 그나마 어떻게든 협상해서 큐슈 선에서 마무리 짓게 되었다는 흐름이 좋겠소."
"그럼 부젠은 어떻게 되오?"
"큐슈를 모두 점령한다 했으니 당연히 조선이 점령할 것이오. 영지를 잃어 가면서도 협상을 어떻게든 타결시켜 피해를 줄였다는 모양새가 나와야 공도 의심받지 않을 것 아니겠소?"
양녕의 일방적 제안에 모리하루가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얻는 것이 없지 않소. 그럼 조선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소?"
"지금 이와미와 아키 두 지역을 점령해 오우치 가문 영지의 동쪽을 완전히 가로막은 야마나 가문을 밀어내고 그 두 지역을 얻게 도와주겠소. 조선이 큐슈를 완전히 지배하고 공과 평화를 유지하면 지금처럼 동서 양면으로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니 동쪽 야마나 가문에게만 신경 쓸 수 있소."
양녕의 제안에도 모리하루는 여전히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 조건만으로는 두 가지 어려운 점이 있소. 첫째로 우리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것은 단순히 동쪽이 막혀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영지가 대부분 산지라 평야가 있는 큐슈 북부를 얻어야 식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오."
"둘째는 무엇이오?"
"동쪽 야마나 가문을 밀어내는 건 서쪽이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 야마나 가문은 가문원들이 나눠 가지긴 했으나 가문이 지배하는 지역이 6개에 달하는 6국슈고요. 스오와 나가토 두 지역만 가지고는 상대하기 어렵소."
양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고는 모리하루에게 대답했다.
"그 두 어려움 다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오. 첫째로 조선이 큐슈 북부를 얻는다고 해서 평야가 없어지지는 않소. 거기서 생산된 식량을 교역으로 사 가면 되오."
"우리 영지에 산밖에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교역을 한단 말이오?"
"꼭 자기 땅에서 나는 것으로만 교역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소. 지금까지는 일본 상인들이 하카타까지 와서 조선과 명나라 상인들과 교역을 할 수 있었지만, 큐슈가 조선 손에 들어오고 나면 공이 지배하는 지역이 일본이 외부와 닿는 최전방이 될 것이오."
양녕의 말을 들은 모리하루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혼슈 서쪽 끝단의 북쪽인 나가토와 남쪽 스오 둘 다 오우치 가문의 영지이니, 창해(동해) 쪽에서 오건 세토우치(세토 내해) 쪽에서 오건, 육로로 오건 해로로 오건 무조건 오우치 가문의 영역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내 영지에 명과 조선의 상인들이 올 교역항을 설치하고 그 이익을 얻으라는 것이오?"
"그건 곤란하오. 큐슈가 조선 땅이 되었는데 교역항을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 너머에 만들어 버리면 명나라 상인들이 매번 조선 땅 깊이까지 드나드는 꼴이 되오. 그럴 수는 없으니 명과 조선의 상인들이 모일 교역항은 장차 큐슈가 안정화되면 서북쪽의 히라도섬에 만들 생각이오."
"그 멀리 지어질 교역항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되오?"
"다른 일본 상인들은 오우치 가문의 영역을 지나고 조선 땅인 큐슈 해안까지 지나야 히라도섬에 갈 수 있소. 오우치와 조선이 같이 통행을 막으면 아마 일본 상인 누구도 히라도섬에 못 올 것이오. 하지만 오우치 소속 상인들에게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열어 주겠소. 그러면 통행권을 발행해 다른 상인들에게 파는 것도 이득이 될 것이오."
"명나라와 조선과 무역하는 권한을 오우치가 독점하고, 아예 다른 일본 상인이 무역항에 가려는 것조차 차단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요?"
"맞소. 그리고 스오 지역의 해안가 적당한 곳에 일본에서 온 상인들과 교역할 곳을 하나 만들고 거기에서 히라도에서 사간 물건들을 팔면 판매 이익도 얻고 교역 세금을 걷는 이득도 생길 것이오."
"시부카와 가문이 거의 하카타 하나로 세력을 유지하다시피 했으니, 무역 독점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식량을 사면 충분하긴 하겠소. 그럼 첫 번째 어려움은 해결된다 치고, 다음 어려움은 어떻게 할 것이오? 시부카와 가문은 하카타를 가지고서도 치쿠젠 하나를 가진 쇼니 가문도 제압하지 못했는데, 교역 이익을 그만큼 얻는다고 해서 우리가 영지가 세 배 차이 나는 야마나 가문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
양녕은 모리하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해결책을 말하기 전에 몇 가지만 묻겠소."
"그러시오."
"그 야마나 가문 이전에 6국슈고라 불렸던 것은 어디요?"
"우리 오우치 가문이오."
양녕이 첫 질문을 하자마자 모리하루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럼 한때 기울었던 야마나 가문이 다시 가세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무엇이오?"
"전임 쇼군, 요시미츠와 손잡고 우리 오우치 가문을 공격한 것이오."
"마지막 질문이오. 지금 쇼군에 충성하는 야마나 가문이 세력을 인정받는 대가로 견제 중인 것은 어디요?"
"오우치 가문이오."
마지막 대답과 함께 모리하루가 탁자를 내려다보며 이를 꽉 물었다.